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블라입니다.
다짜고짜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개인적 사유로 운영진 사임 의사 표명 및 재단 활동의 잠정적 휴식기 선언 입니다.
이하는 이 사유에 대한 여러 구질구질한 이야기들입니다.
최근 들어 제 개인적인 생활에 큰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저는 군대에 있을 때 부터 음악으로 먹고 살고자 음악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전까지 악기는 다뤄본 적이 없어 그때 겨우 연습하던 피아노를 지금까지 연습하며 그나마 코드는 좀 잡는다고 말할 처지가 되었네요.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영화를 좋아하니, 영상 음악쪽으로 가고자 하지만 아직 배울 것도 많고, 제 실력은 흔하디 흔한 기성음악도 제대로 못만들고 있습니다.
군대에 있었을 땐 진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군대에서 심심풀이로 읽기 시작하던 SCP가 매료되어서, 저는 언젠가 유튜브에 SCP를 간단한 영상과 함께 음악을 작곡하고 추가로 음향에도 신경을 쓴 일종의 오디오 팟캐스트를 만들겠다는 그런 원대한 꿈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음악을 위해 최선을 다하던 때였었습니다. 12시까지 잠을 줄여가며 연등으로 화성학을 공부했고, 체련시간이 되면 기지 교회로 달려가 피아노를 연습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시간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제가 전역을 하고, 장비를 맞추고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더 열심히 음악공부를 할 수 있을까, 얼마나 프로가 될 수 있을까 기대하며 모포 위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전역을 한지 3년이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제 실력은 그냥 거기서 거기인듯 합니다. 연습? 작업? 글쎼요. 이제는 뭔가 그냥 해야 해서 억지로 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전처럼 그 열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역을 한 직후에 패기 좋게 군 적금으로 프로 못지 않은 장비를 사고, 휴학까지 때렸지만, 그 휴학기간이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나태로웠던, 진짜배기 백수의 시간이었네요. 제가 어떻게 872KO에서 백수의 삶을 그렇게 잘 묘사할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전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겠습니다.
어떻게 군대에 있을 때가 지금보다 더 생산적이었을까요? 더 좋은 환경에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왜 전 더 나태로워졌을까요? 전 이것을 타파하기 위해 알바도 하고 밴드 활동도 하며 최근 들어선 바쁘게 사는 중입니다. …만, 그래도 오히려 바쁘니까 음악에 더 손을 안대고, 더 다른 것에 집중하는 듯 합니다.
작곡 레슨을 받던 중, 선생님이 다른 열정적인 학생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아무래도 저도 좀 보고 배우라는 의도였겠지요. 그 학생은 밤잠을 줄여가며 작업을 하고, 언제나 음악생각을 하며, 락 밴드 음악을 작곡해야 할 때, 락의 역사를 달달 조사해 와서 그 정신을 익혔다고 하더군요.
이때, 뭔가 제 개인무의식 속에서 불길한 신호가 뇌리를 스쳤습니다.
뭔가, 그 열심히 하는 그 학생이 저와 겹쳐 보였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 학생은 음악을 열심히 한다는 것이고, 저는 재단 활동을 열심히 한다는 것이죠.
저는 밤잠을 줄여가며 글을 쓰고, 언제나 다음 작품 생각을 하며, 심리학/유럽 근현대사/기독교에 대해 글을 써야 할 때 그 자료조사를 달달 했습니다. 아니, 아직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본다면, 제가 그 백수였을 때, 제일 열심히 한 것이 뭐였나 생각해 본다면… 아카라이브에서 재단 채널을 운영한 것이었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다음엔 어떤 컨텐츠를 준비해서 어떤 경연을 열어볼까. 어떤 정보를 어떻게 정리해볼까. 어떤 아카콘을 만들어 볼까. 어떤 자짤을 멋드러지게 만들어 볼까…
그리고 채널 관리를 그저 현상유지에 쏟고 있는 지금은? 이제 재단 한위키에 쏟고 있지요. 1953KO와 나블라 스타일 테마, 그리고 익시온 연작을 보면 제가 이곳에서 이런 것까지 이루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본다면, 제가 군대에 있을 때는 제가 이루고자 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 곡을 완전히 쳐보기. 내가 좋아하는 곡을 화성학적으로 분석해보기. 여러 장르를 섭렵해보기. 내가 내 곡을 만들어 보기.
그리고 그것을 응원해 주는 선임들과, 피아노 연습을 할 때 같이 와서 반주에 노래를 불러주는 후임들이 있었습니다.
이 음악에 대한 열정은, 사실상 현재 SCP 재단 한국어 위키가 그대로 대체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음악을 공부하는 것이 이전처럼 두근거리지 않은 것이지요. 왜냐하면 이곳에서 글을 쓰는 것도 충분히 두근거렸기 때문이지요.
이제 이곳은 저에게 단순한 취미 이상입니다. 제 삶의 일부입니다. 하루 종일 작품 구상과 대화방에서 잡담을 하는 것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보내고, 다른 진짜로 목표로 해야 할 일에 대한 열정을 대신 이곳에서 '취미 삼아' 하던 것에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저는 재단이 좋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음악 공부도 해야 하고, 대학교 졸업도 해야 하고, 이번 밴드 합주 연습도 해야 하고, 빵집에 알바도 가야 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이루었다 감히 말하겠습니다. 어느 정도는 만족했습니다. 하나의 카논, 하나의 학부, 하나의 기특대, 제 캐릭터들이 여러분들에게 사랑 받는 다는 점과 1000KO 경연에서 2등이라는 성적에 저는 어느정도 만족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전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또 다른 목표(정확히는 여태까지 잊고 있던 목표)를 가지고 다시 성장하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재단에서의 잠정적인 휴식기를 가지고자 합니다.
…
네, '잠정적인' 휴식기 입니다. 전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꼭 돌아올 것입니다. 아직 완전히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또,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은 게 아직 산더미 같습니다.
이것은 선언입니다.
이제까지 학교 생활과 본래 하고자 했던 음악 공부보다 한국어 위키에서의 활동이 더 중심이 되었던 지난 날에 대한 반성이고, 이제는 한국어 위키의 활동을 제 삶의 중심이 아닌 부차적인 것으로 되돌리고자 여러분께 명시하는 저와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제가 다시 삶의 균형을 찾고, 다음 준비 중인 글에 대한 준비를 더욱 여유롭게 끝마친 이후에. 그때 찾아오겠습니다.
현재 준비 중인 SCP-001-KO는 올해 말쯤에 올리는 것을 목표로 여유롭게 작성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는 활동은 거의 없을 겁니다.
제가 이곳을 완전히 떠나버린 것도 아니니, 궁금한 사항이 있다면 역시 언제든 디스코드를 통해 제게 연락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제 글을 좋아해 주신 여러분들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또, 기약 없는 때에 나오게 될 제 글들을 기다려 주시길 염치없이 바라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여러분과 함께했던 날들은 언제나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Navla will retu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