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갈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 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를 가리켰다
- 이용악,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중에서
무너진 벽돌 틈새로 안개가 파고들었다. 사람이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중에도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인 것마냥 발을 피해 이리저리 달아다녔다. 안개는 여간해선 흩어지지 않는다. 이리저리 흩어지는 벽돌 조각이 안개 속으로 떨어질 때에도 흰색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제 자리를 침범하는 붉은 입자들을 감싸안고 '네들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모종의 자비를 베풀고 있는 것이다. 자비, 살아있지 않은 것이… 살아있는 것에게 베푸는 행위. 지금 상황을 표현하려면 그 방법 밖에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살아있던 적이 없었던 것이 한때 살아있었던 것에게 베푸는 행위.
바쁘게 움직이던 인력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 웅성이는 소리가 났다. 그 중 하나가 내게 소리쳤다. 발견했단다.
결코 찾고 싶지 않은 시체였다. 차라리 이 안개가, 그 풍부한 자비를 베풀어 먹어 없애주기를 바랬다. 그럼 모두가 평화롭게, 죽은 이는 죽은 이대로 죽어 있고 나는 나대로 서울로 올라가서 그는 실종되었다고, 끝끝내 그의 시체를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하면 다 좋았을 텐데.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등을 꼿꼿이 핀다. 몇 번이나 지적당하면서도 결국 버릇이 안 들었던 동작인데 이제서야 하게 되었다. 공허하게 목청을 쓸어내린다. 시체를 마주해야했다. 없어지기를 바랬으면서도 마주해야한다는, 모종의 책임감이 나를 종용했다. 마주해야만 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바닥에 고요히 깔린 안개에 신발이 먹혀들었다. 시체가 아니라 내가 먹히는 게 아닐까. 내가 먹힌다면… 시체를 끝끝내 확인하지 못하고 내가 먹혀버린다면…
상념에서 벗어나야 했다. 일말의 희망과 내 조악한 책임감이 나를 부추겼다. 어찌 되었건 시체가 저기 나타났으니까. 그런고로, 나는 그것 — '그'가 아닌 '그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지칭했다는 자각이 구역질을 일게 했다 — 을 마주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내 상관의 시체를 마주하기 위해 아무런, 정말 아무런 준비도 하고 있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그를 죽인 자까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의 시체는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고, 그 숨김에서는 어떠한 인위적인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버려진 아파트촌의 벽에 박혀있었다. 몸뚱아리가 크게 돌출되어 있던 것도 아니어서 지금까지 시체 찾기가 고역일 수밖에 없었다. 하기사 그의 죽음을 목격했다고 나서는 이가 아무도 없는데 정확한 경로를 어떻게 찾을 수 있었을까.
인부들 사이를 헤치고 나아가 이제야 벽돌에서 해방된, 낡고 빛바랜 내 상관의 몸을 바라보았다. 늘 쓰고 다니던 뿔테 안경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고, '박범운'이라고 쓰여진 요원증이 그의 목에 너덜너덜하게 걸려 있었다. 박의 살덩어리는 이미 부패를 시작한 듯 흉측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연수 시절 맡았던 내음과 흡사했다. 연수원에서 끊임없이 경고하던 변칙적인 죽음. 늙은 강사는 연수생들이 그리 심각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발표 자료를 이리 저리 던져두고는 어디론가로 전화를 걸어, 곧 흰 천으로 덮인 무언가를 우리 앞에 대령했었다.
— 어쩌면 이게 너희들의 말로일 수도 있다.
그가, 당혹감과 불쾌감의 얼룩으로 뒤덮이는 우리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 어쩌면 너희들이 이런 걸 만들 수도 있고. 자, 이걸 열어볼 만큼 강인한 연수생이 있나?
아무도 그걸 연다고 '강인'하다고 생각하진 않았겠지만 어찌 되었건 내가 그 천을 걷었고, 곧 주위에서 신음 소리와 숨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했다. 천은 죽음 그 이상의 것을 덮고 있었고, 천이 거둬지면서 죽음은 다시 살아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형편 없이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갈라진 피부와 인간의 형태에서 벗어난 뼈구조가 망막에 오래 남을 것 같았다. 공포와 고통이 서로에게 맹렬히 덤벼든 것만 같은 표정도 역시, 오래 남을 것이었다.
죽은 상관의 얼굴이 마치 자연스러운 알고리즘처럼 그 표정에 겹치는 것은 그의 얼굴 역시 고통스러워 보여서였을까. 끔찍하게 비틀린 입술과 마치 파도가 피부에서 일어난 것만 같은 기묘한 파동이 알알이 박힌 살가죽이, 결코 편안히 가진 않았으리란 예감을 주었다. 입안이 텁텁했다. 텅 비어버린 박의 눈구멍이 왜 그렇게 어두워 보이는지, 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무진 기지 안에서도 바다는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이젠, 퍽 일상이라는 듯이 안개 내음과 바다 내음이 공존하는 기지 안을 인원들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시간을 보냈다. 서울 사람인 나에게는 퍽 힘든 적응이었다. 시신을 영안실로 보냈다. 무진 기지 영안실의 구조를 나는 알지 못했다.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따라가서 시체를 맞이할 수순이 아니었다.
급조된 회의에 사람들이 모였다. 박을 직간접적으로 알거나 그를 모르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 파헤치겠다는 인간들의 말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들은 파도처럼 싸웠지만 결국 남는 것은 안개였다. 어쩌면 논제 자체가 안개에 가까워서였을지도 모른다. 결국 논의의 대상은 끝내 안개가 되어버린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말하지 않았다. 광양에서 온 대머리가 거만하게 앤더슨 로보틱스는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쓰잘데기 없는 발표를 했을 때에도 나는 듣고만 있었다. 얼굴만 아는, 서울에서 내려온 요주의 단체 전문가가 사르킥에 관련된 시체와 상관의 육신을 비교했을 때도 그저 듣고만 있었다. 나의 말은 무용(無用)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 역시 이 말들의 해일 속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무진 기지에 소속된 부검의가 박의 사망 시각을 이야기했을 때는 뭐라고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발견되기 전까지, 그러니까 대략 2시간 정도 전까지는 살아있었다고, 부검의가 말했다. 당혹스러웠다.
— 그럼 변칙적 존재의 공격으로 사망한 게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부검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인은 질식이라고, 횡경막이 너무 오랜 시간 압박되어 결국 사망했다고, 부검의는 퍽 자신에 찬 투로 말했다. 왜 그렇게 당당한지, 꼭 자기가 박의 죽음에 어떠한 지대한 공헌이라도 한 듯이 구는 이유를 나는 알지 못했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추락하는 생각의 속도를 나는 따라잡을 수 없었다.
회의는 그의 사인을 초래한 범인을 잡아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에 대한 조사가 이어졌다. 내가 본 적도 있고 보지 않은 적도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조사실로 들어와 내 어깨를 두들겼다. 우리는 네 편이니, 부담 갖지 말라고, 그들의 둔탁한 배려가 그렇게 말했다. 별로 고맙지 않았다. 취조인은 서울에서 자주 마주쳤던 사람이었다. 상관과 프로젝트를 몇개 같이 했던 사람이라고 들었다.
