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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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이지러진 달 위로 연회색 구름이 흘러갔다. 달은 가파른 협곡 사이를 비추고 거무스름한 덤불숲 위로 빛났다. 무성한 수풀 사이로 대기의 자욱한 안개가 엉겨 붙었다. 골짜기를 감싸 도는 험난한 산길은 안개에 가려져 흐릿했고, 둔덕 너머로 흐려져 사라져갔다. 비틀린 나뭇가지마다 희뿌연 안개조각이 나풀거렸다.
나는 조심스레 차를 운전했다. 안개에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며 온 곳이 하얗게 가려져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지워버리려는 양 안개는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런 날씨에 험한 산길을 가는 건 위험했지만 짙게 드리운 안개는 내가 원한 바였다. 나는 일부러 오늘을 택해 차를 출발했으며 하늘은 내 뜻을 따라주고 있었다.
전방에 길 위로 널브러진 애송 나무가 보였다. 안개 낀 어둠속 말라비틀어진 앙상한 가지들이 타이어에 짓눌리며 우드득 소리를 냈다. 두꺼운 줄기를 넘으며 차체가 크게 덜컹였으나 달리 문제는 없었다. 외진 곳에 위치한 인적 없는 비포장도로라 길이 험했다. 닦이지 않아 울퉁불퉁한 자갈길에 차체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혹여 돌부리에 걸려 타이어가 펑크 날 것이 걱정스러웠으나 아직 타이어는 무사했고, 차가 지프인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차로 안개 자욱한 산길을 달리는 동안 나는 취기에도 불구하고 스산한 추위를 느꼈다. 낮은 연비에도 히터를 최고조로 켰으나 오한은 가시지 않았다. 타오르는 불덩이 같이 달아오른 뺨과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손끝에서부터 몸 깊은 안쪽까지 오들오들 떨려왔다. 전율은 머리꼭지에서 타올라 등뼈를 타고 내려선 중심부 사이로 고였다. 추위 여부를 떠나 온몸이 떨렸다. 내 안에서 나온 병적이고 소름끼치는 오한이 막연한 두려움과 뒤섞였다.
차체가 덜컹일 때마다 트렁크에 실린 것들도 덩달아 흔들렸다. 그것들은 서로 아무렇게나 툭툭 부딪치고 박혔다. 지금 트렁크에는 내 억울하고도 부정할 수 없는 죄의 유일하고 분명한 결과물이, 나를 파멸시킬 끔찍한 짐이 실려 있었다. 그것은 트렁크 문에 마구 부딪히며 내 막막한 앞날을 끊임없이 조롱하고 있었다. 그 휘둥그런 눈은 부릅뜨려 서서히 말라가고 차갑게 늘어진 팔다리는 구더기들의 정찬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 짓을 위해 술을 마셨고, 그 끔찍한 것을 영영 숨겨버리고자 안개가득 낀 밤중에 이 외딴 산길을 가게 된 것이다. 내 심약한 정신은 견딜 수 없이 격한 상황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고 머리는 물젖은 솜으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심장이 격렬히 뛰다 못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오한에 몸을 떨면서 핸들을 붙든 채, 안개에 가로막힌 앞길을 신경질적으로 노려보았다.
길 아래 닿을 듯 뻗어 내린 가지들이 차창을 긁고 지나갔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음산한 반월과 잊힌 기억 속으로 아득히 퍼져나가는 안개, 나를 가두려는 듯 드리운 앙상한 나뭇가지들. 거칠게 줄달음치는 협곡과 구석진 사이마다 음침히 도사린 시커먼 덤불숲, 짙은 안개를 뚫고 검은 하늘로 우뚝 선 나무 우듬지. 산의 비탈면에서 음울한 외눈 신호를 깜박이는 송신탑,
초점 풀린 눈동자가 응시하는 가운데 일대가 나를 극도로 짓누르고 있었다, 취중에 눈앞이 어지러이 흐트러져 흔들렸다. 전방의 굴곡 역시 제대로 분간할 수 없이 드리운 안개의 장막과 휘감겼다. 무어라 할 수 없이 막연하고 음침한 취기 속에서 내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잠시 차를 멈출까 생각했다. 취기에 머리가 빙빙 돌았고 내가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신 게 아닌가 싶었다. 모든 것이 왜곡되고 극화되어 보이는 아래, 차창을 스친 마른 이파리가 내 앞을 덮어 가리더니, 구름 사이로 순간 모습을 드러낸 무시무시한 반월이 엄혹히 번뜩였다. 흐린 안개에 대비되는 그 청명하고 차가운 빛에 나는 두려움에 잠겨 절로 고개를 수그렸다. 어디서 새어드는지 모를 반사적인 공포에 손끝이 떨려오고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거웠으며 그 위를 드리운 나뭇가지가 나를 감싸 쥐어 휘감았다.
