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화: 디 이블 해즈 랜디드
그러더니 담뱃불이 꺼져버렸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은 어쨌든 간에 담배를 피우기 좋은 날은 아니다. 남자는 자신이 담배 이외에도 누릴 수 있는 것이 제법 많다는 점을 사랑했다. 비 오는 날의 소리와 눈의 새하얀 반사광, 한 무리의 새들의 소리 같은 굉장히 탈속적이고 자연적인 것들을 사랑한다는 점은 남자의 가장 큰 자부심 중 하나였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자연스러운 것들의 존재는 별 것 아니였다. 교양 있어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이 으레 브람스나 고급 술 또는 서정시를 즐긴다는 것을 내세우는 것처럼, 남자가 남자 자신에게 자신을 탈세속적이라고 공언하는 요소에 지나지 않는 노릇이였다.
바람은 골목길에 들이친 파도처럼 요란했고 더구나 골목길은 지독하게 낡아 있었다. 판잣집들의 존재는 마치 수온 변화에 민감한 산호초가 순식간에 백화해버린 듯이 고요한 내력을 암시하는 무생물이였다. 일가가 달그락대는 소리라던가, 떠들고 웃는 소리, 숨소리, 그런 모오든 소리를 들여다보면 이 동네를 무생물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겠지만 마치 짐승들의 고통마저도 자동인형으로 치부했다던 서양 철학자 데카르트만큼이나 남자는 이 달동네에 관심은 없었다.
그는 담배는 내던져버리고 캔 맥주를 주머니에서 꺼내들었다. 오래 쓴 옷이니만큼 상태가 좋지 않은 코트의 주머니는 찢어질 듯이 너덜너덜했다. 사실 몇 번이나 기워도 보았지만 도통 이제 굶주린 시간은 코트의 무사를 빌어줄 마음이 없는지라 주머니 연결부는 실밥이 보이고 올이 너덜너덜했다. 지금은 1990년. 몇십 년 전 남자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옷은 그 늙음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인 멋이 있다고 생각은 했다.
맥주를 마신다. 굉장히 싸구려 맥주였으며 남자가 술집을 차리고 싶어했던 청년인 만큼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 맛임에 분명했다. 남자의 인상이 경악으로 찌그러지지만 오직 식도는 무언가를 다시 마시기 위해 꾸물거린다. 성대와 울대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크, 하고 남자는 감탄 아닌 감탄을 토해내고는 지당한 이성의 원리에 따라 맥주캔을 쥐고 부어버린다. 계단 역을 하는 경사로를 누런 맥주의 길이 흘러서는 한 집의 문을 뱀처럼 스치면서 추락해 간다. 그는 깔끔하게 입을 닦는다.
남자는 대강 시간을 가늠해 본다. 아직 저녁. 그 사람이 도달하기 전이다. 도달하기 전에 냉큼 숨겨둔 물건을 회수해두고 떠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그렇게 오래 산 인간을 맞상대하는 것은 껄끄럽기 짝이 없고, 그만큼 살았던 인간이 수 번의 격동과 조우하고 나면 아마 여우가 되었든 사자가 되었든 속에 시커먼 짐승 하나쯤은 키우고 있을 것이기에 고작 스무 살 변칙예술가이자 종교 신도인 남자가 감히 가늠할 수 있는 인간도 아닐 텐데. 그런 두려운 생각을 하면서 남자는 외워둔 절차만을 속으로 끝없이 되뇌인다.
빨간 지붕 집에서 서쪽 골목으로 12걸음 걷는다.
그는 맥주가 스쳐갔던 집 지붕을 본다. 이 동네 유일하게 빨간 지붕이다. 그는 문 앞에 섰다가 조심히 달의 위치를 가늠한다. 철새들이 해와 달로 길을 찾듯이 조용히 서쪽을 알아내고는 그쪽으로 걷는다. 들은 바 12걸음이지만 걸음은 사람마다 죄 다르다. 아이와 청년과 노인이 다르다. 하지만 사실상 12걸음이란 아주 대략적인 수치일 뿐 개략적인 길라잡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남자는 걸음을 뚝 멈춘다. 웬 복잡한 쓰레기와 잡동사니가 가득한 일종의 더미가 골목길 끝에 보인다. 성공적이다. 어둠 속에서 길이 보였다.
"좋아."
그는 황홀경에 가득 찬 목소리로 중얼댔다. 입가에 초생달 같은 미소가 걸렸다. 쓰레기 더미를 본 자존심 센 남자가 낼 법한 목소리치고는 무척 밝았다. 당연히 쓰레기나 잡동사니가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길이 보였다는 것이니까. 그 더미 바로 앞에 그는 서서 고요한 눈길로 그 일그러진 형체들을 바라보고 있다. 재단의 끄나풀이 혹여나 오기 전에… 혹은 그 자가 마침내 나타나기 전에 모든 과정을 거쳐서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움직여야 한다. 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방식은 항상 옳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보다야 옳을 것이다. 그는 단 3초간 멈칫하다가 다음 계획을 회고했다.
놓인 새장에서 앵무새를 날려보낸다.
그는 발길질로 푸른 비닐, 철골 몇 개, 어지러운 빛깔의 낡은 알루미늄 캔 따위를 날려보낸다. 낡은 철골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조잡한 새장 속에 새 한 마리가 이래저래 몸을 뒤트는 것이 보인다. 정말로 한 마리 왕관앵무로, 몸은 잿빛이며 머리께는 크림빛인 이국적인 새다. 작은 짐승이지만 어둠에 놀라 날개를 푸드덕대다 창살에 부딪히거나 크게 운다. 길이 완전히 보인다. 그는 조용히 창살 문을 열고 손을 집어넣어 열대의 독사처럼 단숨에 새를 손에 붙잡는다. 새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치자 그 온기나 맥동 같은 것이 전해져 온다. 작은 짐승들이 으레 그렇듯이 으스러뜨리게 될지도 모를 만큼이나 작은 생물이다.
남자는 새장에서 새를 끄집어낸 후 공중에서 놓는다. 잠시 땅에 추락했던 새는 몇 차례 높은 울음을 토하면서 날갯짓하여 공중으로 날아올라 어느새 저만치 사라져 버린다. 자신을 붙잡았던 거대한 생물의 정체 따위야 돌아볼 필요 없이 날아가 버리는 날짐승이 우스우면서도 기특했다. 이제 단계는 거의 끝난 것이다. 그는 몸을 돌린 채 소매를 걷는다. 그리고 품에서 무엇을 꺼낸다. 작은 날붙이, 면도날이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손등에 선을 긋는다. 피 몇 방울이 흘러 땅으로 떨어져서는 몇 개의 점이 된다. 생물에게서 추락한 후에 비록 혈액이란 무생물처럼 굳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는 했지만 남자의 세계를 지배하는 마술의 영역에서는 다르다. 그 작은 자름의 점이 순간 촛불 같이 빛나더니 이내 공중에서 적색 빛으로 흩어져버렸다.
