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chapter12.png

2red.png



현재

— - —

garden.png

정원은 최소한 고요했다. 십만 년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기에, 물은 깨끗했고 풀은 푸르렀으며, 머리 위 태양은 거의 항상 파란 하늘에 떠 있었다. 아주 드물게 비가 오는 경우에는, 정원의 고요함은 우수로 바뀌었다. 그곳을 마치 담요처럼 덮어주는 조용한 어둠으로. 다음날 동이 트면 비는 멈추고 정원은 말랐으며 지난 수천 세대 동안 그랬듯 그렇게 있었다.

오늘은, 그러나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옆으로 비켜!" 아론이 소리치며, 문으로 이어지는 평원을 가르고 지나갔다. 건장한 수호자는 버티고 서서, 불타는 검을 살짝 들어올리는 것 말고는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수호자를 쳐다보는 아론의 눈이 이글거렸으며, 그의 시선은 앞에 선 무심한 골리앗 같은 자의 헬멧에 못박혀 있었다. 검 끝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고 불줄기가 그에게 날아오자, 아론이 가는 금속 막대를 하나 꺼냈다. 맨 아래가 삼각대처럼 갈라져 있었으며 끝 부분은 파랗게 빛났다. 그가 몸을 굴러 불길을 피했고, 수호자의 검에서 또다른 화염이 생기기 시작하자 현실 닻을 땅 위에 던졌다.

세계가 잠시 동안 일렁였고, 아론은 발 밑의 땅이 흔들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의 눈으로 자신의 주변 허공에 있는 무한히 많은 실들을, 각자 우주의 노래에서 특정한 음에 맞춰 있는 그 실들을 볼 수 있었다. 그것들의 멜로디는 귀에 거슬렸으며, 수호자 근처에서도 마찬가지로 노래가 비명을 질렀고 울부짖었다. 닻 끝 부분이 빛나자 실들이 일제히 조화를 이루었고, 순간적으로 서로 연결되었다. 입을 모아 부르는 그 음이 수호자를 때리자 그것은 멈추었고, 검에서 나오는 불은 다시 안으로 들어갔으며, 그러더니 수호자는 제 몸 안쪽으로 접혀들어가 부서지고 곪아터진 채, 푸른 실에 매달려 허공에 늘어져 있는 그슬린 뼈다귀가 되었다.

아론이 문을 향해 전력질주했으나, 자기 몸이 이상할 정도로 피곤해지는 게 느껴졌다. 내려다보자 한 노인의 손이 보였다. 운명의 손이 인생에 관여해 비정상적으로 늘려버린 자였다. 그의 피부가 팽팽해졌고 한 발짝씩 떼어놓을 때마다 근육이 위축되는 게 느껴졌다. 그는 앞으로 몸부림쳤고, 뒤편의 현실 닻이 윙윙거리는 소리는 점점 작아져서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몸 역시 다시 돌아왔다. 문에 도착하자 그가 활짝 열고 안으로 달려들었다.

아담 엘 아셈이 이브를 아내로 맞던 그날 밤, 그녀는 맏아들을 임신할 때 에덴에 대한 꿈을 꾸었고, 그와 함께 그곳이 태어났다고 한다. 아이들이 자랐을 때, 아담은 손에 쥘 검을 원했고, 정원은 내주었다. 밤의 아이들과 애통한 신들이 인간의 세계를 압도했을 때, 정원은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 에덴은 그렇게 무한한 장소로서, 그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은 언제나 원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데에 있었다.