윤도강 요원. 예. 요원은 고인이 된 박범운 요원과 함께 이번 무진 작전에 투입되었지요? 예. 정확히 어떤 업무였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대답 대신 먼 허공을 쳐다본다. 조사실 창틀로 안개가 스며들고 있다. 이런 곳까지 안개가 침범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놀랍다. 안개는 늘 그 속 안이 검은 것 같기도 하고 그저 흰 것 같기도 하다. 속내를 모르겠다는 수식어가 붙어야만 할 것 같은, 모종의 기시감을 느낀다. 대범하게 창틀로 기어들어오는 안개의 속을 바라본다. 며칠 전에, 저 안에서 불꽃이 튀고 있었다. 총 소리가 들려온다. 내 총이다. 내가, 안개 속으로 불꽃을 날려보내고 있다. 박의 총 소리도 들린다. 박범운의 전투. 마지막 전투. 그의 총, 그의 몸짓, 그의 파도.
무진 시내에서 일어난 수신도 계통의 폭력 조직, 통칭 "세라믹파"와 사르킥교 계통의 폭력 조직, 통칭 "살덩이파", 그리고 변칙예술가들 간의 대규모 분쟁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투입되었습니다. 박 요원의 팀, 제가 부관으로 있던 팀은 민간인의 보호와 대피가 주 임무였습니다.
그는 무진을 잘 아는 것 같았다. 어떤 골목으로 돌아 들어가야 큰 길이 나오는지, 어떤 건물 속에 놈들이 포진해 있을지 잘 맞추었고, 일처리는 더욱 빨라졌다. 전투가 소강 상태가 될 때마다 민간인들에게 사투리로 말을 붙였다. 박은 사투리에 능숙했다. 원래 고향이 전남 쪽이라고, 의아해하던 내게 그는 말했다. 고향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가볼 만한 곳이라며, 파도 소리가 경쾌하게 부딪히는 곳이라고만 덧붙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마 그것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가장 번거로운 임무를 맡으셨었군요. 네, 그래도 꽤 보람찬 일이었습니다. 타 팀의 동료들이 쌔빠지게 고생하는 걸 볼때는, 특히. 그럼, 박범운 요원과 요원이 팀에서 이탈하게 된 경위를 알려주십시오. 저와 그분은 서면 구내리 일대에서 민간인들을 대피시키던 중, 세라믹파 조직원 하나가…
세라믹파 조직원 하나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끌러, 우리 쪽으로 냅다 던진다. 빙글빙글 돌고 주황빛으로 빛나는 그 무언가가, 바닥에 닿자마자, 눈 앞이 새하얗게 흐려진다. 안개가 내 얼굴을 덮는 것 같은 기분이다. 꼭 크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나뒹구는 와중에 옆에서 같은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을 식별한다. 박이다. 그가, 저만치로 나뒹구는데, 나는 일어날 수가 없다.
하나가… 저희 팀 쪽으로 변칙 폭발물을 던졌습니다. 살덩이파 조직원들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우리 쪽으로 빗긴 건지, 아니면 저희 팀이 목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폭발에 휘말린 박 요원과 저는 정신을 차린 이후 팀원을 놓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은 팔목을 부여잡고, 나는 부여잡을 수도 없이 아파오는 온몸을 기어이 붙들고 걸음을 옮긴다. 팀원들이 없으므로 가야했다. 뛸 수도 없이 지쳐버린 몸은 버겁다. 그는 팔목이 삔 듯 흔들릴 때마다 인상을 찌푸린다. 우린 계속 걷는다. 바다 내음이 옅어질 정도로 숨이 차게.
이후 구내리에서 태을리로 향했습니다. 가는 도중에 둘이 같이 다녀봤자 효율적이진 않을 것 같아서 흩어지기로 했죠.
그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무전기는 여전히 치지직하는 소리만 낼 뿐, 기능이 돌아오지는 않고 있었다. 나는 그가 돌아서길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생각에 잠긴 듯한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기억에 오래 박힐 것 같은 얼굴이었다. 잔뜩 찌푸린 손의 얼굴, 파도가 일어나듯이 일렁이던 그의 주름, 그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고 나도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때 그 걱정을 말로 표현하고 그냥, 같이 가자고 했으면 조금 달랐을까?
그는 한참 뒤에 고개를 들어 내게 손짓하고 걸음을 옮겼다. 한참, 한참을 그렇게 걸어갔다. 하염없이 걸어갔다.
그렇게 그분이 최후에 홀로 남게 되신 겁니다.
정은 영안실에 누운 박의 시체를 보고 눈물을 쏟았다. 그와 오래 알고 지냈다고 했다. 수습 기간을 손에게 배웠고, 오랜 기간 그를 스승이자 상관으로 모셔왔다고,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연인의 알지 못했던 사실을 누군가가 죽고 나서야 알게 됐다. 신기했다.
박범운의 사망 소식은 그가 죽고 꼭 하루 뒤에 알려졌다. 서울과 광양, 삼척 등지에서 조문하는 메일을 보내왔다. 수신자들은 거리를 핑계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정은 직접 찾아왔다. 메신저가 아니라 실물을 보는 것은 몇 달만이었다. 체감상은 몇 년이었다. 정과 나는 늘 엇갈렸다. 내가 지방으로 가면 그녀가 서울에 발령이 났고 내가 서울에 자리를 얻으면 정이 지방으로 갔다. 우리는 우스갯소리로, 같이 타국으로 전출을 가도 꼭 다른 기지에 배속될 것이라고 했다. 마치 누군가가 우리를 꼭 떨어뜨리려고 하는 것처럼.
정은 검은 양복을 입고 조의를 표했다. 휴가라도 내고 온 것처럼 보였지만 그럴리가 없었다. 자신은 서울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프로젝트 선임위원이라고, 영안실에서 나온 후 그녀는 말했다. 그들의 근심이 여기까지 달그락대는 것 같았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정을 다시 본 것으로도 나는 만족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공통적으로, 추억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존재를 잃지 않았는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것들을 보아 넘길 수 있었다.
— 박쌤, 돌아가시는 걸 봤어?
— …아니.
박쌤이라니. 기억이 불현듯이 떠올랐다. 박은 늘, 자신을 박쌤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언젠가 왜 그러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왠 박쌤이냐고, 무슨 인터넷 강사도 아니고. 그랬더니 그는,
— 나 정말로 강사하고 싶었거든. 지금은 너네 가르치니까, 쌤이라고 불려도 되지 않냐.
하고 벙긋 웃었다. 그 모자라 보이는 웃음이 이렇게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
—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알고?
— 내가 처음으로 발견했어. 어느 폐아파트촌 벽에, 손톱만 튀어나온 채로 시신이 박혀 있더라.
— 허물어서 빼냈구나.
— 응. …질식해서 돌아가셨대.
— 재단 사람치곤 평범하게 가셨네… 쌤, 곧 휴가라고 되게 좋아하셨었는데.
— 그건 어떻게 알았어?
— 직원 전체 메세지로 곧 휴가인데 기념품 가지고 싶은 사람은 먼저 이야기 해놓으라고… 보내셨었는데, 못 봤어? …하긴, 넌 그런 거 잘 확인 안하지.
— 맞아. 나 네 문자만 확인하잖아.
— 그래… 그게 좋긴 하다만. 여기 언제까지 있을거야?
— 모르겠어. 새 팀에 배속될 때까지는 여기 있을 것 같아. 조사당하면서. 내 심적 안정이 주 목적이라고는 하는데, 잘 모르겠어. 내 심리가 알고픈 건지, 내 알리바이가 알고픈 건지…
— 글쎄, 넌 좀 심리 상담이 필요할 것 같긴 해.
— 많이 안 좋아보여?
— 응, 너… 표정이 되게 안 좋거든. 예전엔 맨날 웃고 그랬는데.
