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판과 "빅 딜 시리즈"를 읽으셨던 분들은 아마 이번 이야기를 읽으면서 조금 의아하셨을 수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유리는 원래 이렇게까지 불행한 삶을 가질 예정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러시아에서 연구원으로 잘 살다가, 변칙 개체 하나를 잘못 다뤄서 대형 사고를 치고, 요원으로 강제 보직 변경당한 뒤 한국으로 전출되는 스토리였죠. 하지만 고작 실수 하나 했다고 타국으로 전출을 보내는 것이나, 연구원을 징계하는데 엉뚱하게 요원으로 전직시키는 것 등 스토리 전개에 비약이 너무 심했습니다. 무엇보다 초반부가 개그물이 되다보니 중후반의 심각한 사고와 수습 과정마저 힘이 빠져버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죠. 특히 시리즈의 전작이 상당히 막나가는 수준의 새드엔딩이었고, 그 비극의 주인공인 "브릴러 박사"가 유리의 이야기에 핵심 등장인물로 출연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개그 텐션은 시리즈 전체에 심각하게 어긋난 느낌을 줬습니다.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고, 그 결과 유리에게도 꽤나 험난하고 굴곡진 인생 역정을 주는 설정과 전개를 선택하게 됐습니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유리이지만 실질적으로 사건의 핵심에 놓인 인물은 두 명, 유리와 이바노프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배신자 A의 역할일 뿐이었던 이바노프는 유리의 불행 노선이 결정됨과 동시에 더욱 중요한 배역을 맡도록 수정되었습니다. 유리와 사랑했던 옛 연인 말이죠. 사랑, 오해, 좋지 못했던 이별,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꼬여버린 끝에 씁쓸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전개를 구상해낸 뒤, 굉장히 고민하고 고생하면서 글을 썼습니다. 특히나 아이를 유산했다는 설정을 추가하면서는 더더욱이요. 저는 남자이고, 변변한 연애 경험도 없기 때문에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여성 캐릭터의 심리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자기 인생을 망쳐버렸고 떠나버렸다가 또 망쳐버리러 나타난 남자를 보는 심정이란 어떨까요? 그의 아이를 가졌었지만 그의 잘못으로 유산한데다 자신은 그 사실을 알지조차 못하는 남자를 말입니다. 매우 복잡하리라는 것은 알겠지만 차마 상상하기도 어려운 감정이죠. 어떻게든 문학적 감수성으로 그녀를 내면화하면서 일단 이야기를 전개해나갔지만, 아무래도 확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후회하는 이바노프를 보면서 유리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녀가 이바노프의 죽음에 안타까워할까? 난 무슨 자격으로, 누구 좋자고 이렇게 민감하고 끔찍한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고 있을까? 온갖 잡생각과 고민이 오고갔습니다. 초고를 완성한 뒤 제일 먼저 저의 누나에게 글을 읽게 한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편하게 작품 상담을 할 수 있는 여성이기도 하고, 오래 전부터 창작을 같이 해 온 동료 작가이기도 하거든요.) 다행히도 누나는 제 묘사와 전개에 수긍해주었고, 이야기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한 여러가지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는 나인티님의 도움과 함께 이야기를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그 덕분에 두 사람의 이야기가 제법 충실한 복선을 통해 흥미롭고 납득가는 전개로 완성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셨나요? 괜찮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유리 이야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유리가 한국인(고려인) 어머니와 소련 장교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정 자체는 2015년판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리가 한국어를 구사할 타당한 이유가 필요했으니까요. 그러나 유리의 삶의 방향이 비극으로 전환되면서 부모의 동반 자살과 소녀병이라는 극단적인 요소가 그녀에게 주어졌습니다. 브릴러의 케이스가 겨우 지탱하던 평범한 삶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고꾸라진 것이라면, 유리는 아예 밑바닥에서부터 시작을 맞이한 셈이죠. 대신 반대급부로 오랜 실전 경험에 기반한 사격 능력이 그녀의 아이덴티티로 부여됐고, "현장 요원"이라는 신원이 그녀에게 좀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됐습니다. 재단 커리어 자체가 애초에 현장 요원 출신이 되고 오히려 연구원 쪽이 잠시 거쳐가는 자리가 된 것이죠.