그 후 피를 흘려라.
빛에 반응하듯이 벽면의 공간이 이지러지면서 무지개빛으로 휘었다. 길Way이 열리고 있다. 남자는 천천히 다가가 공간의 균열에 손을 천천히 집어넣었다. 몇 년간 그 역할을 수행해 온 공공연한 금고를 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손에 차갑고 단단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에 잡힌 물건을 끄집어냈다. 대략 23 센티미터 가량의 흑요석으로 깎은 듯 검은 빛의 단검이였다. 비록 아주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근원불명의 맥동이 들리는 야수의 발톱처럼, 혹은 어떠한 우물의 힘을 퍼올리는 두레박마냥 진동하는 힘이 느껴지는 칼이였다.
성유물(聖遺物)을 얻었다.
"붙잡았다….. 정말 형님이 거짓말을 하진 않았어!"
남자는 감격하며 기대에 찬 웃음을 토했다. 그리고는 조용하고 엄숙한 몸짓으로 일곱 차례 성호를 그었다. 남자는 확실히 감사하기보다는 자신의 공로를 인정하는 추세였지만 이 도시에 둥지를 튼 새로운 교단의 꽤나 유명한 신도이기도 했다. 주홍색 신을 모신다고 해서 적백합교회라 불리우는 그 교단은 초상세계 곳곳에서 붉은 신을 모시던 한국에 뿌리를 둔 인간들이 만든 곳으로, 이런 인간들은 보통은 가진 것이라곤 폭력적인 힘이나 비밀 유지 능력 뿐이였다.
남자는 엄밀히 말하자면 2세대지만 가뜩이나 사람 없는 교단의 앞잡이 역할을 했다. 유능했고 약삭빠르며 무엇을 훔치는 것에 특화된 인간이였기에 칼이나 물품이나 심지어는 아이까지도 집어들면서 보통세계와 신의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단검 또한 매한가지였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그 검을 적백합교회 사람들은 교주가 선포한 대로 주홍왕의 성유물이라 넌저시 믿었다. 바다 건너의 일곱 창처럼 정말로 마법적 힘을 지닌 것이였다.
이 칼은 칼 중의 첫째이자 마지막으로 회수된 것이였다. 그가 알기로 다른 여섯 자루는 죄다 결국 교회의 수중에 들어왔다. 공기를 얼려서 날붙이 같은 비를 내린다던가 찔러서 정신을 조작한다던가, 공간을 그어서 이 세계의 모든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기는 마술적인 능력이 제각기 있었기에 이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재단의 영향력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남자가 지금 집어든 이 칼이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마도.
"정말 여기 칼이 있을 줄이야."
서늘한 목소리가 남자의 뒷목을 간지럽혔다. 본능적으로 단 한 순간에 뒤를 돌아본 남자가, 그와 직면한다. 시커먼 점퍼를 입고,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다. 강도의 스테레오타입처럼 쓴 검은 마스크 위로 선명한 눈동자가 번들거린다. 겨울처럼 냉정한 동공을 남자는 직면하고야 만다. 왔구나. 결국 여기로 찾아왔구나. 그는 손님에게 칼을 겨눈다. 피식 웃는지 검은 점퍼 아래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결국 왔구나. 김천(金川)."
"당연하지."
방문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뻔뻔하게도 손을 내밀었다. 날붙이를 눈앞에 둔 사람치고는 너무나 여유로워 보이는 동작이라 마치 맡겨둔 돈을 받아둔 것 같았다. 상대는 사마귀처럼 말랐고 여우 같은 힘이 있었다. 남자는 잘 알고 있다. 재단 요원들보다도 지금은 더 위험한 인간이니까.
"내놔, 칼."
"내가 왜? 당신은 이걸 가져갈 이유가 없어."
"이유는 있어."
그 순간 남자의 가슴팍에 주먹이 날아든다. 남자는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내고는 겨우 뒤로 몸을 날렸다. 단 한 순간안지라도 성유물 날붙이를 쥔 것은 그인데 모든 면에서 밀리고 있다. 어째서인지는 명확하다. 상대는 지독히 늙었고 교활하며 고작 스물 살 먹은 청년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상대일 것이다. 마스크 너머로 그가 씨익 웃는다.
"너희가 가져가서 좋을 것 없어."
"우리 신의 유물이야. 너 같은 친일파 나부랭이에게 넘길 순 없어."
"주홍왕… 말이지? 그 마귀?"
남자는 몸을 움찔한 후 다시 날붙이를 꺼내 든다. 이제 더는 소모할 시간이 없다, 그는 되뇌이고 있다. 배를 베든 다리를 찌르든 어떻게든 해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쩔까. 남자는 조심스레 빈틈을 찾는다. 기묘하게도 빈틈 투성이다. 그는 남자보다도 깡말랐고 그리 강력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게 두지 않는 쪽이다. 이쯤 되니 다만 그리 늙은 자라는 이유로 남자가 이길 수 없을 것 같지는 않았다. 세상에 늙은 인간은 수천이 있고 상대처럼 느리으나 젊은 인간도 조금은 있다. 긴장할 필요 없다.
그 순간 혜성처럼 그림자가 튀었다. 남자가 아니다. 단 한 차례 남자를 겨냥한 공격이 순식간에 그의 뺨을 가격했다. 뻑, 하는 충격의 소음이 남자의 턱을 뒤흔들었다. 주먹이라는 것은 아주 순식간에 생각과 사고를 마비시키는 편이 아닐 수 없다. 그 순간 남자는 통나무처럼 엎어졌다. 긴장하지 않는다. 칼을 회수한다. 두 가지 목표쯤이야 기절한 상대에서는 손쉽게 앗아갈 수 있는 것임을 검은 점퍼는 잘 알고 있었다. 손에서 풀려난 칼이 챙강 하고 차가운 바닥에 추락해버렸다. 그는 즉시 그 칼을 회수했다. 쓰러진 남자에게서는 때마침 피가 흐른다. 그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입가에서 흐르는 피를 찍었다.