이 때문에 아론 시걸은 영원한 생명의 나무 발치에 서 있었으며, 그의 발은 피 웅덩이에 잠겨 있었고, 소피아 라이트의 새하얀 시체가 초점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양 손목에서 검은 피가 한 줄기씩 땅으로 흘러내렸으며, 옆에는 얇은 은 면도날이 놓여 있었다. 그 끝은 소피아의 마지막 숨결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론의 손이 떨렸고, 숨이 막히고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가 그녀 옆에 무릎을 꿇었고, 그 충격에 피가 튀어 그녀의 얼굴을 얼룩덜룩하게 적셨다. 그녀의 피부는 차가웠고, 마치 이전에 수도 없이 그랬던 것처럼, 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론은 여기 와 본 적이 있었으나, 익숙한 두려움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심장에 맺히는 게 느껴졌다.

"죽음이여!"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가 소리쳤다. "죽음이여! 모습을 드러내! 날 데려가! 날 대신 데려가라고!" 비만이 그에 답했고, 빗방울 하나하나가 조용하고 주의깊은 신의 무심한 눈이었다. 아론이 절박하게 주변을 둘러보았고, 대답이 뭐라도 있을지, 탈출구가 뭐라도 있을지 마음 속을 파헤치는 동안 피와 물이 옷을 적셨다. "죽음이여! 네 약속을 지켜! 그녀를 되돌려놔! 되돌려 놓으라고 망할!"

그는 몇 시간 동안 소피아의 시체 옆에 앉아있었고, 고통스럽게 매 숨을 쉬며 자기가 오래전 옛날, 여기서 먼 어느 장소에서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들이쉬는 매 숨은 필사적인 질문이었으며, 내쉬는 매 숨은 똑같이 공허한 대답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그는 그녀의 오른손에 얼룩진 종이 쪼가리가 쥐어져 있는 걸 알아차렸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풀고 조그마한 두루마리를 열어, 그는 펜으로 우아하게 쓴 글씨를 읽어나갔고-

아론-

난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의 내가 아냐. 죽음과 함께 그 조용한 길을 걸어 네 옆으로 매번 돌아올 때마다 내 자신을 점점 잃어갔고, 내가 취하고 있는 이걸 알아보지도 못하겠어. 정말 미안해, 하지만 더 이상은 이렇게 계속할 수 없어.

캘빈 루시엔에게 샘에서 담은 우리의 마지막 유리병들을 내주고, 신을 믿지 않는 창을 그의 손에 쥐어준 건 나야. 난 그의 길을 봤고, 그를 네게로 이어주고 있는 붉은 선을 보았어. 아마도, 그가 네 신념을 깰 거라고, 널 다시 내 것으로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지난 수십 년 전 내가 널 이 길로 인도했을 때 저지른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난 정작 지금의 내가 소피아 라이트의 얼마나 작은 부분에 불과한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어.

너와 그 신념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어, 이제는. 집중을 방해하는 것도 더 이상은 없어. 이 일이 네게 얼마간의 평화라도, 나와서 우리가 함께 누릴 수 있었을 네 여생을 살아갈 기회를 찾아주기를 바래. 널 위해 바라는 거야, 이 일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널 기다리고 있고, 넌 여전히 그를 만날 거야.

어쩌면 난 널 다시 볼지도 몰라. 어쩌면 난 그 머나먼 해안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소피아

-주먹을 쥐어 종이를 둥그렇게 구겨버렸다. 이제 그의 숨결은 거칠고 급했으며, 눈은 두개골 속에서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천천히 일어서서 몸을 떨며, 그는 수천 년 동안 이렇게 있었을 정원을 가로질러, 풀이 푸르지 않고 물이 깨끗하지 않은 곳으로 향했다. 여기 와 본 적도 있었다. 전에 한 번, 유혹이 그를 영원으로 이끌고 목적이 그의 손에 머물렀을 때. 하늘이 어두워졌고, 빗줄기가 더 거세졌으며, 천천히 주변의 식물들이 시들더니 죽었다. 그는 계속 걸었고, 오래된 에덴의 황량한 광경을 지나 충격으로 크레이터가 거의 사방 1마일까지 펼쳐져 있는 지점으로 갔다.