그러나 상황이 급했다. 트렁크에 실은 것을 급히 처리해버려야 했다. 나는 그것을 어디에든 파묻어야 한다. 어디든 상관없다. 가능한 깊고 으슥한 산속에 깊은 구덩이를 파 던져 넣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도록 도로 덮어 다져야 한다. 그것이 무덤임을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된다. 나조차 잊어버려야 한다. 나는 거기서 영영 달아나 안전히, 이전처럼 평온하고 안정된 내 삶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불시에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과묵한 목격자인 달이 차갑게 응시하는 아래, 달처럼 휘둥그런 두 눈이 나를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내가 이에 무슨 대가를 치러야 한단 말인가. 트렁크에서 나를 주시하는, 내게서 결코 눈을 떼려 들지 않을 저 싸늘한 눈동자가 어떻게 내 죄악의 증거란 말인가. 나는 저기서 영영 놓여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축축한 땅속에 파묻혀 부패하여 썩어들어 가면서도 저것은 끝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단지 잠깐의 선의로 이런 일을 겪어야만 한다면 차라리 내 목숨을 스스로 끊고 말리라. 난 억울하다. 미칠 듯이 억울하다. 그것은 나를 항시 감시하고 묶어두었으며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것은 나를 더럽히고 내 아래쪽을 집어삼켰다.
나는 살인마가 아니다. 결과적으론 그리되었더라도 결코 그러고자 한 것이 아니다. 나는 평생을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살아왔으며, 한 번도 이를 벗어난 적 없었다. 지난달 나는 주택가 다세대 원룸에 세를 들었다. 이곳에 이사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인근 이웃들과 안면을 트고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건실하게 지내왔다. 내 본성은 더없이 친근하고 사교적이라 누구와도 무난히 지낼 수 있었다. 내 원만한 성격이 상당한 호감을 불러일으켰는지 내 곁에는 달리 의도하지 않고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내게 호의적이었다. 나는 그들과 상부상조하며 이에 늘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동네에는 여러모로 평판이 나쁜 여자 하나가 있었다. 그녀는 저가 원룸에서 달세를 내고 살았는데, 변변찮은 몰골에 행동거지를 한데다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그녀는 딱히 문제가 되는 일은 하지 않았음에도-적어도 밤이면 길바닥에서 추태를 부리는 주정꾼들보단 나았다. 동네주민들에게 대놓고 기피당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쌀쌀맞게 대했으며 그녀가 곤혹스러운 상황에라도 처하면 그것이 자못 고소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들 사이로 틈만 나면 그녀에 대한 험담이 오고갔고, 대부분은 악의적으로 부풀려진 과거사에 관한 내용이었다. 대다수의 주민들은 이를 당연시했으나, 나로선 내색하진 못해도 그녀를 함부로 매도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올바르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단둘이 있을 때면 그녀에게 친절히 대해주었고 일상생활의 불편을 성심성의껏 챙겨주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 배려를 놀라워하면서도 기쁘게 받아들였으며, 내게 호감을 느낀듯했다. 나는 그녀가 사람들의 악감정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진심을 다했으나 달리 그녀에게 별 감정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배려가 너무나 놀라웠는지 내게 몹시 감사했으며 내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도 유심히 받아들었다. 그녀의 그런 태도는 늘상 주변인들의 무시와 한대를 겪어온 사람의 것으로써 나는 마음 한편으론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녀를 가엽게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나를 향한 그녀의 애정은 날이 갈수록 과잉되고 집착적으로 변해, 우리의 건전한 감정을 망쳐놓았으며 지금껏 내게 호감을 보인 어느 누구의 것보다 심하게 되었다. 그녀는 나를 노골적으로 따라다니고 특유의 크고 둥근 눈으로 엉큼한 눈빛을 보내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보이지 않으면 집요히 찾아다니게 되었는데, 그렇게 나를 찾아낼 때면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끈질기게 굴었다. 나는 결국 겉으로는 그녀에게 여전히 친절하면서도 부담감에 그녀를 슬슬 피하게 되었는데, 사실 나로서도 그러한 집착은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내가 겉으로는 여전히 친절히 대해도, 실은 그녀를 꺼리고 있음을 그녀도 눈치챈 듯했다. 이후 그녀의 집착은 더욱 심해졌다.