— 너때문이었지. 너만 보면 괜시리 기분이 좋아져서, 어떤 일이든 다 날릴 수 있었는데… 물론 지금도 좋아. 근데… 그분 일은 쉽게 날리지를 못하겠어. 그렇게 돌아가셨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 나도. 나도… 참 아직까지도 실감이 안 난다. 정말 아버지 같은 분이었는데. 괜히 옷매무새나 자세만 지적하는 꼬장꼬장한 양반이었어도…
— 너도 표정 안 좋아보여.
— 우리 둘 다 우울하네.
— 맞아… 그냥 마음이 잘게 갈린 것 같아.
내가 그녀에게 기댔는지, 아니면 그녀가 내게 기댔는지 알 수 없이,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었다. 모든 게 허무해진 것 같았다. 근원을 알 수 없는 파도가 해일로 우리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둠이 모든 것을 깔아뭉갰다. 밤은 생각보다 빠른 존재였다. 빨랐으므로, 오래지 않아 세상은 감지되지 않았고 오직 현재만이 존재했다.
나는 파도처럼 정에게로 갔다. 그 일련의 작용 속에서 바다 내음은 잔잔히 깔려있었고 방해하지 않았다. 움직임은 파도를 더욱 닮아갔다. 호접몽이 떠올랐다. 나비가 장주인지, 장주가 나비인지 모를 그 인지적 세계에서, 나의 몸이 파도인지 파도가 나의 몸인지 모를 나의 현재가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안개 속에 들어온 것처럼 머리가 맑았다.
움직임 속에서 정은 물었다. 뭘 숨기고 있느냐고.
— 내가 뭘 숨겨?
— 너, 뭐 숨기고 있는거 맞잖아.
— 내가?
— 너, 숨기는 눈빛이야.
그런 눈빛이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말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했다. 파도는 계속 출렁이고 있었다. 그제서야 내 몸 안쪽 언저리에 잔존해 있던 무언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수일 동안 내 몸 안에서 끊임없이 자라나고 있었음에도, 그 성장 속도가 느려 감지해내지 못했던 것, 나의 세포로 이루어진 내 감정.
안개처럼 맑던 머리가 순식간에 구름이 낀 듯 흐릿해졌다. 꿋꿋이 숨기려던 어떤 기억들이 일정한 기준을 잃고 무너지려고 했다. 정은 그런 나를 가만 응시하기만 했다. 나는 정의 눈을 마주하기 두려웠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 눈길에 휩싸여, 나도 모르게 이곳, 이 자리, 이 상황에서 다 말해버릴까 봐. 이곳은 마땅한 자리가 아니었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 숨기는 거 없어.
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끌어 안았을 뿐이었다. 오래, 아주 오래.
불 꺼진 천장을 보는 것은 꼭 모든 사건이 다 끝나버린 무성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뭔가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도 내 정신 한가운데가 가려웠다. 밖에 나가서 바다에라도 뛰어들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정은 잠들어 있었다.
정의 머리카락이 내 손에서 흩어졌다. 내 팔을 베고, 내게 등을 돌린 그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어쩐지 애잔한 내음이 났다. 정은 정말로 지쳐있었다. 불현듯이 이 내음이 그리워질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동시에 공포가 밀려왔다. 왠지, 정말로 그리울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잠든 정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워할 거라고, 내 후각 신경이, 내 시신경이, 내 머릿속에서 썩어가는 뇌세포의 파편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움은 내게 낯설지 않았다. 이런 예감이 든 것도 하루 이틀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나기 시작했을 때, 서로의 목적지가 갈리기 시작했을 때, 마지막인 것처럼 사랑하고 홀로 누워 정의 샤워기 소리를 듣고 있었을 때, 먼 지방에서 걸려온 정의 전화를 받았을 때에도 이 기분, 이 향수는 집에 돌아오려는 실향민처럼 간절하고 애틋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오늘, 이 순간에의 이 느낌은 어딘가 더 절박하고 무서웠다. 그녀가 떠나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잠든 정의 어깨에 입술을 대었다.
사람의 살은 어딘가 서글픈 내음이 난다.
곧바로 작전에 다시 투입되었다. 박을 죽음으로 몰고 간 범인을 잡겠다는 목표 하에 설계된 작전이었다. 프로젝트 선임위원들이 참석한 두번째, 세번째 회의에서 사람들은 살덩이파 조직원으로 범인을 지목했고,더 이상의 진척이 없자 살덩이파에 일정 타격을 주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 말인 즉슨 변칙예술가들이 시작하여 개판으로 번진 싸움을 우리 손으로 마무리 지어야 한단 이야기였다. 이 일이 무슨 일을 초래할 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살덩이파는 비교적 신생 조직이었지만 러시아의 검은 산장을 뒤에 업고 있었고, 터줏대감이었던 세라믹파에 한 방 먹일 수도 있을 정도로 많이 성장한 상태였다. 이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덤비는 이들에게 천장이 있음을 알려줘야 했다.
상부는 이 작전에 대해 긍정적인 답을 해주지 않았다고, 선임위원들과 회의를 하고 온 정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무진 기지에서 바다가 보이는 쪽의 벤치에 앉았다. 상부의 분위기는 그 특유의 정치적 기류에 알맞게 파편적이고 몽롱했다. 그들의 말은 계통 없이 흩어졌고 결론이 난 것은 없었다. 서울에서 무진으로 날아온 이메일에는 '지나친 적대 행위에 대한 우려를 표하지만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하나마나한 말이 적혀 있었다.
— 외교부에서 끝까지 난리쳤을거야. 걔네가 대가리에 든 건 없어보여도 제 잇속 챙기는 데에는 빠삭하니까.
정은 계속 이야기했다. 외교부와 정보부, 기지 이사관실에서 다같이 우려 의사를 표명했다. 그들이 단합이 그렇게 잘 된 것은 이번이 아마 처음일 것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살덩이파의 몰살을 원치 않았다. 살덩이파는 의외로 좋은 핑계이자 명분이었다. 러시아와 인접한 지역 중에서 사르킥교에 대한 피해가 이 정도로 없을 수 있었던 것은 살덩이파의 존속 때문이었다. 적대적 위치에 서지 않겠다는 한국 지부의 간접적 의사표현임이 분명한 처사였다. 외교부에서는 이 조치로 아직까지도 축배를 들고 있을 것이라고, 정이 말했다. 부단히 외교부랑 싸우고 온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회의를 한다고 내가 옷을 입기 전부터 씻고 나가더니, 과연 피곤해보였다. 커피를 손에 들려주었다.
그녀는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한국사령부가 국가초상방재원에 여전히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도 이것이었다. 방재원이 속속들이 파악하지 못한 변칙 도시의 변칙 조폭들을 알아서 잘 처리해 주는 재단은 자연스레 권력의 상위를 차지했고 이에 방재원은 할 말이 없었다. 퍽 좋은 핑계라고, 나는 생각했다.
— 그러니까 걔네가 난리치는 거야. 자기네가 이루어놓은 뭔가를 무너트리는 것 같으니까 괜히 그러는 거지. 그런데 박쌤이 돌아가셔서 뭔가 조치는 취해야하니, 우리 계획을 어쩔 수 없이 승인한 것 같아.
— 그럼, 잘못되면 우리 탓으로 돌리는 건가?
— 그럴수도.
— 선임위원님, 그렇게 태연하게 말씀하실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녀가 듣기 좋게 웃었다. 하기는, 정의 웃음이 듣기 좋지 않을리가 없었다.