발 밑의 땅은 딱딱하고 매끄러웠으며, 비틀거리며 내려갈 때마다 발소리가 났고, 뜨거운 눈물이 그의 얼굴 옆을 타고 흘렀다. 마침내 크레이터 바닥에 멈춰서서는, 그는 재빠르게 중심부를 향해 움직였다. 1만 년 동안 그곳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는 천사의 일그러진 모습이 보였다. 갑옷은 충격으로 부서지고 뒤틀려 있었다. 재가 얇게 쌓여 몸을 덮고 이목구비를 흐렸으나, 그 투구에 있는 빛나는 글자는 여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샛별.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흙 속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반쯤 땅에 묻혀 있으나 새것처럼 환히 빛났다. 열과 힘을 내뿜는 황금 검이었다. 아론이 다가서서 마치 땅이 버터라도 되는 양 검을 뽑아냈다. 그의 눈이 어두워졌고, 스스로의 확신이 그를 집어삼켰으며, 순식간에 그는 사라졌다. 아주 능숙하고 꼼꼼하게 글씨를 써놓은 종이 쪼가리가 땅에 떨어졌고 빗속에서 쓸려갔다.


현재

— - —

001.png

이 산 아래에 있다, 일지는 그렇게 말했다. 감독관들이 보초를 서고 있는 곳은. 나는 이 구조물을 연구하는 데 오랜 세월을 보냈으며, 그곳 깊숙히 파고들어 보려고 시도했으나 별로 운은 없었다. 이곳에는 단 한 군데의 입구만이 있다 - 정문뿐이고, 안쪽에서 잠겨 있으며 재단의 붉은 오른손이 지키고 있다. 이 구조물 내에서 당신은 마지막 두 감독관들을 찾을 것인데, 이들은 재단이 창립된 이래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저자인 나는 이 조용한 요새에 들어가 그들과 회합할 수 있는 유일한 자들은 감독관들 자신뿐이고, 그 밖에는 아무도 없으리라고 믿는다.

캘빈이 읽어나갔다. 이는 그러면, 당신에게 남겨두고자 한다, 친애하는 독자여. 내가 이 열세 명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데 쏟아부은 시간과 에너지는 이 페이지에 다 들어 있다. 이 지식이 어떤 성공이나 파멸을 가져올지는 그대의 몫이다. 나라면 나와 그들 사이에 거리를 둘 것이다. 다르게 행동한다면 틀림없이 당신에게 끔찍한 끝이 찾아올지니.

진심을 담아, 끝부분은 간결하게 쓰여 있었다. 우쿨렐레.

캘빈이 일지를 덮고 옆에 내려놓았다. 그는 먼 아래쪽 골짜기로 뻗어있는 비탈길 위에서 앉아 있었고, 멀리서 우뚝 솟아 있는 제01기지의 강철 문을 볼 수 있었다. 태양은 이제 지평선 아래로 막 가라앉기 시작했으나, 캘빈은 길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구불구불한 흙길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뚫린 적 없는, 재단의 가장 엄중한 시설의 문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며칠 전 핸드폰을 파괴했었다 - 애덤을 떠난 뒤 그는 반란이 자기 뒤를 쫓을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더 이상 주의를 산만하는 게 있어선 안 돼. 목표에 너무나도 가까이 와 있었고, 종착지에 반 마일에 돌덩이 몇 백 피트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는 올리비아의 시체를 근처의 동굴에 놓아두어 자연에게서 감추었고, 탐색하는 사람들에게서 숨겼다. 그러면서 그는 사과와 약속을 했다. 내가 이 일을 바로잡을게. 널 위해 돌아올게.

일지를 내버려두고, 그는 창만 가지고서 내려갔다. 밤이 골짜기 위로 찾아오고 달이 하늘에 떠오르자, 캘빈은 귀뚜라미와 바람 소리 말고는 거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어떤 것도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을 둘러싼 침묵 속에서, 끊임없이 마음 속에서 메아리치는 애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발, 캘빈, 제발. 제발 이러지 마요. 날 떠나지 마요.

