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 일련번호는 아래와 같습니다.
SCP-1003-KO
SCP-1111-KO
SCP-1994-KO
SCP-1209-KO
조금 늦은 후기로 돌아왔습니다.
후기라고 해 봐야 딱히 할 말은 없고, 그냥 제가 이 작품을 쓰게 된 과정을 서술하려 합니다.
이건 제가 쓰면서 한 생각일 뿐, 절대적이고 유일한 해석은 아니니 그냥 참고만 해 주세요.
어차피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던 여러 해석들이 나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때로는 그게 작품을 더 윤택하게 만들어주니까요.
1. 글의 전반적인 방향성
우선 이번 천코 작품은 본사 SCP-001 제안 중 '릴리의 제안-아름답게 저무는 세상'과 비슷한 포지션을 취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내용을 비슷하게 하고 싶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1994-KO의 내용과 전반적인 분위기는 릴리의 제안과 전혀 다릅니다.)
그저 그 글처럼 짧고 굵게 써보고 싶었다는 뜻입니다.
릴리의 제안은 다른 SCP-001제안에 비해 짧은 분량이고 상당히 심플한 형식을 갖고 있지만, 글이 주는 여운은 다른 001제안 못지않죠.
그래서 재단 세계관을 깊게 알고 있지 않은 뉴비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작품이며, 은근히 인기 많은 001제안 중 하나입니다. 저도 001제안 중에서 저걸 가장 좋아해요.
그래서 긴 서술 위주보다는 최대한 짧은 글에 핵심 내용을 꽉꽉 눌러 담고자 했고, 가능하면 텍스트로만 승부하려 했습니다. (그치만 가독성을 위해 표와 접기 구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해당 SCP와 연관된 스토리도 추가로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 제시만 있어서 아쉽다'라는 평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건 원래 의도했던 방향성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구태여 쓰지 않았습니다.
사실 시간이 조금 촉박한 것도 있었고요. 시간에 쫓기며 엉성한 이야기를 억지로 써 내는 것보다는 원래의 아이디어를 좀 더 다듬자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제 글이 릴리의 제안만큼 명작이라는 확신은 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경연에 최선을 다했고, 적어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한 결과물을 낸 것에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2. 이 아이디어를 얻게 된 과정
초반 아이디어는
'사실 인간이 성체가 되기 위해서는 20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여기서 모자란 시간은 이미 어른이 된 사람들에게서 뺏어서 아이들에게 분배한다. 나이가 많을수록 뺏어오는 시간의 양은 늘어난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고, 시간이 모자란다고 느끼는 것이다.'
였습니다.
나쁜 아이디어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걸 재단 말로 옮길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1. 저 아이디어를 재단 글로 쓰려면 시간이라는 개념을 돈이나 물질과 비슷한 개념으로 치환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 것 같다.
2. 그러면서도 짧고 굵어야 한다.
3. 또한 나 자신이 흡족할 만큼의 글이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게 제 필력으로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경연을 보름 정도 남겨두고 노선을 틀었습니다.
두 번째 아이디어는 '인간의 죽음이 진짜 생명활동의 정지가 아니라 그저 아주 기나긴 번데기 상태인 거라면?'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SCP-1994-KO를 인간의 완전 변태 과정인 것으로 가정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고치 안에서 나오는 게 뭐가 되었건 재단 초기 단순 크리쳐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안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게다가 제가 좀 더 중점을 두고 싶었던 건 고치에서 나온 최종 생물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단지 낯선 존재의 성장을 위한 중간 과정, 혹은 수단에 불과하다면?'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기생 생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기생 생물의 최종 변이 형태(그러니까 SCP-1994-KO-A)가 쇠파리를 기반으로 한 생명체인 것에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단지 인간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생물종으로 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유튜브에서 본 사슴벌레 유충의 속을 파먹고 자란 기생파리 영상이 떠올랐고, 기생 생물의 최종 형태는 저런 기생파리와 비슷한 종류로 하자고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생파리 중 가장 대표적인 종류인 쇠파리로 명확하게 방향성을 잡았습니다.