검은 칼에는 또렷한 붉은 보석이 박혀 있다. 그는 손가락에 묻은 피로 보석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 둔다. 기적술사가 아니므로 최소한의 요행을 사용해야 한다. 피를 만진 칼이 진동하며 붉은 빛을 내더니, 칼날으로부터 붉은 빛의 기운이 마치 칼을 늘려놓듯이 공간을 찢으며 날카롭게 뻗어나왔다. 검기(劍氣)다. 단검 수준의 날붙이가 이제는 거의 정글도 수준의 칼으로 보였다.
"찾았군."
사람이나 물질을 베는 칼은 특이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딱히 주홍왕을 모시지도 않으니 중요한 것은 그 기능이다. 마법을 베고 결계와 주술을 벨 수 있다는 그 기능을 찾아 헤메고 있었다. 그는 쓰러진 남자를 질질 끌어다가 아직도 열려 있는 공간의 균열에 쳐박고 잡동사니로 숨겨두었다. 굳이 죽일 필요는 없을 테고 곧 적백합교회 기적사가 찾아올 테니 공간 틈새에서 고독히 죽지도 않을 것이다. 남자는 칼자루에서 피를 닦아냈다. 칼에서 뻗어나온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그는 조용히 칼을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이것이라면야 가능할지도 모른다. 정말 신의 유물이라면 인간의 주술 정도는 베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겠지. 천벌을 받기에는 너무 늦었으니 그 어떤 흐림도 마음엔 없다.
눈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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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사라져 가는 다방에서 만났다. 냉정한 곳이였고 스테레오타입조차도 뛰어넘을 만큼 침묵과 불친절이 지배하는 공간이였다. 그는 내내 주머니의 칼을 만지작대면서 상대를 기다렸다. 오래된 인연을 만나는 것 치고는 정말로, 정말로 싸구려 옷만 걸쳐 입고 온 모양새다. 급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는 쳐도 초라해 보여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고 더구나 찻잔조차 식질 않아서 영 어중간한 상황이 분명했다. 그는 입천장이 데일 것을 감수하고도 차를 몇 모금 들이켰다.
방울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여자가 들어왔다. 진갈색 머리를 묶어 내린 그 여자는 몇 년 보지 못한 사이에 훨씬 수척해진 것만 같았다. 당연히 기분 탓일 것이 뻔하다. 여자는 더 이상 몸에 변화가 있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유령처럼 죽은 심신이 그대로 살아 있을 뿐이다. 여자의 이름은 안소란. 작은 난초라는 한자 속뜻이라던가 혹은 소란을 안 칠 것 같은 그 이름의 발음 둘 다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였다.
고향에서 추방된 이후 돌아가려고 몇백 년이나 애를 썼던 사람. 남자와 만난 이후에는 그 집착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아주 조금인 수준이였고 지금조차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되돌아가려는 의지에 지배당하고 있다. 쓰라리다고, 남자는 중얼거렸다. 비록 몇십 년을 함께 지내오기는 했지만 아픈 것은 똑같이 아픈 법이다. 천 년이 지나더라도 똑같을 것이다.
"안녕, 김천."
여자가 앉았다. 그는 익숙한 듯 팔에 턱을 괴었다. 창백한 손목의 색이 묘한 전등 빛깔과 뒤섞였다. 눈동자와 머리칼과 입가에 반사광이 어렸다. 여자는 웃지 않았지만 그 기색은 확실히 어떤 즐거움을 암시하고는 있었다. 안소란이 증오를 품었더라면 남자로서는 쉬이 알 수 있었을 것이니까. 그만큼 알고 지내온 기간이란 길었다. 양측 모두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시간조차도.
"오랜만이야. 안소란."
"오 년이나 지났으면 오랜만이기는 하지."
여자는 다리를 꼬고는 웃었다. 남자는 나름 안심이 되어 같이 웃었다. 그동안 아주 크게 변하지 않았다. 수백 년을 살았대도 사람은 사람이다. 게다가 백 년은 살아간 김천보다도 안소란은 훨씬 오래된 시신이였으니까,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연상이다. 긴장이 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안소란은 담담하게 핸드백에서 몇 가지의 물건을 꺼냈다. 화장품 몇 가지, 그리고 병에 담긴 메뚜기 한 마리였다.
"그 메뚜기잖아. 안 쓰게?"
"귀신은 잡는데, 너무 눈에 많이 띄는 제령 방식이야."
여자는 메뚜기가 든 통을 남자 쪽으로 밀어냈다. 남자는 통을 받아들었다. 세을가에서 쓰던 귀신을 잡아먹는 살덩이다. 어떻게든 쓸모가 있을까 세을가 마을에서 집어와서, 전쟁 때가 되어선 일본군에게 넘겼다가 지금까지도 어떻게든 써먹어보려 애썼던 것인데도 결국 쓸모는 없었던 모양이였던 걸까. 안소란이 고향에 돌아가게 되면 집을 짓고 땅을 사는 데 쓰라고 넘겨주었지만 그래 봐야 벌레일 뿐이였던 것일까. 김천은 실로 오랜만에 무력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김천은 조용히 안소란의 안색을 바라보았다. 왼쪽 눈 아래가 파르르 떨리고 있다. 아니다. 거짓말이다. 안소란의 버릇이야 몇 개를 기억하고 있다. 거짓말, 그것도 제법 노여움 속에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아까까지야 분명 화가 난 느낌은 아니였는데 김천은 무엇을 잘못했던 걸까. 여자는 입꼬리 한 쪽만을 올렸다. 이제는 다시 표정이 화하여 측은한 듯한 표정이다. 이제 알겠다고, 김천은 생각한다.
"……거짓말이지, 안소란."
"맞아."
안소란은 입술을 문다. 죽은 몸이니 피는 날 리 없고 구멍만이 뚫린다. 분명한 창백이 둘 사이의 분위기를 적시고 있었다. 안소란은 분명히 알고 있다. 오 년간 떨어져 있기는 했을지라도 그 정도로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고, 그는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쓸모없어서가 아냐. 이걸 쓰면 전국에 네가 돌아왔다고 방방곡곡 알리는 거라서 그래… 이미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어, 넌."
"그래?"
"농담하는 거 아냐. 너, 조금만 더 앞으로 전진해도 살아있기는 힘들 거라고."
김천이 미래를 위해 세을가를 배반하고 나서 그는 몇 번이나 세을가의 자객들을 조우했다. 그 중 몇 번은 정말로 죽을 뻔 했다. 그것만으로도 정말 벅차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이 메뚜기를 썼다면야 세을가의 인간들이 단박에 김천이였던 자, 일본식으로는 가네가와 마코토가 명줄 길게 아직도 살아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요며칠부터 설쳐 대는 유령 조직들도 귀신을 먹는 메뚜기가 풀려난다면 당연히 그 주인을 찾아내고 싶어할 것이 분명하다. 안소란의 의견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고려할 가치도 없어 보였지만 김천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조심히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이게 뭐야?"