그가 주변을 철저히 경계하면서 천천히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어떤 생명체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으며, 몇 초 뒤 그는 외로이 그냥 그대로 서 있는, 거대한 강철 판석 덩어리 두 개 앞에 서 있었다. 그가 한 손을 뻗어 한 쪽 판석을 건드렸고, 살짝 망설이다가 앞으로 밀었다. 그의 키 열 배는 가볍게 되어 보이는 문이 소리없이 미끄러지듯 열렸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섰고, 눈은 어두운 불빛에 적응하고 있었다. 등 뒤로 문이 미끄러지듯 닫혔으며, 터널과 계단이 다닥다닥 온 사방으로 뻗어있는 거대한 방 하나였다. 방 중앙에는 쇠창살로 된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캘빈은 다가서서 신중히 들여다보았다. 낡은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으나, 꼼꼼하게 만든 수공예품이었다. 버튼은 하나뿐이었으나, 누르려면 열쇠가 필요했다. 그가 물러서서 앞으로 걸어갔다.

방의 반대쪽 벽에는 또다른 문이 있었고, 재단의 화살표 인장이 문을 둘러싸고 그려져 있었다. 묵직한 나무 문이었으며, 문틀은 섬세한 그림이 있는 매끈한 석제 아치였다. 괴물과 경이로운 것들, 천상으로 뻗어있는 탑들과 지하로 놓인 것들. 우뚝 솟은 나무 위 골렘들 위의 인간형 종족. 땅 속에 잠들어 있는 거대한 기계. 검고 어두운 눈들. 이름없는 동물들의 얼굴. 이것들과 다른 많은 것들이 아치를 채웠으나 캘빈은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한 남자가 그 앞에 서 있는 걸 알아보았다.

그는 이 남자를 전에 본 적이 없었으나, 무언가 익숙한 점이 있었다. 키가 컸고, 믿기 힘들게도 2미터는 가볍게 넘어 보였다. 그 남자의 몸 전체는 마치 섬유라도 되는 것처럼 휘어지는 금속판으로 뒤덮여 있었다. 전선들이 갑옷 겉으로 지나갔고 등에는 강철 관이 있었으며, 처음에는 캘빈은 이자가 사람이 맞는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날렵하고 매끈한 헬멧 뒤에 캘빈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푸른 사람의 눈이 있었다.

캘빈이 창을 옆으로 들어올렸다. "넌 누구지?"

"난 목적이다, 붉은 오른손이지." 그 남자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힘 있는 바리톤이었고, 동굴 같은 방의 벽에서 메아리쳤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안 보였는데." 캘빈이 정신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네 동료들 옆에 설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난 재단의 의지다." 그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곳이 재단이 있는 곳이다."

캘빈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이자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함이 그를 덮쳤고, 철망 안에서 울리는 그자의 목소리에는 무언가 묘한 것이 있었다. "넌 내가 아는 사람인가?" 그가 잠시 뒤 말했다.

그 형체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에 대해 안다는 것은 재단에 대해 안다는 것이다." 목적이 말했다. "내 말이 그것의 말이요, 내 목소리가 그것의 목소리다."

마음 속의 눈으로, 캘빈은 의식 속에서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기억을 보았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늠름한 어린 재단 요원이 한 손으로 반란 요원 한 무리를 막으면서 듣기 좋은 바리톤으로 웃고 있던 그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그자를 뭐라고 불렀더라? 라멘트.

캘빈이 한 손에 권총을 쥐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난 O5-1이 돌아올 때까지 이 성소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의 말 없이는 아무도 들어서지 못한다."

"그자가 여기 없다고?" 캘빈이 숨죽여 욕을 내뱉었다. 만약 그자가 도망쳤다면, 아마도 지구 반대편일 테니 다시 찾는 데 몇 달이 걸릴 터였다. 이 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다.