쇠파리는 주로 소나 다른 가축의 혈액을 흡혈하며 생존하는데(가끔 사람도 뭅니다.), SCP-1994-KO-A의 먹이로 소의 혈액을 제공해야 한다는 서술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실 인간은 처음부터 파리 유충의 양분이나 될 운명이었다.'라는 서사가 완성되었습니다!
조금 더 부정적으로 나아가면 '인간은 열심히 성장하고 아등바등 살아가다 죽으며, 그런 인생에 엄청나게 큰 의미를 둔다. 하지만 실은 그 모든 게 파리 유충의 양분이 되는 과정일 뿐이다. 우리 인생이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생각 자체가 오만일지도 모른다.'라는 식으로도 해석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가상의 이야기일 뿐이며, 실제 삶에서 저런 태도를 지니고 사는 건 개인의 행복과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어디선가 이런 주장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인간이 인육이 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건 단순히 죽임당한다는 공포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의 성장과 삶, 죽음이 단지 무언가의 한 끼 식사가 되기 위한 과정이자 수단이 되어버린다는 좌절감과 공포감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작품은 이런 공포감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려 했습니다. 네, 우리네 인간의 삶이 그저 파리 유충의 식사로 전락해 버리는 거요.
3. 기준 지구(P-27)와 이전 기준 지구(P-26) 설정을 추가한 이유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SCP-1994-KO는 사람이 죽고 난 뒤의 변이 과정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죽고, 이 지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텐데 아무도 SCP-1994-KO를 본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연스러운 설정이었습니다.
물론 전 지구적인 부분 기억 소거를 한다거나, 아주 촘촘한 역정보 공작을 한다는 설정을 쓸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 설정의 개연성을 위해 살을 붙이느라, 중점적으로 전달하려는 주제가 상대적으로 묻힐 수 있겠다는 우려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냥 심플하게 가기로 했습니다.
'SCP-1994-KO는 이전에 인류가 살았던 행성에선 자연스럽고 흔한 일이었지만, 지금 인류가 사는 지구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일이다.'라는 식으로요.
이런 설정을 해 두면, 굳이 전 지구적 기억 소거나 역정보 공작 없이도 SCP-1994-KO를 민간이 전혀 모를 수 있게 됩니다. 우와!
(+이미 눈치채신 분도 있겠지만 P-26, P-27에서 P는 Planet의 약자입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격리 절차의 개연성을 높이기 위한 장치일 뿐, 이게 중점적인 게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P-27과 P-26에 대한 자세한 설정은 일부러 길게 서술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P-26 행성이 K-시나리오로 망해서, 다음 거주지인 P-27 행성을 테라포밍하여 인류가 거기로 이주했다는 설정만 담기면 충분했죠.
그래서 따로 문단도 만들지 않고 주석으로만 달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인류가 이 짓을 최소 27번은 했다는 설정을 넣고 싶어서 P-2도 아니고, P-3도 아니고 P-27로 표기했습니다.
K-시나리오가 터지자마자 당황하지 않고 바로 다음 행성(아마 인류가 있는 행성이 망할 것을 예측하고 미리 점찍어두었을지도 모릅니다.)을 찾아서 테라포밍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 짓을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라는 반증일 테니까요. 아하! 인류가 스쳐지나간 행성은 언젠가는 반드시 망하는구나!
이 P-26 떡밥을 완벽하게 회수하지 않은 게 흠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잠깐 하긴 했었어요.
그렇지만 자세히 서술하지 않은 게 오히려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 것 같아서 지금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
제가 작품을 쓰면서 어떤 생각의 흐름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세 파트로 서술해 봤는데, 만족스러운 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제 의도와 다른 해석이라고 해서 반드시 틀린 것도 아니고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