"칼."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마법을 베는 칼이야. 이거라면 안동의 경계를 벨 수 있을지도."
여자는 고마워, 하며 남자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지만 점차 미심쩍은 표정이 되었다. 이런 칼을 어디서 어떻게 구했단 말인가. 남자는 애써 웃기는 했지만 정말로 여자의 마음을 배신해둔 것은 사실이였다. 적백합교회 놈들이 습격해올지 모른다. 교리에서부터 보복을 정당화하는 놈들에다 기적사들까지 꽤나 있어서 세을가교도들에서 숨을 때처럼 능력이 잘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세을가보다야 한참 먼저 허물어질 놈들임은 명백했지만 시간 문제라는 것은 결국 그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자는 차를 한 모금 마신다. 아까보다는 식었다. 그렇더라도 입천장은 여전히 쓰리고 무엇을 마셔도 매한가지일 것이다.
"어디서 났어?"
"비밀."
"무슨 양파도 아니고, 비밀이 끝도 없이 나와."
여자의 말투만은 농담성이였다. 김천은 그렇다고 해서 안소란이 정말로 그 비밀을 쿨하게 비밀로 남겨둘 인간은 아님을 알고 있다. 굳이 캐지 않을 뿐 아마 김천이 어떤 만용을 부렸다는 것 쯤이야 대번에 궤뚫어보았을 것이고 김천이 할 일은 안소란의 예상을 깨기 위해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 뿐이였다. 우습다고도 생각했다. 김천에게 안소란은 안소란에게 김천은 정말 어떤 인간이였던 걸까.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시간조차도. 김천은 그럴 때마다 시간을 거슬러서 그 시절로 이동해두고는 했다. 처음 만났던 시절을 거쳐서 함께 세월의 풍파를 타 넘으려 했던 그때. 조선이 반도의 품 속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바로 그 순간들. 김천이 변하고자 했던 그러한 시점들을 기억했다.
김천과 안소란은 적응하고자 했다. 목적은 물론 달랐다. 안소란은 그 어떤 세계의 열쇠든 쏟아부어 고향으로 가는 문을 열고 금의환향하고자 했고 김천은 오직 더 나은 모습으로 살아남고자 했다. 거리낄 것 없는 두 명의 변칙능력자로서 둘은 협력했다. 김천은 가지고 있던 모든 변칙유물들을 바치고 시행착오 끝에 대일본제국 이상사례조사국의 말단으로나마 들어갈 수 있었다. 조선 동포들의 짓밟힘이야말로 수도 없이 본 것이라지만 둘은 눈을 감는 법을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들이였다. 굳이 민족이라는 개념이야 헌신짝처럼 내버릴 수 있었다. 하나는 미래를 위해 하나는 과거를 위해 그런 식으로 살아갔다. 우스운 일이였지만 동시에 진지한 일이였다.
그들은 인천 부근에 집을 구해 동거했다. 제법 일본식인 가옥이였다. 김천은 양복을 즐겼다. 까마귀처럼 검고 바다제비처럼 잿빛인 옷들이 집안에 채워지고는 했다. 안소란이야 옷을 즐기는 편은 아니였지만 대개는 값싼 기모노라던가 교복으로 쓰이는 저고리와 먹치마를 모방한 것을 입었다. 안소란은 종종 핏기 없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분칠을 했던 기억이 있다. 아무런 체취도 없는 사람에게서 종종 분 냄새만 난 적이 언젠가 있었다. 집안은 안소란의 추억을 담아둔 고향의 그림이나 지도 따위가 걸려 있었다. 김천은 이를 보면서 정말 그 고향이 안소란씩이나 되는 여자가 그토록 바랄 만한 곳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다반사였다.
남과 여 간에 그 어떠한 일도 없었다고 그는 가끔 생각해 왔다. 부대원들이라거나 다른 사람들은 두 사람이 혼인했다고 종종 착각하고는 했다. 물론 동거라는 단초에서 찾아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알리바이였기에 굳이 부정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왜 정말로 그때는 아무런 일도 없었는지. 김천은 안소란의 집념과 눈빛과 진갈색 머리칼을 존숭했지만 그 이외 요소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였던가, 그게 아니라면 정말 우정이 돈독해서였나. 과거는 정말이지 외국이고 거기서 모든 사람은 다르게 살았다. 안소란조차도.
결국에는 일본은 패망했고 보복이 덮쳐오면서 한동안 여자는 안동의 경계로 내려갔고 남자는 떠돌다가 다시 전쟁이 터지고 또 끝 아닌 끝이 나서야 결국에 둘은 다시 만났다. 그런 역사를 겪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 안소란은 그의 앞에 있다.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뭐, 알겠어."
여자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납득이 먼저였다는 신호다. 그는 꺼내 둔 화장품을 만지작거렸다.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분홍빛 용기 속의 그것은 마치 박제 꽃처럼 창백하고 생명 없는 물질이였다. 김천 또한 턱을 괴고 들여다보았다. 창백한 여자와 창백한 물품이 조명 아래에서 하나의 풍경이 된다. 다른 인간처럼 살아가기 위해 찍어 바르는 그 화장품이 그렇게나 생명 없는 것이였던지, 그 풍경을 남자는 오랜만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안소란은 여기 더는 남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해 본 모든 일들 중 변칙예술을 가장 사랑했으니 갤러리아를 거쳐 서울까지 올라갈 것이다. 김천은 따라가지 않는 편을 택했다. 되도록이면 김천은 움직이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어쩌면 전국에 있을지도 모르고 덧없이 가진 힘을 써서 위장해봐야 숙련된 사르킥교도나 세을가인 이하의 허접한 술책일 뿐이다. 죽음을 겪을지도 모른다.
처음에야 김천 또한 안소란을 따라갈까 했지만 여자가 완강히 말렸다. 안소란은 김천더러 위험을 감수할 바에는 재단에 투항하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일본 제국군에 들어갔던 것처럼 차라리 재단에 격리되어서 누구에게도 피살당할 필요 없이 살아가라고 말했다. 재단은 원한만으로 누군가를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우습게도 죄의 경중을 따지자면 김천이 그 악명 높은 다른 전범들 수준은 아닐 테니까.
김천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물론 김천의 숨이 붙어 있고 안소란의 원념이 끝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만나겠지만은 설령 다시는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너무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김천은 헛기침을 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안소란."