— 괜찮아, 우리를 문책하려면 애초에 그들 자신을 먼저 문책해야할테니까… 내가 기획서에 몇 가지 함정을 걸어뒀거든.
정은 다시 커피를 홀짝였다.
— 너는 좋겠다. 너보다 기수 높은 여친 둬서 이런 이야기도 듣고.
— 나한테는 이득이지.
벤치에서 일어나서 기지개를 폈다. 바다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문득 이름 모를 감정이 골수를 타고 흘러내렸다. 바다의 울음이 자꾸 내 안에서 말이 튀어나오도록 유도하는 것 같았다. 여전히 내 안에서 썩어가고 있는 말은 앞으로도 계속 완전히 부패해서 분해되지 않고 그냥 존재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곳은 절대 그 토사물을 꺼낼 수 없는 장소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말할 자리를 찾고 있었다. 자리는 잘 찾아지지 않았다.
정을 내려다보았다. 너무나 무심히도 내가 사랑하는 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감정이 심장에서, 예전보다 오백 배는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죄책감과 애정이 섞인, 시체같은 이 감정. 정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목을 간지럽혔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은 진정으로 평화로웠다.
작전은 곧바로 '작전명 다이어트'라는 이름을 가지고 실행에 옮겨졌고, 이름의 뉘앙스에 걸맞게 최소의 인원으로 최소로 움직이는 동선이 구축되었다. 나는 정의 의도인지 정이 이끄는 팀에 배속되었다. 아무렴 좋았다. 그녀는 나와 다른 팀원들과 더불어 세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우리는 선발대였고, 질질 끄는 개싸움보다는 치고 빠지는 스타일의 전투에 용이한 대원들이 모였으므로 단시간 내에 성과를 올리는 교전이 적합했다. 클럽이나 지하수도 따위의, 놈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 전투 장소로 지목되었다. 마지막으로 정은 말했다. 만일을 대비해 모두 변칙 예술가로 위장하기로 했다고. 그녀의 찌푸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끝내 외교부의 요구를 다 물리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놈들은 완전히 작정을 했다. 살덩이파를 공격한게 재단이 아니라는 여지를 남기면서도 여전히 무진에 대해 영향력을 갖고 있으려는 술책이었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었다.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과 여태까지 쌓았던 여러 요주의 단체 대응책의 폐기 등. 위험한 길이었다.
정은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교전은 바로 다음 날, 정의 총알이 웃고 떠드는 무리 사이에 때마침 주삿바늘을 팔뚝에 꽂아넣고 있던 한 머저리의 대가리를 뚫으면서 시작되었다.
온갖 괴성과 소음, 비명이 함께 들려왔다. 널부러진 놈의 동료인 듯싶은 남자가 내 쪽으로 침을 흘리면서 비대해진 눈을 크게 뜨고 달려왔다. 사르킥 쪽이나 예술가들 쪽의 합성 마약을 한 사발 거하게 한 것 같았다. 몸을 돌려 피했다. 신경까지 약에 취했는지 놈은 관성의 법칙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한 약이 뭐든 간에 전투 시에 하는 마약은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놈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어깨를 쐈다. 남자는 신음하며 총을 맞은 곳을 움켜쥐었다. 검붉은 피가 끈적이며 흘러나왔다. 머리는 부러 쏘지 않았다. 상부의 말마나따 '지나친 적대 행위'는 금물이었으니까. 놈은 이내 고꾸라졌다. 정이 울긋불긋한 문신을 한 조직원을 쓰러뜨리고 내게 환호를 보냈다. 한 손을 들어 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었는데.
신음하는 놈을 타넘고 또 한 조직원이 달려와 무식하게 큰 주먹을 휘둘렀다. 분명히 뼈에 무슨 짓을 한 놈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피부까지 뚫고 뼈가 그렇게 흉흉하게 자랄리가 없으니까. 날카로워보이는 상아색의 흉기가 내 얼굴에서 2cm 정도 떨어진 곳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서 몸을 뒤로 뺐다. 허세 가득한 문구가 담긴 후드티에 헐렁거리는 바지를 입은 상황에서, 의외로 날랜 놈을 상대하는 것은 꽤 버거운 일이었다.
어느새 거리를 좁힌 놈의 주먹이 빈 허공을 가르며 내려왔다. 한 대 얻어맞으면 병원 신세는 꽤 질 것 같았다. 허리춤에서 칼을 빼었다. 주먹이 정수리 바로 위에 위치할 때 꽂아야한다. 모든 순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때, 놈이 팔을 내리치고 있다. 점점 내려오고 있다. 때를 기다려야한다. 더럽게 큰 흉기이자 둔기가 너무 가까워지고 있다. 때다. 지금이다.
칼을 손목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뒤로 물러난 놈의 턱에 한 대 갈겼다. 손목이 부서질 듯 아프긴 했지만 놈이 엎어지는 것을 보니 가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저 멀리서 또 한 놈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 오기 시작했을 때는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지만. 놈들은 끝이 없었다. 꼭 무한 마리의 개미떼가 튀어나오는 개미굴을 막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정이 대원들에게 빠지자고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응당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선두에 선 요원들이 입구에 서 있던 조직원들을 쏘고 허리춤에서 작고 귀여운 곰인형 하나씩을 뒤로 던졌다. 바닥에 떨궈진 인형들은 부들부들 떨더니 분열하면서 가까이에 서 있던 놈들을 깔아뭉개기 시작했다. 그들이 주춤하는 새에 우리는 나왔다. 그리고 달렸다. 어둠이 깔린 새벽이었다. 밖에서 대기하던 중무장 팀이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저들의 시간이었다.
나는 정 옆에서 달렸다. 새벽 바다 내음이 코에 휘감겼다. 어둠은 언제나처럼 너무나 빨랐지만, 무진의 새벽은 어둠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것들이 존재했다. 무심결에 본 정의 옆 얼굴에는 헤칠 수 없는 근심들이 안개처럼 쌓여있었다. 교전이 제대로 종료되어도 걱정, 제대로 종료되지 않아도 걱정일테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어찌 되었건 공격은 오늘 교전으로 끝나는 게 아닐 것이었다. 우리는 속도를 냈다. 돌아야 할 장소들이 많았다. 무진읍에 있는 지하수도로도 가야 했는데—
머리가 몽롱해졌다. 귀에 잡음이 엮였다. 지독한 냄새와 풀려버린 다리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차갑게 얽히는 아스팔트와 내 뺨이 내가 나뒹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누군가가 짭새, 라며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술가들이군, 하고 생각했다. 몸은 말을 듣지 않는데 머리는 핑핑 돌아가 되려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시스템이 다운된 것 같은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폈다. 쓰러졌거나 쓰러지지 않았던 팀원들이 대열을 재정비하고 새로이 나타난 적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정을 찾았다. 정은 내게서 겨우 네 발자국 떨어진 곳에 누워 있었다. 발목을 다친 건지 다리 주변에 피가 흥건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한 놈이 우리를 향해서 더러운 황색 언론은 패망하라, 라고 외쳤다. 한 손에 무언가를 쥔 채 던지려고 하는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재빨리 권총을 장전했다. 그리고는 놈의 손에서 그것이 떨어지는 순간, 쏘았다. 던지려던 것을 맞췄는지 놈의 손에서 뭔가가 크게 일렁였다. 일순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말 한순간이었다. 예술가의 몸이 기형적으로 늘어났다. 팔과 다리, 배, 머리 할 것 없이 헬륨으로 가득 차는 풍선처럼 몸의 부피는 끝없이 늘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놈은 사방으로 피와 살점을 튀기며 폭발했다. 장관이었다. 살점이 얼굴에 묻지만 않았다면 딱 좋았겠지만. 그러나 거기에 집중할 때는 아니었다. 정을 부축해야했다. 어쨌거나 지금은 교전 중이니까 지휘관인 그녀가 필요했다.