"아니." 목적이 말했다. 마치 말을 멈추지 않은 것만 같았다. "그는 여기 있다." 그 이상 한 마디도 없이, 그 형체가 옆으로 물러섰다.

캘빈은 주저했으며, 여전히 권총을 주먹에 꽉 쥐고 있었다. 잠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뒤에야, 그가 긴장을 풀었다. 무기를 권총집에 다시 집어넣고, 캘빈이 앞으로 걸어갔다. 매 발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목적의 흔들림 없는 눈길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나, 그것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지켜보았으며, 옆으로 물러서 있었다. 그가 아치형 입구를 넘어서 들어가다가 멈춰섰다.

"목적." 그가 낮은 목소리라 말했다. "다른 자가 우리 쪽으로 찾아오나?"

"아니."

"안 그러도록 확실히 해두라고."

"네가 원한다면야."

캘빈이 아치형 문간을 넘어섰고, 다시 한 번 목적의 근엄한 눈을 쳐다보고서, 그 너머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그 너머의 통로는 크지는 않았으나, 벽의 바위 표면을 공들여 조각해 놓았다. 침침한 조명 아래서 그 모양들을 아주 희미하게만 알아볼 수 있었으나, 하나같이 섬세하고 복잡한 것처럼 보였다. 그가 손으로 부드러운 표면을 쓸며, 손가락으로 얼굴과, 건물과, 신 모양의 딱딱한 가장자리를 느꼈다. 고요한 터널 속에서, 그의 발소리 말고도 속삭이는 소리가 났다. 너무 멀리 있어서 들리지 않아야 할 소리였으나, 공간들 사이의 이 공간에서는 그냥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결국 그는 또다른 방으로 들어섰다. 아까보다도 컸으며 중앙에는 긴 타원형의 테이블이 있었고, 머리 위 멀리 어딘가에 조명등 여러 개가 밝혀주고 있었다. 화면들이 벽을 채웠으며, 각각 빠르게 여러 카메라의 영상을 휙휙 넘기고 있었다. 천장 조명으로 밝혀진 긴 복도들과 격리 시설들이 보였다. 실험실에 앉아있는 박사들과 연구원들이 보였다. 문가에 지키고 선 보안 인원들. 그리고 괴물들 - 판유리를 댄 방에서 앞뒤로 어슬렁거리는 악몽 속의 생물들. 제 피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악마들. 움직이지 않는 석상들.

그리고 그 모든 것 뒤에 가장 큰 화면이 걸려 있었다. 캘빈이 방에 들어섰을 때, 그 커다란 화면이 켜지더니 그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 그를 이 순간으로 이끈 인생에서의 순간들. 자신이 불과 12살일 때 소년원으로, 웰우드 재활소로 보내지는 모습이 보였다. 군대에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고, 그러더니 반란 요원이 그에게 접촉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다른 요원들과 함께 훈련받는 모습이 보였고, 델타가 그를 사령관으로 지명하는 게 보였다. 앤서니와 그의 첫 만남. 올리비아와의 첫 만남. 셋이 애덤을 만나는 모습.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길고 오랜 폭력과 고통. 마치 그의 바로 뒤에 서 있는 누군가가 찍은 것 같은 매 장면마다, 캘빈은 이제는 메스꺼운 기분이 들었다. 당시에 상상했던 것처럼 자신이 앞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대신 질질 끌려오는 모습이, 자신의 몸이 자기가 있던 곳과 아득히 먼 곳 사이로 뻗어있는 길고 역겨운 줄의 한쪽 끝에 묶여있는 게 보였다.

그는 줄이 어디서 시작하는지 보았고, 끝까지 따라갔다. 세계를 가로지르며, 죽음의 가장자리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이제는 여기, 이 방 안에서. 바닥을 가로질러, 긴 테이블 너머로, 방 반대편 끝의 화면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앉아있는 남자를 향해.