"응?"
"우리는 무슨 사이지?"
안소란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김천은 납득하지를 못한 것일까, 혹은 전후 몇 차례 너덜너덜해진 인간관계를 재확인하고 싶은 걸까 안소란으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였다.
"듣고 싶은 대답이 있어?"
"아니."
"웃긴다, 너."
안소란은 다리를 풀고 몸을 숙였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턱을 긁었다. 그 사이의 분위기가 마치 블랙홀처럼 휘고 제라늄 박제와 같은 색으로 변환되었다. 다방의 음악 소리가 몰락하는 동종업계를 암시하듯이 날선 파장을 뿌렸다. 기묘한 사상이 죽어가는 새천년으로부터 다시 십 년 전. 그들은 고요히 숨을 죽였다. 정말로 그들은 어떤 사이일지 둘 다 모르고 있다. 보내온 시간을 몇 차례 읽어두어도 기존 패러다임의 분류군 따위로는 의미 없다.
김천은 안소란의 의지를 사랑했다. 닭을 잡아 그 피로 부리는 저주술부터 적백합교회의 칼까지 수없는 방법을 제시해주면서 김천은 귀향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대로 귀향이 성공한 미래를 생각해보며 고향에 있을지도 모르는 저수지 옆에 인천의 그 집을 닮은 가택을 하나 짓고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안소란은 김천의 자유를 애정했다. 김천을 노리는 수없는 적들을 염려해 두고 때로는 그들을 교란시키거나 벌어먹을 새 길을 찾아주면서 살아갈 방침을 기록했다. 고향에 돌아가 익숙한 그 땅에서 한 줌의 변칙개체를 파는 사업까지도 꿈꾸고 반쯤 성공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 연인들만큼 사랑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친구 수준의 사랑과 가족 수준의 걱정은 품었지만. 결코 그렇게 사랑한 적은……
"안소란."
"또 왜?"
"만약에……"
"네가 날 사랑한다면 어떻게 생각하냐고?"
김천은 피식 웃었다. 오래 지내온 인간의 직감이란 정말 지독할 정도로 예리하구나. 고향의 세을가 사람들도, 친부모들도 김천을 그렇게까지 그를 잘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정말 거짓말조차도 허락해두질 않는 김천과 말을 흐려 숨기는 행위조차도 간파하는 안소란은 명왕성과 그 위성만큼이나 기묘한 긴장성 궤도로 돌고 있다. 안소란은 냉정한 눈길로 허공만을 응시했다.
"글쎄. 반대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나는 좋다고 생각해."
"쓸데없이 대담하네, 김천."
여자의 눈이 반달의 형태를 그렸다. 생기 없는 동공이 태양처럼 김천을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여자는 대답하기 전에 얼버무렸다. 이 밤, 고향에 갈 길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로 떠나기 전의 이 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바깥은 어두웠다. 밤하늘의 동쪽이 희어지기까지 네 시간이 남았다. 충격을 받은 밤이 하늘의 눈물을 쏟아내다가 얼어붙어서 눈은 내리고 있다. 담뱃불쯤이야 꺼 버릴 수 있는 북풍이 그 오래 전 산길에서처럼 불고 있다. 변칙성 하나만 믿고 살아온 남자와 집착 하나로 살아온 여자는 그날 처음 가능성의 영역에서 마주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
김천은 세을가 마을에서의 삶을 기억했다. 소년은 천애고아였고 그 변칙성을 발견한 조선 국가기관의 군사들에게 한동안 쫓기고 있었다. 어떤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김천의 친부모가 되기로 현실의 계약을 맺었지만, 세을가에서의 삶은 너무나 느렸다. 봄이 되어 파종한 것들이 가을이 되면 거두어지고, 짐승들은 밭을 갈다가 죽고 잡아먹혀지고, 주술과 혈술은 항상 똑같은 말을 했다. 김천은 어느 밤 바깥을 향해 다시 나섰다. 소년 시절 김천을 그리도 쫓았던 세상이 변화하고 있었다.
조선 왕조가 뒤틀리고 사람들은 변질이든 변화든 어떻게든 바뀌고 있던 그때, 김천은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려 시도해 보다가 죄다 실패하고 안소란을 만났다. 안소란은 사실 변하지 않는 인간상이였다. 죽은 이후에도 결국 한 가지 귀향이라는 목표만 지독하게 집착했다. 김천은 대개 변하지 않는 것을 경멸했으나 안소란은 아니였다. 안소란의 귀향이란 김천의 행복한 자유 정도의 관념이였다.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였고 목적을 위해 수천의 수단을 사용할 수 있었다. 더구나 여자는 절대 꺾이지 않은 것이다. 몇백년 동안 매달리는 그 마음을 어떻게 김천이 이해할 수 있었을까.
남과 여는 다방을 나와 쏟아지는 눈의 거리 사이를 걸어갈 때 말하지 않는다. 긴장이, 심장 맥동이 그 거리를 채우고 있다. 둘 다 눈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옥 같은 백색이라고 남자는 상상했고 불필요한 방어막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그 정도로 실없는 겨울의 기후일 뿐이다. 그럼에도 결국은 계절이였고 분위기를 지배하는 거대한 무형의 존재였다. 눈을 피하려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들은 거리를 가로질러 걷는다.
"김천."
안소란이 묘한 음성으로 속삭인다.
"왜 그런 화두를 던진 거야?"
눈이 안소란의 머리칼에 쌓이고 있었다. 김천의 모자에도 매한가지다. 두 개의 칠흑에 눈이 쌓여 밤의 품격을 강화하고 있다. 김천의 폐부로 냉혹한 기온이 스민다. 그는 망설이기 위해 상상한다. 상상하기 위해 시간을 번다. 하지만 결국 밤은 짧고 의식해야 할 생각은 많은데, 할 수 있는 말도 많지 않다. 최악의 순간 눈은 미생물 무리처럼 공중을 부양하고 있다.
"헤어지기 전 더 의미 있는 일을 해 보려고."
"그게 무슨 뜻이야?"
몇십 년을 동거하면서 하지 않은 일이 있어, 하고 안소란은 말하려다 입을 닫는다. 의미 있는 일이 무슨 의미를 뜻하는 것일지 결코 모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안동으로 돌아가기 위한 발악이야말로 여자에게는 1순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라는 것이 정말 다른 분류군이라면.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지만 정말 그랬다면 김천과는 정말로 의미 없는 관계로만 살아왔구나 싶다.
