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뉴질랜드의 어느 시골 마을, 중절모에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은은한 달빛이 모자 위에 비치며 신비한 느낌을 자아냈다.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벤치 옆의 쓰러진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귀여운 녀석. 이 녀석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몰랐다. 뻔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처럼 지금 세상이 망하려 하고 있다는 것도, 그렇게 되면 먹다 남은 생선도, 자기 자신도 모두 사라진다는 것을. 남자는 왼손에 들려있는 지팡이로 쓰레기통을 세게 두드렸다. 후다닥 달아나는 털 뭉치를 향한 원인모를 안쓰러움과 동정심을 느끼면서, 지팡이에 묻은 먼지 덩이를 털어냈다.
오늘은 왠지 컨디션이 최고였다. 낮에 혼자 노래방에 가서 30년 만에 노래를 불러보려던 참에, 10대 양아치 무리에게 온갖 멸시가 담긴 욕설과 주먹질을 당하고 쫓겨났었다. 인간의 순수한 욕망에 이끌려 사는 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그냥 적대하고 무시하는 놈들. 담뱃개비를 입에 물고 얼굴을 화학 물질-화장품이라고 부르던가-로 뒤덮어 자기들 육체를 깎아 먹는게 멋있고 좋아 보이는줄 아는 녀석들.
남자는 속으로 킥킥댔다. 그 녀석들은 얼마 뒤에 다 같이 복권에라도 당첨될 것이다. 아니면 땅값이 엄청 오르거나. 그들에게는 과분한 상이지만, 뭐 어떤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인간의 추악한 면을 보여준 녀석들인데. 하마터면 인간의 그런 점을 잊을 뻔했단 말이야. 그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지. 놈들이 성인이 되는 걸 절대 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아무도 아닌 자의 오른손에 시커먼 서류 가방이 나타났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그는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모든 존재에게는 끝이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 법칙은 아무도 아닌 자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커먼 서류 가방을 뒤적거리면서,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봐왔던 세상의 멸망들을 떠올렸다. 하늘 끝에서 쏟아져 나오는 날개 달린 천사-그보다는 괴물에 가까운- 존재들에게 학살당하는 사람들. 지나친 오만과 막무가내식 자신감, 그리고 약간의 관리 소홀이 초래한 끔찍한 방사능 범벅이 된 푸른 행성. 매우 심심했던 어느 한 소행성의 충돌로 녹아내리는 지표면. 그냥 자연스럽고도 조용하게, 인구수가 점점 줄어 사라진 인류. 그가 여태까지 본, 수만 가지 방식으로 느껴왔던, 세계멸망의 장면들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아무도 아닌 자였기에 느낄 수 있었던 특권이자, 고문이었다. 차원의 틈새에 낀 채로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로, 그저 바라보며 여행하면서 겪어왔던 일.
그러나 이번 멸망은 달랐다. 그가 지금까지 봐왔던 하나하나의 우주의 종말과는 달리, 이건 모든 우주의 끝이었다. 수천 조 개의 평행한 우주들의 동시다발적인 최후.
서류 가방을 뒤적이던 그의 손이 마침내 몇 장의 A4 용지 묶음을 꺼내올렸다. 손끝에 갓 찍어낸듯한 잉크의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SCP 재단의 기밀문서. 내용은 모두 그가 대충 상상하던 주제들이었다. 에너지 모순으로 인한 세계종말… SCP-1968를 팍팍 쓴 나머지 리셋되었던 '이전 세계'에서 '흘렀던' 에너지까지 모두 흘러나가서 중첩되어 이런 상황이 되었다라…
아무도 아닌 자는 회상을 이어갔다. 수없이 많은 종말. 그 모든 종말에는 항상 재단이, 아니 인간들이 있었다. 끝없이 절망적인 순간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후의 최후까지 버텨나가던 인간들. 그들은 항상 마지막 순간에는 구심점을 만들어 하나로 뭉쳤다- 대체로 그 중심은 재단이었지만, 가끔은 연합이, 심지어는 반란이 구심점이 되어 싸워나갔다.
아무도 아닌 자는 그러한 인간들을 동경했으며, 동시에 동정했다. 결국 허망한 최후를 맞을 것을 느끼면서도, 발버둥 치는 인간들. 그들은 오로지 실낱같은 '믿음'에 모든 것을 걸고 싸운다.
그리고 지금 그 '믿음'이 그들을 파괴하려 하고 있었다.
이건 너무 허망한 이야기이ㄷ-
고소한 감자튀김 냄새가 남자의 코를 찔렀다. 햄버거 냄새도. 아무도 아닌 자는 옆을 돌아봤다.
금발의 젊은 청년이, 양손에 버거킹 와퍼세트를 들고 있었다.
"들이켜." 손이 부족해지자 팔꿈치 사이에 감자튀김 봉지를 꼬인 자세로 낀 청년이 콜라를 든 왼손을 중절모 아래로 건넸다. 남자는 컵을 들어주지 않고, 그대로 빨대를 통해 탄산음료를 쭉 빨아먹었다.
퍼석. 결국 감자튀김을 놓치자, 청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구시렁 거렸다.
"굳이 놓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중절모 쓴 남자의 지적에, 청년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차피 다 식어서 버리려고 했어." 그의 말과는 다르게 그의 얼굴에는 아쉬움의 기색이 남아있었다.
둘 사이에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청년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아라 박사던가? 하는 녀석이 똑똑하더라."
"재단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위인전에 실렸을지도 모르는 아이였다." 아무도 아닌 자의 어조에는, 착잡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혹시 이번에도 꿈에서 알려준 거 아-"
"이제는 그런 짓도 허망하더군." 청년의 말을 자르며 남자가 내뱉었다. "무엇보다 나는 너처럼 일련번호를 붙이고 다니는 게 기분 나빠서 말이지."
청년이 버거를 입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990번이 어때서? 솔직히 남의 꿈속에 칩입하는 변태치고는 꽤 괜찮은 번호 아니냐?" 아무도 아닌 자가 대답했다. "솔직히 990번까지는 기분 좋았는데, 망설임 없이 케테르 딱지 붙이는 걸 보니 마음 상하더군. 안전 등급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기껏해야 유클리드 등급이나 받을 줄 알았는데…"
아무도 아닌 자가 콜라를 다시 들이키며 말했다. "너도 우리가 이런 식으로 끝날 줄 알고 있었나?" 청년은 햄버거를 다시 한 입 베어 물었다. "솔직히 나는 내가 전능까지는 아니어도 전지할 줄 알았는데. 우리가 어떤 식으로 끝날지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네." 청년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다가,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러고 보니깐 우리 내기 말이야." 이 말이 나오자, 아무도 아닌 자도 몸을 쭉 피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가지런한 정장이 달빛을 받아 윤기를 냈다. "그래서 SCP-055의 정체가 뭘까?" 남자가 대꾸했다. "나는 원더테인먼트 박사가 대체 누굴지가 더 궁금해지는군." 둘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아마 영원히 알 수 없겠지?"
"상상은 할 수 있겠지."
"그래, 그게 더 재밌겠네."
두 사람은 벤치에서 일어났다. 맑은 보름달이 하늘에서 환하게 비쳐왔다. "끝이지만 우리가 할 일이 남아있겠지." 아무도 아닌 자가 말했다. 끝. 두 존재가 감히 생각지도 하지 못했던 개념이었다.
청년이 입을 열었다.
"없을 수도 있고 말이지."
둘은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서로 반대 방향의 길로 돌아선 그들의 눈에는, 공포와 아쉬움, 기대가 섞인 복잡한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아무도 아닌 자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이, 343. 노래방 좋아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