필요…했다. 뒤에서 팀원들의 총소리가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내 척수에서 무언가가 열변을 토하고 있는 와중에도, 총소리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순간, 포음(砲音)은 머나먼 어느 지방의 바다 소리처럼 느껴졌다. 불현듯이, 자리를 지금 찾을 수 있지 않느냐는, 어떤 속삭임 같은 생각이 뇌리에서 피어올랐다. 그 생각은 너무나 강력해서, 마치 어떤 인지적 재해인 것마냥 느껴졌다. 지금 자리를 찾을 수 있다. 자리를… 자리를 만들 수 있다. 다… 이야기할 수 있다.
— 전 팀원은 들으라. 현장 지휘관의 상태가 위독하니 급히 본진으로 돌아가야한다. 팀원들 역시 교전을 마무리하고 본진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이상.
정은 반 시간이 좀 넘어서야 정신을 바로 잡았다. 응급처치는 해놓았지만 잘못될 여지가 있으니 어서 기지로 돌아가야했다. 다만 그녀와 나누어야할 이야기가 있었다. 무진 시내는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깨어있는 자들의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용한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나마 가장 가까웠던 폐아파트촌으로 왔다. 한 아파트 현관에다 그녀를 뉘였다. 땅이 차가웠지만 오래 있지는 않을 예정이었다. 현관에서는 바로 그곳이 보였다. 박이 죽은 곳. 아무도 살지 않는 곳. 살덩이파나 세라믹파, 변칙예술가들조차도 잘 오지 않는 곳. 그나마 조용한 곳. 나는 조용한 곳이 필요했다.
— 여기 어디야?
— 안전한 데.
— 팀원들은?
— 아까 무전했는데, 교전 끝내고 본진으로 철수하는 중일 거야.
— 그래… 근데, 여기 정말 어딘데?
— 아까 있던데서 얼마 안 걸리는데야. …이야기할 게 하나 있어.
— 뭐.
정은 인상을 찌푸렸다. 발목의 통증 탓인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여기가 사실 박쌤이 돌아가신 장소야.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속눈썹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처음으로 세상을 마주하기로 한 것처럼, 정은 이내 주위를 새삼스레 관찰했다.
— 여기가 그 폐아파트촌이라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참을 수 없이 차가워지고 있는 내 두 손발이 미친 듯이 아려왔다.
— 근데… 말할 게 뭐야?
— 바로 저기서 우리가 헤어졌어. 쌤은 그대로 돌아서, 팀원들이 갔으리라고 믿고 계시는 방향으로 걸어가셨어. 근데…
아주 생생히 그 모습이 떠오른다. 느릿느릿 걸음을 하면서 가는 박의 모습이. 태을리 쪽으로 뚫린, 대로 정중앙에서 교전과는 상관 없는 듯이, 천천히 거니는 것처럼 보이던 그 뒷모습이.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아마 날린 사람도, 조준되었던 사람도 의도치 않았을 누군가의 탄알이 저멀리서 날아와 폭발을 일으켰을 때, 박의 유독 쓸쓸해보이던 그 뒷모습이.
나의 말을 듣던 정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척수로 받아들이던 그 감정이 그녀의 눈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 너… 알고 있었어?
그렇다고, 대답했다. 봤다고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내가 보고 있었다고, 놀라 달려갔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고, 말했다. 정은 왜 그랬냐고 물었다. 정은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 나를 원망하려고 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저 미안하다고 했다. 두려움이 앞섰다고 했다. 박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내게 돌아올 수도 있겠다는, 그 한심한 생각이 뇌를 점거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정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계속 저었다. 내 심장이 마침내 멈추어서,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고꾸라질 때까지 계속될 것처럼.
무릎을 꿇었다. 고꾸라지지 않았지만 그랬으면 했다. 정은 나를 노려보다가, 나를 끌어 안았다. 오래, 아주 오래. 정의 몸은 파도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힘겨운 일을 감당해내는 것처럼 눈물을 밀어내고 있었다. 나도 울고 싶었다. 그러나 울 수는 없었다. 내가 눈물을 흘릴 자격이 되는지, 누군가를 애도할 자격이나 되는지, 내 죄책감에 내가 아파할 자격이 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눈물의 와중에서 나는 독백처럼, 이렇게 못난 사람이라, 못난 애인이라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녀는 울음으로 답하고 있었다. 정의 울음은 깊고 거대한 안개와도 같았다. 안개는 크게 밀려왔다. 나는 그 앞에서 무한하게 무력해지고 있었다.
울고 난 뒤에 정은 아무 말 없이 내게 부축을 받아 걸음을 옮겼다. 나 역시 아무 말하지 않았다. 내게 미래는 보이지 않았고 오직 현재만이 지겹도록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만에 하나, 정이 나를 용서한다면… 그러나 그것은 정말 부질없는 가정이었다. 내 풀리지 않는 죄책감은 아직도 내 척수를 흐르고 있었고, 그것은 또 다른 죄책감 하나가 끈끈히 붙어, 영영 떼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머리가 아팠다. 그렇게, 우리 둘은 말 없이 걸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본부로 가는 길이 보일때 즈음 정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왠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린다. 신입 연수생들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내 옆에 앉았던 선배, 정.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에 이끌리듯이 그녀에게 말을 붙였던 서투른 내 행동이 기억난다. 그녀는 내게 대답해주었다. 정수현이라고, 자기 이름을 말하던 그 음성이 귓가에 선명하다.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그 음성.
지독한 정적이 영원토록 흐르는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 시간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정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엷은 파도가 그녀의 몸에서 내 몸으로 전달되어 왔다.
언젠가 갔던 바다가 기억난다. 둘이서 같이 휴가를 내고 같이 여행을 떠났던 바다. 그 바다가 잘 보이는 펜션에서 우리는 행복했었다. 수평선에서 밀려오는 흰 것이 일렁이던 그날의 파도가 너무도 생생히 떠오른다.
정의 입술이 파르게 떨리고 있었다. 뭔가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뇌를 잠식했다.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두 팔로 정을 껴안고 권총을 쏘았다. 뒤에서 예술가로 보이는 한 놈이 쓰러졌다. 아까 느닷없이 시작된 총격전에서 보였던 놈인데, 따라왔던 모양이었다. 손에는 무기가 들려있었다. 엎어지려는 정의 몸을 간신히 붙들었다. 정은 자신을 전혀 지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를 조심스레 눕혔다. 내 옷에 정의 피가 묻어있었다. 정이 다시 입을 열었지만 이번에도 말은 나오지 않고 피만이 입술 바깥으로 흘러나올 뿐이었다. 누군가가 안된다고, 절박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정의 피에 어딘가 오묘한 빛깔이 깃든 것이 보였다. 누군가가 자꾸 절박하게 외치고 있었다. 나는 정의 눈을 보고서야 그게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어딘가 모자란 듯이 서글퍼보이는 남자가 기이한 형태로 찌그러져 있었다. 정의 몸은 이내 푸르게 변해가다가, 꽃 문신인지 정말 꽃인지 모를 것들이 온 피부에 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정을 흔들었다. 안개처럼 변해버린 생각들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형체를 알 수 없는 말들이 파도처럼 내 입에서 휩쓸려갔다.
