JYD 에어세큐리티 고영주 사장에 대한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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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겐 아닐 수도 있었으나 오늘은 적어도 고영주에게 좋은 날이 분명했다. 오랜만에 맞이한 휴가의 첫날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1인 기업의 사장이자 그 유일한 직원인 영주 본인에게는 자기 자신에게 허락하는 작은 휴식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영주는 제주도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짐을 꾸리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늦가을의 추운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고, 저 멀리서 배추밭 나부끼는 소리가 파도처럼 들려왔다. 좋은 바람이었다. 영주는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놓친 것이 없는지 정돈했다. 자리를 비운 새에 중요한 연락이라도 오면 큰일이니, 자동 응답기는 제일 먼저 점검해뒀다. 창문, 벽면, 가구도 모두 그의 흔적이 남지 않도록 처리해둔 뒤다. 하물며 창틀 사이사이마저 정돈해뒀으니 달리 무얼 걱정하겠는가.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에 펼쳐진 캐리어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다시 서천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감회가 새로웠다. 몇 년 전 새 출발을 결심하고 떠나온 그 영원한 휴양지는 어느새 고향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과연 그곳이 그대로일까. 인간 세상은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서천이야 인세(人世)와 완벽히 같을 리가 없었다. 영주는 옷걸이에서 연갈색 코트를 떼어내면서 피식 웃었다. 아무렴, 그렇게 쉬이 변할 리가 없지. 모든 게 비슷할 것이다.

그는 코트를 대충 걸치고 책상 서랍에서 몇 가지 물건을 꺼내 캐리어 안에 담았다. 승무원복은 가져가야 고민했지만, 그래도 결국 넣었다. 노트와 여권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비행기를 탈 일은 없을 것이지만… 만에 하나, 그럴 일이 생길 것을 대비해서였다. 괜한 걱정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뭐 어떤가. 되려 그 물건들이 도움될 수도 있다는 것이 영주의 생각이었다.

영주는 캐리어를 닫았다. 이제 떠날 시간이다.

영주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잿빛 하늘이 드리워진 도시는 선선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영주는 한 손으로 우산을 펴든 채 다른 손으로 캐리어를 옮겼다. 발로 유리문은 고정한 상태였다. 영주는 문이 닫히지 않게 막은 채로, 자신이 방금 나온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멀찍이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간판에는 큼지막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JYD 에어세큐리티'

영주는 아쉬운 눈길로 간판을 바라보다가, 문을 닫았다. 닫음과 동시에 간판은 녹아내리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 치과 간판이 들어섰다. 이제 다른 자가 저 위를 올라가도 JYD 에어세큐리티 사무실은 찾지 못할 것이다. 단지 늙은 치과 의사 한 사람만이 그 안에 있으리라. 영주는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이는 재단에 특정된 이후로 조치해둔 위장 장치였다. 덕분에 본거지가 들키는 일은 없었다. 위치도 사라지고, 행정 주소 상에도 없는 주소로 전환되었으니까. 그러니까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하지만 간판이 없어지는 것은 언제 보아도 아까운 일이었다. 그 간판으로 광고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을 텐데.

서천은 언제 도착해도 불이익이 될 것이 없는 곳이지만 영주는 걸음을 서둘렀다. 오늘은 수요일. 운이 좋다면 두류산신이나 남이 같은, 오랜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캐리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분명 사업은 잘되어가나 묻겠지. 서천에 들르지 않은 지난 수년 간의 영주는,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정상 궤도에 진입한 사업, 쉴 새 없이 들어오는 외주 요청은 이제 정말 일을 해가는구나, 라고 자부하게끔 했다. 그러니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질 수밖에.

영주는 빙긋 웃으며 대로변 한쪽에 덩그러니 서 있는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다가갔다. 서천에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옛 추억이 저절로 피어올랐다.

아직도 격구를 즐기고 있을까? 두류는 실력이 더 늘었을지도 모르겠다. 남이는 여전히 뻐기고 있겠지.

생각은 저절로 그들 트리오가 꾸준히 영입하려고 한 한 남자에게로 옮겨 갔다. 작은 손님. …그는 아직도 권유를 거절하며 홀로 병실과 골방을 오가며 살고 있을까. 아마 그러리라고, 영주는 생각했다.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온 남자니까.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영주 자신이 그랬고, 다른 모두가 그랬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어떠한 큰일이 없는 이상.

때마침 들어오는 버스에, 영주는 정신을 차리고 버스 탑승 줄에 섰다. 어쨌거나 그들 모두를 곧 볼 수 있으리라. 곧.

그리고 무언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버스에 올라타려던 영주는 움찔하며 그 상태 그대로 굳었다. 분명 무언가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너무나 미약했지만, 분명 어떤 신호가 느껴지고 있었다. 무언가가 밀려왔다.

"저기요, 안 타세요?"

"아, 미안합니다…"

뒤에서 당황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는 머쓱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고 사과했다. 그러나 영주가 다시 버스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 감각은 다시 일렁였다. 마치 자신을 놓치지 말라는 듯.

별수 없이 뒤에 선 여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돌아선 영주는 한숨을 내쉬며 텅 빈 버스 정류장에 앉았다. 분명히 어디선가 영주를 부르는 존재가 있었다. JYD 에어세큐리티의 주력 사업인 기내 폭력 사태 진압 직전의 감각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렇게까지 알아달라, 이 말인가…"

영주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어디선가 바람이 넘실거리면서 불어왔다. 어딘가에서 미약하게 전달되어 오는 신호가 바람결에 강해지고 있었다. 바람이 나무들을 스치고 불어왔다. 감각은 점점 증폭되고 강력해졌다. 파도처럼 나부끼는 배추밭의 바람이 귀를 간지럽혔다. 빗소리가 점점 느려졌다. 신호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커지고 커져, 마침내 온 의식을 하나의 신호가 잠식할 정도로. 영주는 눈을 질끈 감고 그 신호를 받아들였다. 모든 것을 인식하기 위해.

그리고 마침내.

영주는 눈을 크게 뜨고 벌떡 일어섰다. 캐리어가 옆으로 쓰러졌다. 개의치 않았다. 마침내 신호의 근원지를 알아냈으니까.

A380 여객기, 런던행.

영주는 쓰러진 캐리어를 일으켜 세웠다. 가야 할 곳이 있었다.


그리고 버스에 올라탄 설세명 제13K기지 이사관은 미소를 지으며 백미러로 고영주가 반대편으로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까 해산물 잘 먹었다고 말을 못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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