김천, 넌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어. 세을가는 배반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 자들이 당한 고통이 너무 크니까. 정말 네가 그 자들을 직접 죽이지는 않았고 빼돌린 것이라고는 메뚜기 종자 뿐이겠지만 변명거리가 아냐. 김천, 붙잡히지 마. 붙잡히면 넌 영원히 고기 인형이 되어 고통 속에 죽게 될 거야. 차라리 그럴 것 같다면 재단에 투항해. 아니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안소란은 그런 식으로 염려했다. 김천이 자신의 귀향을 철저히 도와주었다는 그 우정이나 비즈니스적 관계라고 생각은 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언제?"
"지금."
김천은 당당히 대답했다. 고백이 아니라 분석이라고, 또한 덧붙인다. 안소란은 당황하거나 부끄럽다거나 그런 반응을 지어 보이기에는 너무나도 김천을 잘 안다. 대신 피식 웃는다.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부류의 웃음은 아니다. 여자가 어깨 위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낸다. 망자의 파편처럼 백색이 쏟아져 내린다.
"그럼 왜 지금이야?"
"생각해 봤거든."
"그놈의 생각은….. 그럼 생각해봐. 우리가 사랑해서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안소란은 김천의 모자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주었다. 김천은 피식 웃는다. 떠나가기 위한 아침이 떠오르기 전에 생각해두기 좋은 질문임이 확실하다. 글쎄. 이미 어떠한 생체 기능도 없는 여자와 함께 법적으로 불가능한 결혼을 꿈꾸기도 했지만 그건 본질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남자는 머리카락을 꼬면서 다른 거창한 일들을 생각해보았지만 결국에는 원점으로 돌아와 안소란이 돌아온 고향에서 집을 짓고 살아가는 것이 제일이라고 여겼다. 그렇대도 결국 고백하기 이전과 지금 달라진 것이 뭐가 있는지 도무지 이해해둘 수 없다. 김천이 정말 적이 가득한 상태라면 안소란과 더 이상 자주 만나서는 안 되는 것이 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랑이 제법 현실적인 문제에 닥친다면야. 그래서 남자는 겨우 어떠한 답안을 생각해 두었다.
"하룻밤만 연인처럼 사는 거."
"연인처럼이라."
"그래. 그냥 저 수많은 사람처럼 말이야. 세을가의 탈주자나 실향한 사람처럼 사는 게 아니라."
여자는 눈을 감았다. 속눈썹에 눈송이가 맺혔다. 그날 그 일련의 계획으로 인해 그들은 함께 같은 침대에 누웠다. 그 이상의 행위로는 나아가지 않으려 했다. 둘 모두 그 이상의 행위까지 나아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상호작용으로 만들어내는 그래프적 행위를 재현하기에는 둘은 서로를 지독하게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치밀한 변칙성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예상할 수 없었다. 배개는 하나뿐이였다. 둘은 배개를 양보해두려고 몇 분간 다투다가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여자가 남자에게 건네다주기로 했다. 그날 초라한 꽃무늬 자수가 아로새겨진 배개를 머리에 지고 남자는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그 시절에 둘은 독방을 썼다. 남자는 거기다가 군대에 끌려다니느라 집에 자주 드나들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배반과 편승과 무책임과 방관으로 점칠된 20세기 초반의 밤들을 김천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살아온 것이였다.
김천은 침대 위에서 가늘게 숨을 쉬고 있었다. 가는 팔다리를 각각 내복이 덮었다. 사실 흰색 런닝과 트레이닝 바지 따위는 내복이라기보다 편하게 입기 위한 조합에 더 가까웠다. 안소란은 그 모습이 어린애 같기도 하고 백수의 스테레오 타입 같기도 해서 피식 웃었지만 하얀 쇄골께의 피부가 드러나면서 더욱 묘한 모습이 되었다. 안소란은 묘하게도 빨간 내복을 구해다 입었다. 김천은 이 옷의 단조로움을 넘어서 독개구리의 경고색 같은 원색을 정말 좋아하지 않았지만 안소란이 입은 모습은 그런대로 옷 특유의 기괴한 감성을 중화시키는 듯 했다. 진갈색 곱슬 머리가 침대를 덮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여전히 날씨는 날씨다. 인간이 빌어 봐야 맑게 개인 날들을 줄 리가 없다.
"안소란."
"응?"
"변칙예술계에서 그런대로 잘 되면, 내가 준 칼 꼭 써 봐."
"그럴게. 무슨 칼이길래 그렇게 자신감이 넘쳐."
"신의 힘이 있으니까…… 뚫을 수 있을 거야. 경계는."
"뭐?"
순간 안소란의 표정이 변했다. 날선 감각이 눈빛으로부터 느껴졌다. 김천은 미간은 스스로 짚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그는 되뇌였다. 그림자가 얼굴 위에 훅 드리운다 했더니 안소란이 일어서서 그를 내려다보는 것이 보인다. 카페에서 보았던 그 노여움과 격정이 이제 여기서 수천 배가 되어 돌아온다. 김천도 천천히 일어섰다. 이런 밤에 결국 일이 나는구나. 조금만 자부심을 죽일 걸. 남자 하나 쓰러뜨리고 칼을 도둑질해온 게 무슨 그런 잘난 일이라고. 남자는 속으로 한탄했다. 안소란이 용서할까의 문제다. 김천이 물론 안소란을 위해 가져온 칼이기는 했지만 이것은 김천이 더 많은 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그 쓰러진 남자는 살아는 있겠지만 적백합교회 사람들이 특유의 복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어디서 구했어, 그 칼. 빨리 말해."
"그게—"
"어서."
"알았어. 적백합교회 성유물을 훔쳤어."
"적백합교회가 뭔데?"
"주홍왕 숭배자들인데, 그냥—"
여자의 몸에서 순간적인 살기가 느껴졌다. 안소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죽어없어져야 할 존재 특유의 불온한 냉정이 공기 중으로 풀려나고 있었다. 김천은 그 유령들을 만났던 때를 기억했다. 그들의 분노처럼 여자도 동일한 종류의 원한을, 분노를, 그러한 모든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변명해두어야 한다.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신경쓰지 마. 위험한 인간들 아냐."
"성물을 뺏기고 나서도 도둑을 안 죽이고 싶어할 교단은 없어."
"그래도… 네가 원하잖아. 안소란."
김천은 고개를 숙였다. 까만 머리칼이 스탠드 빛을 반사하여 빛났다. 안소란은 마른세수를 하고는 김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자는 알았다. 만일 안소란이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면 안소란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왜 그래야 했는지, 고향에 돌아가야 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칼이 나동그라진 채로 진동하고 있었다. 그때 안소란의 손끝이 말라가고 있었다. 김천의 온 신경이 순간 아찔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고향만을 사랑해야 함을 알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몸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미안해."