정은 눈을 깜박였다. 세 번 그렇게 했다. 그리고 다신 눈을 뜨지 않았다.
정의 몸은 박의 시체 옆에 뉘여졌다. 기지에 돌아와 있던 팀원들이 죽은 정의 몸을 보고 조의를 표했다. 영안실의 바닥은 지독하게 차가웠고, 나는 은연중에, 정이 감기에 걸리면 어떡하지, 하고 속삭였다. 정은 추위를 많이 탔는데, 어떡하지, 하고.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그곳에 뉘여진 정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끌려나왔다.
조사실의 인원들은 이제 나를 배려하지 않았다. 며칠 전 나를 조사하던 사람들은 어디 갔는지, 대거 교체된 조사실의 사람들은 전부 눈에 익숙치 않았다. 어딘지 모를 적대감이 느껴졌다. 나는 그들의 요원증을 보고 나서야 이해했다. 정보부 소속이라고 쓰여진 금빛 글씨. 그들은 나에게 오롯이 적대감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 작전 자체에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작전은 성공했던가. 우리가 의도한 대로 일정량의 타격을 주었는가… 그러나 되짚어볼수록, 변칙 예술가들의 공격으로 살덩이파에게만 비밀리에 타격을 입히자는 원래의 의도도 무산된 것을 생각해보면 작전은 실패한 것에 가깝다고 봐야만 할 것 같았다. 비참한 기분이 엄습했다.
정보부 요원들은 심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를 길들이려는 듯, 온갖 모욕적인 언사로 말문을 텄다. 이래서 일정한 기지에 붙어있지 못한 기러기들은 안된다는 둥, 그 모양이니 여태까지 B계급 한번 못 단 것이 아니냐는 둥, 심지어는, 박범운 라인이 원래 사람이 덜 떨어진 놈들이 많다는, 죽은 박을 모욕하는 언사까지 내뱉었다. 말을 내뱉은 그놈을 반쯤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의도한 건지 손은 이미 결박당해 있었다. 놈들은 나를 완전히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었다.
심문은 생각보다 빨리 시작되었다. 그들의 말은 날카로웠고 나의 의식을 꿰뚫어보는 것만 같았다. 벗겨진 채로 나뒹구는 것만 같아 불쾌했다. 그들은 내게 설명을 요구했다. 그래서 나는 정이 죽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내 실수였던 것. 철저히 미행이 없는 것을 감시하지 못한 것. 정을 바삐 기지로 데리고 왔어야 했던 것. 그러나, 왜 폐아파트촌으로 데리고 갔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꼬투리 잡았다. 그것에 대해 설명하라는 요구에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내가 한 것은 오직 고개를 푹 숙이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내게 씌운 혐의인 방임죄와 근무지 이탈죄, 그리고 상관을 죽게 만든 책임에 대해 아무 말도 않는 것뿐이었다. 시간은 좀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 아니, 무슨 생각으로 다친 상관을 그리로 끌고 가? 어?
시간이 꽤 흘렀다. 아무래도 직위가 꽤 있는 중년 남성인 것 같은 이가 내게 다그치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번갈아가면서 나를 취조하던 이들의 열정은 밤이 되어도 도무지 꺾이지 않았고 교대로 쪽잠을 자가면서도 나를 심문했다. 졸음이 쏟아졌다. 그러나 엎어져 자거나 하지는 못했다. 그러기라도 하면 그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까. 취조실에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D계급 옷을 입고 D계급 숙소에서 일어났다던 전직 요원들의 이야기를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남자는 계속 나를 다그치고 있었다. 가끔 대답하지 않는다고 가슴이나 뺨을 얻어맞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은 잠깐 남자를 응시하곤 천장을 올려다보는 것뿐이었다. 천장에는 언젠가 보았던 파도가 처절하게 물결치고 있었다. 나는 그 파도 속에 뛰어들고 싶었다.
의식의 몽롱 사이 사이에 취조인은 바뀌었고 그때마다 다른 방식의 질문에서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누군가가 자꾸만 내게 살인자라는 이야기를 했고, 살인을 지속적으로 계획했다는 말과 강간을 목적으로 그곳에 데려간 것이 아니냐는 말을 던졌다. 세 헛소리는 각기 다른 사람이 내뱉은 것 같기도, 같은 사람이 내뱉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으므로 그 말의 주인을 가늠할 수 없었다. 단지 이 시간이 길게 지속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리고 이 시간이 끝나면, 최대한 빠른 죽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를 바랬다.
그래도 어느 순간까지는 꽤 버틸만 하다고 느낀 것 같다. 하지만 그 느낌은 어떤 남자가 들어오면서부터 무너져내렸다.
— 윤도강 요원.
그는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나를 호명했다. 온갖 투지와 적대감으로 꽁꽁 쌓인 듯한 다른 취조원들과는 달리 어딘가 달관적인 듯하기도 하고 냉정해보이기도 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물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떨결에 마주친 남자의 시선에서 나는 어딘가, 극히 위험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가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 내 이름은 이곤열이다. 나는 저 밖에 계신 요원들처럼 정보부 소속이 아니네. 단지… 심리학 박사지. 자네같은 이들의 정신 상담도 도맡아하고. 여튼, 나는 자네에게 자네의 온갖 행적을 물어볼 생각 없네. 그보다는 좀 다른 측면의 몇 가지를 물어볼 생각이야. 괜찮을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는 그들이 뭘 하던 상관이 없었다. 조금이나마 졸게 해주면 좋을텐데… 10분이라도.
— 좋아. 자네 예전 면담 기억하나? 정수현 요원이 죽기 전에, 박범운 요원 사망 건으로 조사 받았던 일 말이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 그때 면담자가 귀띔해주지 않았나? 그 왜, 자네의 행동 건으로 서울 기지에서 경고가 왔다고 말일세.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안개가 절박하게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저 자는 뭔가를 안다. 나를 안다. 내 비밀을 안다. 정에게도 끝내 말하지 않았던 그 비밀을… 안다.
— 아마 영안실에 너무 자주 드나든다는 것이었지?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이제야 남자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냉철해보이는 표정, 젊어보이는 인상이지만 주름진 손이 나이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아마 저 방면에서는 꽤 경력이 있는 사람이겠지. 그래서 나를 꿰뚫어볼 수 있는 것인가. 나를… 내 비밀을…
안개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서 여기서 나가야한다고, 절대 다른 사람들이 알게 내버려둬선 안된다고, 안개가 울고 있었다.
— 영안실 관리 직원이 진술했던데, 자네가 시체 관찰을 요구한다고. 그런데 그 횟수가 정상적 빈도수가 아니라, 거의 하루에 한 번꼴로 찾아온다고…
불현듯 어떤 나이든 여자의 음성이 떠올랐다. 무슨 일로 이리 찾아오시느냐고, 나에게 묻는 음성이. 그때는 미처 몰랐는데, 그 말투 저편에 의심이 깔려있었던 것 같다. 그 개년이…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일으켜서는 안된다.
— 지금 자네의 상태가 많이 안 좋다는 걸 아네. 존경하던 사람을 잃고 바로 그 곳에서 사랑하던 사람을 또 잃었으니, 감정의 충격이 어떻겠는가. 다만…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내 처지를 이해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내 혐의를 굳히려는 수작이었다. 너무나 잘 알았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려는 것에 담긴 내용이 내 잘못을, 그 치명적인 실수를 초래했으니까.
