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한 방울까지

몇 년은 비가 내린 기분이었다.

이번 여름은 시작부터 망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쉴새없이 유리창을 후두두둑 두들기는 빗줄기 때문에. 뭐 물론 내가 잠잘 시간에는 잠을 청하는 데 도움은 됐다만, 나도 하루 종일 잠만 퍼자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깨어 있는 나머지 시간에, 빗소리는 나한테 짜증만 났다.

막 얼마 전에 제이크랑 같이 놀 계획은 잡아둔 적 있었다. 그냥 평범한 것들이었다. 자전거 타고 영화 보고 행인들 얼평이나 하고 그런 것들. 그러나 그 "막 얼마 전"에는, 이렇게 쏟아붓지는 않았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만히 앉아서 엑스박스나 켜고 성능 구진 헤드셋으로 서로 브리핑이나 하는 게 전부였다.

나는 항상 비가 싫었다. 엄마랑 아빠가 싸웠을 때도 비가 내렸다. 아빠 장례식 때도 비가 내렸다. 영화 속 진부해 빠진 장례식 장면에서 막 튀어나온 듯이. 이상형이었던 여자가 내 마음을 깨부수고 가버렸을 때도 비가 내렸다. 그 모든 게 다 질질 짜고 있는 신을 경멸할 타당한 이유지 싶었다. 거기다 하나 더, 이 자식들이 오면 내가 쫄딱 젖는다. 뭐 누구야 평온하기 때문에 비를 좋아한다지만, 이 자식들은 사람 춥고 아프게 만드는 것밖에 할 줄 모른다.

우리는 며칠 밤을 새 가면서 처음 들어보는 게임들을 주구장창 플레이했다. 나도 제이크도 딱히 비디오게임 매니아가 아니었지만, 자전거도 못 타고 짜증나는 동네 사람들도 못 족치는 거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었다.

엑스박스를 내려놓고 나는, 크게 소리내서 이렇게 말했다. "비 걱정할 필요 없이 그냥 밖에 나가보는 게 소원이네."

그날 나는 "소원 빌 때 조심해라"라는 말이 나도 예외는 아니란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창문을 후두둑 때리던 빗줄기가, 아주 조금씩 줄어들더니만 이윽고 완전히 멎어들었다. 지난주 내내 들려오던 소리가 멈춘 걸 알아차리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문으로 달려가보니 몇 줄기 빗방울이 아직 안개 낀 매끈한 유리를 흘러내렸다. 바로 본능적으로 제이크한테 전화할 생각이 났다. 지금쯤 일어났기를 기대하며.

전화를 걸고 나는 송화구를 바짝 귀에다 갖다댔다. 차분한 대기음 소리가 지붕을 줄창 때리던 빗소리에 지친 내 귀를 달래주면서 내 얼굴에 천천히 웃음이 새어나왔다. 짤깍, 제이크가 전화 받는 소리가 나자 나는 신이 나서 소리쳤다.

"야, 비가 그쳤어!" 내가 말했다.

"나도 봤어! 신이 드디어 일했다, 그치?" 제이크가 대답했다.

"말도 마. 너희 엄마한테 이제 자전거 타러 나가도 되는지 물어볼래, 아니면…"

"그래, 나 물어봐야겠다."

"그래, 나ㄷ—" 그때, 내가 말을 멈췄다. 창밖에 동네 사람들 모두가 바깥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뭔가 아주 이상한 광경을 찍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알았어."

핸드폰을 내려놓고 나는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갔다. 발이 꼬여서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부엌은 계단 밑 바로 오른쪽에 있었다. 엄마가 제일 시간을 많이 보내는 곳이었다. 요리를 좋아하시니까. 그래서 부엌으로 달려갔지만, 엄마는 안 계셨다. 거실을 찾아보기로 했다. 또 아무도 없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린 게 눈에 띄었다. 엄마는 현관 앞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천천히 나는 엄마한테 다가갔다. "엄마, 무슨 일이에요?" 엄마는 뭐라 표현 못할 두려움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가, 자기쪽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그대로 나는 나갔다.

빗물로 된 거대한 막이, 우리 위로 너붓이 펼쳐져 떠 있었다. 그 막 위로 빗물이 더욱 떨어지며, 점차 두꺼워져 갔다. 햇빛도 닿지 않아 너무 추워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집으로 들어가 이불을 가지고 나오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처음엔 한 방울에서 시작했겠지. 떨어져야 할 곳에서 50m는 위에, 그냥… 멈춰서면서. 그리고 한 방울씩, 한 방울씩 더, 자꾸만 공중에서 갑자기 멈춰버렸겠지.

비가 그쳤다는 생각으로 잔뜩 신나 있던 내 기분이, 바로 두려운 감정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제는 또 어떤 일이 생기게 될지. 빗물은 어디론가는 가야 할 텐데?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빗물막이 계속 두껍게 쌓여나가며, 나는 당장은 비가 그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빗물이 저렇게 자꾸만 크게, 더 크게 불어난다면, 질문은 한 가지…

…우리 위의 바다가 갑자기 중력의 법칙을 따른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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