"……"
"내가 잘못 생각했어. 우린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
"그 점이 미안한 거야?"
"넌 고향에 돌아가야 해. 그것만을 사랑해야 살아갈 수 있단 말이야."
"너……"
"그러니까 너는 나를—"
쩍, 하고 강한 충격이 순간 남자의 뺨을 덮친다. 여자의 손이 강렬한 선을 그렸다. 여자의 눈이 떨리고 있다. 남자가 다시금 돌아간 얼굴을 원래대로 회전시킨다. 입가에 피가 흐른다. 여자는 정말로 동요했고, 잠시 말라버렸던 손가락이 다시금 움직일 수 있는 상태로 되돌아간다. 백 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남자는 입가의 피를 조심스레 닦으며 조용히 웃는다. 쓰러진 남자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바를 때의 그 감각이였다.
"왜 웃어? 너, 오늘 대체 왜 그래. 왜 계속 혼란스럽게….. 만드냐고."
"내가 잘못 판단한 일이야. 어쩌면 너도… 고향만큼이나 날 사랑할 수 있을 줄 알았어."
"나, 널 좋아하고 있었어. 고향만큼이나, 그런데 왜 그런 소리를 해서 사람 기분 이상하게 만들어?"
"사랑할 수 없어, 너는… 고향 이외의 집념으로 마음이 환기되면, 넌 죽어."
남자의 왼쪽 눈에서 눈물이 길을 그렸다. 땅의 인력이 서러운 감정의 길을 아래로 당기고 있었다. 그는 천 번 되뇌였다. 자유를 사랑하듯 너를 사랑할지도 모르겠어, 안소란. 조국을 배반하고 고향을 떠났을때 좇았던 모든 가치만큼 너를 사랑해. 지금 알겠어. 너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의 사람이고, 네 모든 것을 존경해야 할 순간이 오고 있어, 안소란. 사랑은 생명의 특권이였다. 남자는 안소란을 천 번 사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망자는 불가능하다.
유령은 해묵은 감정을 놓아버리면 죽는다. 소멸하고야 만다. 안소란의 육체는 지독하게 오래된 애향심의 범벅이였다. 그 감정을 놓아버리는 순간 육체를 부지할 힘은 소멸한다. 신체말단부터 미라화하거나 부패해 죽을지도 모른다. 방금 깨달아버린 우스운 현실이였다. 남자는 그렇게 눈물을 한쪽 눈으로 흘렸다. 안소란이 김천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그러라고 여자에게 주어진 기회가 아니다. 안소란은 이 규칙을 이해할 만큼 똑똑한 인간이였다. 그래서 침묵했다.
"부탁 두 가지만 할게……"
김천이 외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냉랭한 공기 속에서 침엽수처럼 잠들었다.
"다시는 우리 만나지 말자."
"뭐?"
"사랑이란 그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좀 재수없는 소리긴 한데, 네가 나랑 이제 붙어 있으면 넌….."
안소란은 침묵했다. 빨간 내복을 입고 작별하는 여자가 여기에 있다. 죽지도 못한 채 여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김천은 생각한다. 이 모습을 영구적으로 보고 싶다고. 안소란은 단 몇 초 만에 좌절의 하강과 극복의 상승을 끝마쳐 두었다. 없는 것은 납득이다. 수십 번을 헤메며 고향으로 가는 여정을 도왔던 남자를 어떻게 그렇게 쉽게 무시해둘 수 있을까. 납득이 되지 않은 사항은 정말 미래에 사람을 지독하게 괴롭힐 것이다.
"날 미워해. 네 마음을 배반한 새끼라고 생각해. 조선을 배신했듯이."
"마음으론 못 해. 머리로는 그래도….."
"그럼 잊어. 넌 앞으로 몇백 년을 더 살 거야. 그러니 나 정도는 잊을 수 있어."
"김천,"
"왜?"
"나도 마지막 부탁 하나만 더 들어 줘. 어쩌피 내일이면 여길 떠날 테니까."
"그래. 뭐든…."
그 밤, 그들은 함께 잤다. 거리낄 것 있는 밤은 지독하게 추워서 눈이 내리고만 있다. 배개가 바닥에서 마침내 식어버리기까지 둘은 같이 밤을 지샜다. 남자와 여자 모두 서로에게 더 특별해서 방금 전의 이별 약속을 재고해볼 정도의 안건은 찾아내지 못했다. 김천은 수없는 시간을 헤메이면서 안소란을 껴안았다. 안소란이 한 번 변화하고 나니 빨간 내복을 입은 여자와 안소란의 이미지는 또 한 번 변화하여 결부시키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살아 있던 시절 고향에서 저보리를 입고 봄을 기다렸을 안소란만큼이나 세을가의 어린아이로서 나비나 별을 쫓던 김천도 정말 변해 있었다.
안소란은 감각을 느낄 수 없다. 죽은 몸의 한계점이였다. 피도 눈물도 땀도 찾아낼 수 없었다. 반면 김천은 몇 번이나 속으로 울었다. 안소란이 살아 있었더라면 김천처럼 행동했을 것이라고 여자는 생각하고 있었다. 별이 떨어지고 있었다. 여자가 다녀간 곳에는 어떠한 생명의 온도도 내음도 나지는 않았지만. 김천은 거미처럼 진동과 움직임에 새삼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안소란은 공감각적 심상에 몇 차례나 감동하면서 자신의 부탁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일은 적당한 시간에 끝내기로 무언의 협약이 되어 있었다. 안소란은 입고 왔던 바바리 코트와 셔츠와 검은 바지를 다시 입으면서 지독한 후회의 순간과 이별의 통증에 지쳐 그대로 쓰러진 김천의 몸을 몇 차례 힐끗거렸다. 커튼을 열고 창밖을 내다본 안소란은 설원을 보았다. 눈이 정말로 온 세계를 덮은 것 같았다. 밤하늘의 동쪽이 희어졌다. 이제는 늦지 않게 기차를 타야 할 시간이 오고 있다.
"김천."
여자는 불렀다. 남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얕은 수다. 안소란은 고요한 방 안의 공기를 떨치고 일어나며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손가락이 말라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김천의 시한부 선고와 주장이 정말 진실이였구나 싶은 것이다. 몸을 움직이자 코트 주머니에 길고 둔중한 것이 느껴진다. 흑요석으로 깎은 양 고상하게 생긴 칼 한 자루다. 김천은 지금 울고 있다.