내가 잘 알았다.
— 왜 그렇게까지 변칙적인 죽음을 당한 시체들을 보고 싶어한 건가?
나는 대답하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내 입은 나의 의지보다 빨랐다.
—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 하지만 자네가 그러한 시체들을 찾았다는 기록이 있어.
— 참고용이었습니다.
— 무엇에 대하여?
— …
— 자네 말은 비논리적이야. 어폐가 안 맞는다구.
— …
— 박범운 요원도 변칙적인 죽음을 당했다고 추정되었지.
가슴이 떨어져 내렸다. 뇌수 한쪽이 무너져 내리면서, 그동안 숨겨왔던 말들이 뇌에서 터지고 있었다. 죄책감은 그들의 탄약이었다. 남자는 지금, 박의 죽음을 돌려 묻고 있었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 뭘 듣고 싶으신 겁니까?
— 왜 그러는지, 이유를 듣고 싶네.
남자는 박에 대해 묻지 않았다. 뭘 의도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 이유는 없습니다.
— 세상에 이유 없는 행동이 있을까.
— …
그는, 기지개를 펴고 자세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언제까지고 기다리겠단 투였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그게 그를 향한 건지, 나를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제게 왜 이러십니까?
— 난 자네를 탓하지 않네.
— 박사님께선, 그러시겠죠.
그가 나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할지 기대라도 되는 듯이.
— 하지만 저기, 저 사람들은요, 박사님. 뭐라도 걸리면 물어뜯을 겁니다. 아니, 이미 뜯고 있잖습니까. 저를요. 제 애인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저를요.
마지막 말이 거의 울음이 되어 터져나왔다는 것을 남자의 얼굴을 보고 알았다. 조사실 유리 저편에서는 비웃고 있을지 몰라도, 그는 비웃지 않고 있었다. 그는 꽤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나는 계속 이어나갔다.
— 그런데다가, 제 그 기행, 아니 정신병이라고 할까요. 그 정신병을 박사님께서 들먹이시면 이 작전 자체가 완전 말이 안 되는 거라고요. 작전 자체가… 그냥… 한 미친 놈이 스승과 애인을 연쇄적으로 살해한 그냥 기분 더럽고 역겨운 이야기로밖에 안 보인다고요! 왜 제게 이러십니까, 왜! 이건 적어도, 실패한 작전이어야하고… 작전을 수행하다 죽은… 숭고한 요원의 이야기여야합니다… 박사님, 제발요. 그녀의 이야기지, 제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죽음 같은 정적이 안개처럼 흩뿌려지고 있었다. 이제 다 까발려졌다. 나는 은연중에 내가 그토록 숨겨왔던 비밀을 인정해버렸고, 내가 말한대로 이 작전은… 정말 재단 역사상 가장 쓰레기같았던 작전으로 기록될 것이 뻔했다. 호흡이 점점 힘들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한 가지 생각만은 놓칠 수가 없었다. 내 실수라는 생각. 내가… 다 망쳤다. 내가 다…
모든 것이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남자의 부름과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 여러 사람의 말 소리까지도… 시야가 안개 속에 덮힌 듯이 뿌예져 간다.
나는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정과 박이 저 앞에 걸어가고 있다. 둘 다 죽을 때의 모습이 아닌, 살아있을 때의 모습이다. 둘은 나란히 걷고 있다. 이곳은 공원, 철원 연수원에 위치해 있는 호수 공원이다. 여기서 내가 연수를 받았다. 그들이 나를 향해서 걸어온다. 그들은 밝게 웃고 있다. 나는 호수 앞에 서 있다. 달려가서 그들과 포옹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나는… 묶여 있다. 손발을 움직일 수가 없도록 밧줄로 꽁꽁 묶였다. 정과 박이 내게로 걸어온다. 그들은 여전히 밝게 웃고 있다. 나는 이제 그들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다. 그들은… 뭔가 이상하다. 입꼬리가 기이하게 비틀려 있고 안와가 무너진 듯 어딘가 눈이 움푹 패여있다. 이상하다. 그들의 웃음에서 어딘가 인위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그들이 한없이, 한없이 다가온다. 그리고 나를 걷어차서 호수 안으로 밀어넘어뜨린다.
정이 나와 함께 걷고 있다. 우리는 조깅 중이다. 박의 얼굴을 한 개와 개의 얼굴을 한 박이 뒤따르고 있다. 정은 죽어갈 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온 몸이 푸르고, 배에서는 피가 나고, 피부에 꽃 문신인지 진짜 꽃일지 모르겠는 무언가가 피어나는 모습. 나는… 그런 그녀에게 욕지기인지 사랑인지 모를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 어쩌면 정말로 성욕 계통의 무언가일 수도 있다. 박사가 그런 뉘앙스로 이야기했듯이. 그녀가 뻣뻣한 고개를 돌린다.
— 안녕.
나는 인사하지 않는다. 그저 정의 얼굴만을 빤히 보고 있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 말은 사치라고, 나의 뇌에서 죽어가는 뇌세포가 그렇게 말을 한다. 박의 얼굴을 한 개가 외친다.
— 온갖 죽어가는 것들의 부르주아들을 소탕하라! 본질적인 아픔의 수요자들은 마땅히 처벌되어야 한다. 죽어가는 것들의 윤리주의자들을 소탕하라!
나는 오로지 정의 아름다움에만 심취해있다. 수많은 밤들 가운데에서 지금 이 순간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정은 죽어가고 있고, 푸른 색이고, 온 몸에서는 꽃이 돋아나고 있다.
— 넌 좀 괜찮아?
정은 아름답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족하다. 나는 환희에 가득 차 있다.
— 그러나 선생님, 무진은 안개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허무주의적 문학 장치인데, 이 안에서 개들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와 문어들의 언어들이 서로 뒤를 봐주는 그런 관계가 성립된다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선생님, 이는 곧 안개입니다. 결국은 휩쓸려 갈 파도에요. 그러니 선생님, 맘껏 연기를 피우다 가세요. 연기는 곧 삶이자 안개입니다.
개의 얼굴을 한 박이 지껄인다. 박의 얼굴을 한 개와 개의 얼굴을 한 박이 걸음을 걷는 자리를 두고 다툼을 벌인다. 개들이 짖는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박이 참 개를 좋아했지. 개가 많이 짖는다.
나는 정의 얼굴을 보고 있다. 정은 내게 물음을 물은 그대로 내 얼굴만을 보고 걷고 있다. 마치 내 답을 원하는 듯이. 나는 그러나 답을 할 것이 없다. 답을 할 것이 없다고,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이 내 입을 다물게 한다.
— 미(美)는 미(美)로서 미(美)에 대해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때 미(美)는 어떠한 도구다. 일종의 개목줄이다. 개목줄은 씹어야하는데, 이때 안개는 목줄의 맛을 더해주는 환각제다. 윤리적인 거지들이 이 목줄 맛을 보려고 기어오는 꼴이 보인다. 이때 목줄은 미륵이다. 선생님 나는 미륵을 원하는 거지들을 보았소, 하는 아이들이 많아져야한다. 일종의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뒤에서, 개의 목을 한 박이 박의 얼굴을 한 개의 목을 베어든 모습으로, 두 머리가 동시에 말한다. 격언처럼 느껴져 적어놓을 종이를 찾았지만 종이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정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정은, 여전히 나를 보고 있다. 내게서 답을 원한다. 애써 입을 열어본다.