그녀는 내가 나올 때까지 집 앞에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나는 외출할 때마다 그 충혈된 두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마녀처럼 웃으며 내게 달려들어 놓지 않았다. 내 우편함과 휴대폰에는 그녀가 보낸 소름 끼치는 메시지들이 가득했고, 마당에서 과분한 선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길을 갈 때면 어디선가 그녀가 암호랑이처럼 튀어나오지 않을까 두려웠으며, 집에서는 그녀가 대문을 두들기는 환청에 시달렸다. 이는 단순 신경과민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며 이따금 저주의 말을 퍼붓다가도, 내가 불쾌한 기색이라도 드러내면 금세 쩔쩔매며 비굴하게 응했다.
일이 일어난 그 날 저녁-아, 이를 생각하면 수치심에 죽고만 싶어진다. 나는 귤 상자를 집 안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녀는 부탁하지 않았음에도 상자를 대신 들어주려 들었고, 종이상자를 내게서 빼앗듯이 들러업고는 내겐 작은 꾸러미를 들게 했다. 나는 기가 죽어선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녀는 상자를 현관에 내려놓지 않고 집 안까지 들고 들어갔다. 나는 어리석게도 경계를 풀고는 그녀가 내 집에 침범하게 내버려 둔 것이다. 상자를 내려놓고도 그녀는 도로 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돌연 내 손을 잡아끌더니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말 한마디에 자신의 영혼이 걸린 듯 중얼거렸다. “나는 죽어서도 당신과 함께하고 말겠어요.” 나는 섬뜩한 기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나를 안쪽으로 끌어당겨선 간드러진 목소리로 옷을 벗겨달라고 속삭이더니 자기 스스로 벗었다. 나는 그녀가 하려는 것을 깨닫고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으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꽉 붙들어 앉히곤 내 아랫도리를 잡아 내렸다.
내가 공포와 혐오감에 얼어있는 동안 그녀는 능숙하게 일을 보았다. 나는 너무 갑작하고 당혹스런 상황에 순간 굳어있었다. 그러나 내 아래는 상황을 짐작한 듯했고, 나는 그것에 거의 공황에 가까운 공포를 느꼈다. 나는 그녀에게서 벗어나려 했으나 그녀는 놀라울 만 한 힘으로 나를 잡아 누른 채 나와 결합되어 있었다. 이래서는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순간 나를 억누르던 경악이 사라지며 나는 근처에 있던 프라이팬을 집어 들어 그녀 머리에 발작적으로 내리쳤다. 그것에 맞은 그녀는 뻣뻣이 굳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흥분에 차 번뜩이던 두 눈의 초점이 풀리고 입가를 일그러뜨린 채 마룻바닥에 드러누웠다.
충격이 가시고 나자 나는 그녀 안에서 내 것을 빼고 일어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덜덜 떨렸다. 음산한 전율이 등뼈를 타고 흘렀다. 손으로 그녀의 허리께를 쓸었다. 그것은 온기가 사라지며 점차 싸늘하고 뻣뻣해져 가고 있었다. 나는 손거울을 가져와 그녀 입가에 대어보았다. 거울 면은 그대로였다. 그녀가 죽은 것이다.
분명한 사실에 나는 다시금 경련했다. 그녀는 죽었다. 내가 죽인 것이다. 나는 소용없음을 알면서도 그녀를 붙잡고 몇 차례 숨을 불어넣었다. 흥분이 가라앉고 서서히 진정되자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나는 결단코 그녀를 죽일 의도가 없었다. 한데 나는 무슨 짓을 저질러 버린 것인가.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나는 설명할 수 없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된단 말인가.
나는 우선 열려있는 창문을 닫았다. 이 광경을 본 사람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죽은 그녀를 밀쳐두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망자의 일그러진 얼굴이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큼지막한 두 눈을 부릅뜨곤 초점 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내게 무슨 미친 충동이 찾아들어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그러나 그녀가 한 짓을 생각하면 아예 내 탓도 아니었다. 아래쪽이 여전히 축축했다. 마치 더럽혀지고 오염된 듯한 이질감. 나는 그것을 티슈로 열심히 닦아냈으나 더러움은 사라지기는커녕 점차 번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이를 자수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모로 사실이었다. 그녀가 강제로 나를 범했지 않은가. 정당방위로 인정받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정상참작이 될 것이다. 그래, 경찰에 신고해서 사실대로 증언하자. 경찰에 막상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곤란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말은 해야 한다. 그러고서 나에 대한 선처를 바라자. 나는 자수하기로 마음을 정하곤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순간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다. 그건 너무 섬뜩하면서 사실적이어서 나는 당장에 전화를 내려놓고 말았다. 대체 내가 피해자라는 무슨 증거가 있단 말인가! 나는 반쯤 헐벗은 그녀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내 흔적이 그녀 안에 남았을 것이다. 내 중심부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행동했다. 아마 이 광경을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늦저녁 창문은 인적이 드문 주차장 뒷길을 향해 나 있다. 경찰은 내 편을 들어주지 않으리라. 어떤 여자가 살해된 상황에서 살인자의 흔적이 여자 안에 남아있고 목격자는 없다면 사람들의 통상적 상식이 어떻게 작용할지는 뻔했다.