"…..애쓰지 마. 헤어진 후엔 실컷 너 미워해 줄게."
"……"
"미워하려고 노력해 볼게."
문이 열리자 추위가 새어들어왔다. 여자가 눈을 비비고는 지독한 겨울의 한 장면으로 사라진다. 머리카락이 나풀거린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은 어쨌든 간에 떠나기 좋은 날은 아니다. 남자는 자신이 여자와 달리 누릴 수 있는 것이 제법 많다는 점을 사랑했다. 비 오는 날의 소리와 눈의 새하얀 반사광, 한 무리의 새들의 소리 같은 굉장히 탈속적이고 자연적인 것들을 사랑한다는 점은 남자의 가장 큰 자부심 중 하나였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자연스러운 것들의 존재는 별 것 아니였다.
모든 것을 배신하고 나서 배신의 동료와 작별했을 때 남자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였다. 문이 열리자 추위가 새어들어왔다. 남자의 벗은 몸에 한랭 지옥이 새겨졌다. 한바탕 침대 시트에 눈물을 쏟아낸 곳이 순식간에 얼어버릴 듯이 차가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천은 오랫동안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떠난 안소란은 정말 김천을 미워하기 위해 모든 짓이든 다 할 것이다. 정말로. 언어는 사고를 지배하고 생각은 진실을 지배하니까 그렇게만 암시해두어도 충분할 것이다.
김천의 세포는 그 밤을 기억했지만 그 밤은 김천을 기억하지 않았다. 역사는 미시적이지 않았다. 세계는 빠르게 흘러갔다. 그래서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하는 선택지도 있었다. 그러나 김천은 알고 있었다. 유사 이래 어떤 역사도 완결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슬픔에서 깨어나자마자 안동으로 가는 차를 탔다. 그리고 처녀당이라고 이름 붙인, 정말로 안소란을 기념해두기 위한 고향의 최후의 기억에 들렀다.
그리고는 안소란과 살아갔던 모든 것을 내버려두었다.
#####
안소란, SCP-1605-KO는 2023년 재단에서 죽었다. 원한을 버렸기 때문이다. 김천의 역사는 아직도 재단이 알아낼 수 없었던 것으로 남았다. 그렇더라도 그들은 마지막 흔적까지 처녀당에서 건져 제145K기지로 향했다. 그들이 떠나는 차를 남자 하나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보고 있었다. 안소란, 재단이 당신의 것들을 모두 가져갔다는 것은 당신이 격리되었다는 뜻이겠지. 죽지는 않았겠지만, 하고 김천은 묻는다.
김천은 담배를 꺼내 문다. 어디서 바람이 휭하니 불어와 불을 바싹 말려버린다. 2020년 적백합교회는 죽었다고 들었다. 그들은 김천을 찾아오지 않았다. 안소란이 칼으로 경계를 베어 보았을까. 당연히 그랬을 것이라고 김천은 생각한다. 아마도 안소란은 다시 그 칼을 돌려주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천은 만족하지 못할 답이다. 재단 손에서 안소란을 꺼내오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추측이자 상상도가 아닐 수 없는 것을.
김천은 걸었다. 눈가루가 공중에서 날렸다. 두 눈동자가 고요히 울었다. 낡은 구두에 마른 흙이 밟힌다 했더니 알고 보니 눈의 일각이였다.
김천의 키가 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어떠한 행동을 취할 필요도 없었어.
안진서 박사는 이러한 질책을 여러 번 들었다. 원래 그 질책의 문장이란 당연히 몹시 거칠고, 대화 특유의 감정 섞인 흐름과 관료제에서 기인한 압도적인 벽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문학과 역사적인 비유를 사랑하는 안진서 박사는 다만 이러한 문장들은 제멋대로 마음 속에서 요약해버리고 문어체로 만들어버리고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어떠한 행동도 할 필요 없었다고. 그렇게 요약과 날조를 해 봤자 결국에는 모진 질책은 맞았다. 그러나 이 질책은 안진서 박사가 재단에서 평생 근무해두며 점차적으로 고위직이 될 때까지 들어 온 다른 호통에 비하면 애들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점이 진서는 더욱 어이가 없는 점이라고 홀로 생각해두었다.
몇몇 저명한 다른 역사학처럼 초상 역사학은 제멋대로 흩어지고 분서되는 기록들의 총량을 멀기설기 묶어서 이해해두는 것이다. 그래서 진술이나 기록을 들여다보다 보면 끔찍하게도 전혀 기대하지 않은 것들이 나타나고는 한다. 이러한 것들의 존재가 어느 정도 과거에 있을 법 하다고 여겨지는 순간 그 과거는 현재의 패러다임을 이리떼처럼 찢어발기려고 드는 일이 종종 있다. 안진서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의자에 기대었다.
불운하다. 불운한 일이다. SCP-1605-KO는 죽었다. 물론 그 죽음이 다른 어떠한 인간형 개체들과 조금 다른 방식의 죽음이긴 했다.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은 늙어가다가 모든 에너지가 쇠하면서 순식간에 생물의 지위를 앗아가는 방식으로 일어나는데, SCP-1605-KO는 진작에 그 과정이야 끝마치고 동력원 하나만 붙들고 살아가다가 그 동력원이 무너져 내리자 죽어버렸다.
그 인생을 어떻게 갈무리할 수 있을지, 안진서는 이해할 수 없는 긴 삶을.
기지 지하층의 시신보괸소로 진입할 적에 안진서는 떨지 않는다. 제145K기지라는 공간은 온기가 있다 없다의 이분법을 적용해두고 보면 온기가 있는 곳이였지만 이 거대한 냉동 창고는 그렇지 않았다. 제145K기지라는 인간형 격리기지에서 사람들은 격리 대상자를 격리했다. 더 나아가 삶을 격리했다. 이론상 스무 살에 격리된 변칙개체는 80세에 격리 하에서 죽게 될 것이다. 재단은 그 삶을 통째로 격리해둔다. 흐름을 격리한다. 그 최종장— 물론 유령의 존재까지도 상정해두면 아니겠지만, 상징적인 마지막의 무덤께에서 안진서는 서 있다.
이 구역만큼은 기지 내에서 적용될지도 모르는 온기 따위가 필요가 없으며, 심지어는 형이하학적으로 초저온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안진서 박사가 2차 격리동을 통과할 즈음 남자는 문 앞에 웅크리고 앉은 남자와 조우한다.
그 마르고 억센 인상의 남자는, 다시 눈을 비비고 보니 사라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