그 남자는 슬랙스를 입고 있었고, 최근까지도 재킷을 입고 있었다. 흰 셔츠의 가슴팍과 소매에는 피가 얼룩져 있었고, 어두운 선이 그의 얼굴에 그어져 있었다. 그의 옆에는 무언가가 놓여 있었고, 재킷으로 싸여 있어 캘빈은 그게 뭔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가 이 남자를 향해 한 발짝 떼어놓았으나, 그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네가 O5-1이지?" 그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남자가 무어라 말하는 게 들렸으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아론." 그 남자가 말하는 게 들렸다. "내 이름은 아론이야."

"아론이라." 캘빈이 반복했다. "아론 시걸? O5-1?"

"그래."

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감독관. 그자는 어디 있지?"

아론은 답하지 않았으나, 방 반대편에서도 캘빈은 공기가 즉각적으로 차가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그냥 너뿐이라고?" 캘빈이 물었다.

"그렇지." 아론이 답했다. "그냥 나뿐이야."

캘빈이 무기를 뽑아들고 즉각적으로, 계단에 있는 남자를 향해 다섯 발을 쏘았다. 각각 분명히 날아갔다는 걸 그는 알았으나, 총알은 아론에게 가까워지다 쉿쉿거리고 반짝이더니 녹아서 공기 중으로 없어졌다. 그는 다시 발사했으나,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는 총질을 멈췄다.

"일어서, 아론 시걸." 그가 무기를 집어넣고 등에 진 창을 빼내며 말했다. "이제 끝내자."

그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창을 어디서 얻었지?"

캘빈은 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 그 남자가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들렸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그가 말했다.

아론이 손바닥으로 한쪽 눈을 문질렀다. "평생 떠다니면서 이 장소에 도착해서 날 찾아내놓고는, 창 하나로 날 죽이겠다고?" 그의 웃음이 멎었다. "넌 심지어 자기가 왜 여기 있는지도 모르잖아."

"내가 여기 있는 건 내가 널 죽이면, 재단을 죽이는 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재단을 죽이면, 우주는 치유할 수 있다. 넌 암적인 존재야."

아론은 느긋하게 일어섰으며, 눈을 반쯤 뜨고 캘빈이 서 있는 방 반대편을 쳐다보았다. "아니, 아니지. 넌 나와 비슷해. 지당한 신념으로 가득 차서는, 스스로를 앞으로 밀어붙이고 있지. 그건 숙명이 아니야. 운명도 아냐. 순수하고, 형언할 수 없는, 알아낼 수 없는 자유로운 의지의 힘이지. 넌 거기서, 난 여기서. 1조 개의 세계에서도, 10억 개의 우주에서도, 우린 서로를 여기서 만날 거야. 신념이 날 이 장소로 이끌었지, 널 이끈 것처럼."

그가 계단에서 내려섰고, 재킷으로 싸인 꾸러미는 여전히 뒤쪽에 놓여 있었다. "두 개의 막을 수 없는 힘이, 장애물 없이 서로를 향해 돌진한다라." 그가 돌아서서는, 재킷에 손을 뻗어 빛나는 황금 검을 꺼냈다. 손을 쭉 뻗어 검을 쥐자, 칼날에서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터져나오며 불이 붙었고, 하얗게 빛나는 불꽃이 검 끝에서 낼름거렸다. 검의 빛 속에서 캘빈은 아론의 눈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눈과도 같았다.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다, 캘빈 루시엔." 아론이 검을 옆으로 가다듬으며 말했다. "네 신념이나 내 신념이 오늘 부서질 것이고, 우리 중 하나는 죽을 것이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끝내자."




- 뒤로 -


2.png
🈲: SCP 재단의 모든 컨텐츠는 15세 미만의 어린이 혹은 청소년이 시청하기에 부적절합니다.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