나는 살인강간죄를 덮어쓰고 구치소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 없었다. 나는 아직 젊었고 앞날이 창창했다. 내가 지금껏 주변에 얻어낸 좋은 인상들도 나를 구해주지 못할 것이다. 그들 앞에서 나는 선량한 이웃 청년을 가장한 파렴치한 강간범일 뿐이었다. 내가 앞으로 남은 삶도 떳떳이 고개 들고 살려면 나의 죄를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를 없애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암매장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만약 내가 그녀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면 나로선 더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문은 차도 진입할 수 없는 외진 샛길로 나 있고, 근처에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나는 자수를 결심했을 때보다 더욱 겁에 질려 바닥에 놓인 시체를 바라보았다.
이 낙후된 도시에는 공업공수를 위한 커다란 댐이 있었다. 이와 접한 산간지대는 안개가 잦았고, 때때로 무진 시에서조차 보기 힘들만큼 짙은 안개가 끼곤 했다. 인근 야산을 흐르는 계곡은 여름철엔 피서지로도 이용되었으나, 더위가 가신 뒤면 산에 정착한 농가 몇 채만을 남겨둔 채 인적이 없이 고요했다. 나는 이를 이용해 안개가 짙게 낀 밤을 틈타 야산에 시신을 암매장할 계획을 세웠다. 그것이 다른 가설들보다 그나마 나아 보였기에-댐에 던져 넣는 방법은 시신이 발견될 우려가 켰다. 나는 밤중에 차 트렁크에 담요로 덮은 시신을 밀어 넣고 안개 낄 날만을 기다렸다.
운이 좋게도 이틀이 지나자 마침 계곡에 짙은 안개가 드리웠다. 나는 시신이 하루라도 빨리 썩어 없어지기를 기원하며 시체의 웃옷을 벗겨내 마당에 쌓여있던 판자때기와 함께 불태웠다. 주민들은 아직 그녀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녀가 내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다행히도 그럴 가능성은 다소 낮았다. 나로서는 그저 내 운을 시험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불안을 해소하고자 술을 약간 마시려다가, 불안에 공포가 더해지며 과한 음주를 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날을 더 미룰 수는 없어서 나는 잔뜩 취한 채 차에 올라탄 것이다.
지금 나는, 어지럽고 몽롱한 취기 속에서 달빛 밝은 산길을 달리고 있다. 안개 때문에 어디에 내려야 할지도 불분명하다. 어디에 파묻어도 그녀의 병적인 집착이 나를 따라올 것이다. 그녀는 싸늘히 경직된 손가락으로 흙을 파헤쳐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릴지도 모른다. 어디에 묻든 가능한 깊게 묻어야 한다. 비와 바람에 토사가 쓸려나가고 그녀의 부패한 육신이 드러나지 않도록 단단히 다져야한다. 그래야 내가 거기서 영영 달아날 수 있을 것이다.
추위가 점차 심해지며 구역질이 났다. 속은 역겨운 액체로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후끈대는 머리를 뭔가에 세차게 후려 맞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핸들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선 시동을 건 채 그대로 멈춰 서있었다. 핸들은 내가 토해낸 찌꺼기들로 찐득찐득 했고, 앞 좌석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후 시간이 좀 지난 것 같았다. 차갑게 식어서 굳어가는 토사물들이 온 사방에, 심지어 차창에도 눌러 붙어 있었다. 차는 길가네 아슬아슬한 언저리에 걸쳐있었다. 그 아래는 잡목 무성한 비탈진 절벽이다. 나는 몸서리치며 차를 뒤로 뺐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음을 알 수 있었다.
토악질을 하고 나니 컨디션이 조금 나아졌다. 머리가 쪼개질 듯이 아팠으나 속은 더 이상 울렁대지 않았다. 여전히 정신이 멀쩡하지는 않아서 눈을 감자 뇌리에 술기운이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잠들더라도 내일아침 숙취에 시달리리라. 나는 그녀를 묻어야했다. 나는 삽이 멀쩡한지 다시 한 번 점검하며 소매로 토사물을 훔쳐냈다. 술을 마시다니 생애 두 번 없이 경솔한 짓이었다. 내가 어떻게 이런 꼴로 알맞은 깊이로 땅을 파고 그녀를 감쪽같이 매장할 수 있겠는가. 술김에 실수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이래서는 완전범죄는 물 건너갔다.