요원이라는 직책은 재단 작가로서 저에게 매우 중요하면서 동시에 고생을 시키는 역할입니다. 재단의 활동이 많은 면에서 현장 요원에게 의존하고 있음에도, 한국어 위키에서 글을 쓰기엔 쓸만한 레귤러 요원 캐릭터가 너무 적지요. 제가 이야기에서 적극적으로 채용하는 쯔산 요원 역시, 사실 원작에선 보안대원 출신에 현재는 과학부/내부보안부 소속의 박사 비서일 뿐 현장 요원과는 거리가 멀죠. 그를 포함해 요원 직함을 달고 있는 대부분의 캐릭터는 옛날에 연구원 아니면 전부 요원이라 부르던 시절의 흔적들이고, 그나마 정말 드물게도 정보부 소속의 요원다운 요원인 카에스틴은 설정상 옛적에 현장 은퇴하고 간부로 넘어간 사람이니… 결국 설정이 불합치하는 걸 알면서도 가장 흥미롭고 자체적인 소재가 넘쳐나는 인물인 쯔산을 다시 한 번 현장요원으로서 등판시켜야 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제가 유리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현장 요원 쪽으로 조정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원래 초기 설정은 연구원 출신이고 그쪽이 적성이니 연구에 투입하되 러시아 지부 눈치가 보이니 요원 직책으로 남겨두자는 식이었는데, 굳이 이렇게 무리수를 둬 가며 설정한 이유는 당시 제가 글래시즈 팀을 과학부 소속의 연구팀으로 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명 다 연구직에 둘 생각이었거든요. 하지만 결론은 이렇게 됐고, 점심 모임 글래시즈 팀이 향후 한국사령부에서 정확히 어떤 입지로 자리잡을 지는 앞으로 제가 더 고민을 해야 할 영역으로 남게 됐습니다. 그 대신 이제 재단 커뮤니티는 뛰어난 사격 솜씨를 가진 유능한 현장 요원 캐릭터를 하나 갖게 된 거죠. 인원 파일 KO에 등재해두었으니 현장 요원 캐릭터가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채용하셔도 좋습니다. 비록 제 이야기에서 연출 & 설정 정리 목적에서 연도를 확정지어가며 등장시키긴 했지만, 굳이 정확한 연도에 얽매이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기타 이번 이야기 집필과 관련된 잡다한 이야기입니다.
- 유리가 거쳐가는 것으로 설정된 기동특무부대 요타-33, 지역특무부대 뮤-39는 모두 이 이야기를 쓰면서 구상한 설정입니다. 사실 이번에 판이 깔린 기동특무부대 설정 논의가 글감에 전반적으로 큰 도움이 됐죠. 기왕에 현장 요원으로서의 유리를 강조하자면 특무부대만큼 좋은 소재가 없으니까요. 요주의 단체와 카논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자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특무부대도 그 주제들에 연계되었고, 결과적으로 이 이야기에서만 쓰이고 그칠 게 아니라 요주의 단체와 카논 관련 창작에서 앞으로 계속 써먹을 수 있는 부대들로 설정을 만들게 됐습니다.
- 요주의 단체와 지역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이번 작품은 SCP보단 사건 위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만, 그중 SCP-039-KO "프로젝트 카론"이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고 있긴 합니다. 쓰면서 이번 이야기의 전반적인 주제는 "소통 부재와 왜곡된 기억, 거기서 비롯되는 갈등"으로 갈무리되었고, 여기에 등장시키기 더할나위 없이 좋은 변칙성이었거든요. 비록 원래 설정에선 향후의 기억소거에 저항하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극적 전개를 위해 변칙성을 강화하여 기존의 기억도 되살리는 수준으로 설정했습니다. B.E가 카론을 확보한 과정이나 변칙성이 강화된 이유 등은 굳이 작중에 서술해야 할 필요는 없겠다고 판단해서 잡다한 설명은 뺐지만, 일단 저는 프로젝트 카론을 진행한 연구조직의 일부가 아무도 아닌 자의 조언을 어기고 연구를 더 진척시키고자 B.E의 연구 세포로 합류했다는 전개를 생각했습니다. 어떤 경위든 작중에 등장하는 카론 바이러스는 재단이 보존중인 샘플과 다른 것이기 때문에 세부적인 변칙성이 다른 건 문제가 없다고 보고 기존 구상대로 썼습니다.
- 이바노프의 배신 이야기와 에필로그 마지막에 등장하는 "윌"은 엔트로피를 넘어서 최고이사회 소속의 고위 간부입니다. 제1차 삼각분쟁에서 B.E의 완패 위기를 백중세로 돌려놓은 유능한 전략가이며, 앞으로 전개될 제2차 삼각분쟁에서도 핵심 인물이 될 예정입니다.
- 이바노프는 죽었습니다. 재등장 예정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