나는 다시 액셀을 밟았다.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판사판에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심정으로 보다 외진 곳으로 차를 몰았다. 쿨럭쿨럭 튀어나오는 기침에 토사물 찌꺼기가 섞여 나왔다. 차 안에 악취가 그득했다. 오한은 전보다 심해져서, 몸살감기라도 걸린 듯했다. 정신이 더욱 흐려지며 나는 매 순간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흐려지고 분별할 수 없게 되어 안개로 아득히 퍼져나갔다. 트렁크에 실린 그녀라는 단단하고 명료한 돌덩이에 눌린 채 그대로 넓게 퍼져서 그녀를 잊혀 버리고자 차에서 새어나가 산간기슭을 자욱이 채웠다.
막연한 안개 속에서 죽은 그녀와 단둘이 있는 차 안, 나는 과잉되고 곡해된 두려움에 미칠 것만 같았다. 뒤통수가 서늘했다. 뒤에서 무미건조한 죽은 눈이 나를 뚫어지라 응시하고 있었다. 달빛이 반사된 그녀의 눈동자는 내 살갗, 짙은 안개를 꿰뚫고 그 안에 움츠린 나를 통찰했다. 언 듯 차창에 비친 금잔화 수풀에서 창백하고 앙상한 얼굴의 퀭한 안와를 본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으나, 곧 그것이 취기 어린 헛것에 지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내 신경은 진정되지 않아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이 무섭게 느껴졌으며, 급기야는 그녀가 일대와 작당하여 나를 죽이려 든다는 망상에 빠져들었다. 조금 전 내가 졸도한 순간 머리에 가해진 충격에 대한 얼토당토않은 가설을 망상하며 나를 저 아래로 추락시킬 뻔한 것은 다름 아닌 그녀임을 확신했다. 나는 가당찮은 공포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트렁크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추위와 공포에 떨고, 병적 호기심과 공포 사이에서 고뇌하던 끝에 마침내야 고개를 돌려 뒷좌석 너머를 넘겨보았다. 그런데 그 뒤엔 내 미친 예상과 은연중에 거의 일치하는 것이 놓여있었다. 그것을 본 나는 또다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나는 분명 그녀의 시체를 트렁크에 담요로 덮어두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자신의 안치소에서 기어 나와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늘어트린 채 알몸인 상체를 뒷좌석으로 내밀고 있다. 그녀의 휘둥그런 두 눈은-내가 그 눈꺼풀을 지그시 눌러 감겨놓았음에도 번뜩 뜨인 채 고개 돌린 나와 마주했다. 그녀의 얼굴은 나에게 애정을 표하는지 저주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일그러져있었다.
나는 액셀을 내리밟았다. 험한 산길과 나의 무분별한 난폭운전에 시체가 반동에 의해 앞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있을법한 일이라는 이성적 판단을 더는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고 울먹이며 그녀에게서 달아나려 몸부림쳤다. 그녀를 떨쳐내려는 반사적 공포 속에 차는 앞뒤 보지 않고 미친 듯 달려나갔다. 그런데 나는 취중에 그녀가 차안에 나와 함께 있다는 원초적 사실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내게 집착하면서 나를 죽이려 드는 그녀가 뒷덜미에 와 닿는 것을 느끼며, 나는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밤이 깊으며 안개가 걷혔다. 검은 밤하늘의 달만이 어둑한 수목 위로 차가운 빛을 던졌다. 으슥한 산간계곡의 비탈진 절벽 길이 골짜기를 따라 둘러가고, 그 아래 무성한 수풀이 바람에 부대끼며 쏴쏴- 소리를 냈다. 가파른 절벽 아래로 추락한 차량에 엇갈린 잡목들이 으스러졌다. 차는 빽빽한 나뭇가지 위로 추락한 그대로 앞으로 처박혀 대파하였다. 유리가 깨져나간 차창 내로 운전석에 엉겨 붙은 두 형체가 보였다. 죽음 직전의 가공할만한 공포로 얼굴이 일그러진 남자는 온통 토사물과 피로 버무려져 있었다. 그 곁에 죽은 지 이미 며칠은 지난 여자의 시신이 죽은 남자를 자신의 나체로 감싸 붙잡듯이 끌어안았다. 그녀의 갈비뼈는 갈퀴가 물리듯 남자의 것과 혼합되어있었다. 그제야 그녀의 부릅뜬 눈꺼풀이 감기고 고요한 영면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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