— 차라리 완전히 미칠 걸 그랬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나온다. 그러나 나는 왜인지 전혀 이상하게 느끼지 않는다.
— 왜?
— 그랬으면, 아예 박의 죽음에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으면, 널 거기로 데려가지도 않았을거고, 네가 죽지도 않았을테니까.
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 푸르딩딩한 목을 돌릴 뿐이다.
— 차라리 그냥 완전 미칠 걸…
내가, 그렇게 중얼거린다.
눈 앞에 그 남자, 심리학 박사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남자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딘지 가늠할 수 없는 곳에 누워 있었다. 코 끝을 스치는 바다 내음으로 미루어보아 아직도 무진인 것 같았다. 재빨리 내 옷부터 확인했다. 주황색은 아니었으니, D계급으로 강등된 것은 분명 아니리라. 몸을 일으켰다. 사방이 안개로 둘러싸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 어떻게 된 겁니까?
— 여긴 무진 기지 내의 병실이야. 자네가 졸도했네. 하긴, 일주일 넘게 재우지를 않았으니…
— 저는 이제 어떻게 됩니까?
— 저쪽에서 혐의를 씌우려고는 했는데, 증거가 불충분하니 별 수 없이 물러섰네. 자네가 언급한 소위 '정신병'에 대한 것도 물고 늘어질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사체 보러다니는 취미가 크게 해 될 것은 없지 않나. 아마 근무지 이탈 건만 처리가 될 거야. 근신은 좀 하겠군.
남자는 병실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다시 내가 누워 있는 침대 곁으로 왔다. 그리고는 몸을 숙여 속삭이듯 하나를 덧붙였다.
— 박범운은 내게도 좋은 친구였네. 내가 세세히 파헤치지 않는 이유, 자네가 변할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야. 그의 죽음… 자네가 뼈저리게 느낄 거라 믿어.
그는 정말로 다 알고 있었다.
몸을 추스르자마자 정을 보러 갔다. 정과 박의 몸은 수일 내로 태워지고 서울 기지 내의 봉안당에 봉안될 것이라고, 무진 기지 영안실 관리자가 말했다.
정은 여전히 푸른 피부에 꽃 같은 존재들이 달린 채로 누워 있었다. 꿈에서 본 것처럼 기이할 정도로 매혹적인 건 아니었지만, 여전히 생전처럼 아름다웠다. 그제야 깨달았다. 정이 아름다워보였던 이유는 이딴 변칙적인 죽음의 표상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생전의 모습이 나타나 있어서라는 걸.
다른 시체들과 다르게.
정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아마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을 것이었다. 입이 메말라갔다.
— 수현아… 나, 박쌤 죽는 거… 내버려뒀던 거… 사실 내가 책임 쓸까 봐서 그런게 아녔어…
다음 문장은 입이 너무 메말라서, 간신히 입술을 축이고 나서야 말할 수 있었다.
— 어떻게 변할까 궁금해서였어.
연수원에서 처음으로 목격한 그 시체는 분명 역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의 어딘가에서 분명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체는 죽음으로써 분명 새로운 세계에 뛰어든 것이었고 그렇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어떤 아이러니한 느낌이 내게는 어떠한 쾌감보다도 더 큰 것이었다. 그 기묘한 쾌감은 마치 내가 변칙 예술가라도 되는 듯한 어떤 가장(假裝)적 기쁨을 주었다. 죽음이 가져다 준 결과란 고통보다 미(美)에 가깝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농염한 사취(死臭)에 이끌리는 파리처럼, 그때부터 나는 그러한 종류의 시체를 탐해 나갔다. 각각의 죽음은 곧 계통 없이 정렬된 문서 더미 같아, 죽음 하나 하나에 각각 다른 세계가 깃들어 있었다. 나는 일종의 탐구자였고 선구자였으며 동시에 열성적인 신봉자였다. 죽은 이들의 몸은 변칙적인 공격으로, 변칙적인 사고로 현실의 균열로 만들어진 크레바스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 크레바스 안쪽은 너무나 경건한 느낌을 주는 기괴함들로 가득 차 있었다. 훔쳐 보는 것만으로도 죄를 범하는 듯한 그러한 분위기. 나 자신이, 용서받지 못할 길로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 그래서 더 시신 탐구에 집착했을지도 모른다.
박이 그렇게 공격당했을 때는 마침 나의 소중한 탐구물들이 어느새 점점 식상해져 갔을 무렵이었다. 처음 한 십 분 정도는 고민했다. 달려가서 빼내야 하나? 벽을 무너뜨려? 아님, 기지에 연락해? 무전기에 여러 번 손을 대었다. 총에도 여러 번 손을 대었고, 내 상체 역시 앞으로 움직이려고 아등바등 기를 썼다. 이상하게도 내 하체가, 내 뇌가 앞으로 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내 모든 신체들이 각기 제 주장을 펼치는 바람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고요해졌다. 어떤 부위도 앞으로 향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박을 구하면 안 된다는 계시를 들은 것 같이. 그렇게 십분이 흐르고 나니, 저 벽에 박힌 박이 이제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시체일 뿐이었다. 내가 곧 탐구할 수 있는, 그런 시체.
나도 내가 결코 정상적으로 행동하고 있지 않고 있음을 느끼고는 있었다. 그러나 나는 변칙적인 시체를 원했다. 재단 인원들은 생각보다 그리 많이 변칙적으로 죽지 않았다. 금같은 기회를 놓치기는 많이 어려웠다. 박의 죽음은 곧 내게 또 하나의 미지의 세계를 여는 것과도 같았다. 내겐 많이 가까웠던 사람. 의지했던 선배, 스승님. 그이의 죽음은 과연 어떠한 형태로 나타날까가, 너무 궁금했다.
그러나 나의 열정은 박을 뒤로 하고 떠난 이후로 차츰 망가져 갔다. 박의 행방을 찾는 조에 슬쩍 끼어들어 갈 때도, 박의 시체가 있는 구역으로 조가 마침내 도달했을 때에도, 척수에서 넘실대는 감정들은 나를 끊임없이 공격했다.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뭔가 메스꺼운 느낌이, 내 의식이 어딘가 현실과는 동떨어진 곳에 누워있는 것 같았다. 계획은 걷잡을 수 없이 비틀려갔다. 나는 그를 버리고 도망하던 순간에 그토록 원하던 박의 시체를, 그 순간이 지나자 출처를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거부했다. 보고 싶지 않았다. 다시 도망치고 싶었다. 뭐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박이 변칙적으로가 아니라 평범하게 죽었다는 것을 들었을때, 나는 당황했다. 갑자기 모든 의식이 활성화된 것만 같았다. 찬 물이 내 목으로 쏟아진 느낌. 술에 꼴아 나자빠진 술고래가 갑자기 술이 깨 풍비박산이 난 집 안 꼴을 확인하는 것처럼, 나도 그 순간 내가 저지른 짓이 뭔지를 깨달아버렸다. 고작 나는 박의 평범한 시체를 얻기 위해 그 죽임을 방관했던가. 그딴 평범한 시체는 그냥 무덤가에만 가도 보이는 건데, 그딴 걸 얻기 위해… 뒤늦은 후회와 박에 대한 미안함이 치솟았다. 나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었다. 돌이킬 수 없이, 내 스승을 내 손으로 죽여버리고 말았다. 그 생각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죽였다는 생각이, 내가… 고작 그딴 것을 위해 박을 죽였다는 생각이. 그래서… 그래서 정을 죽게 만들었다.
알지 못하던 새에 눈물이 뺨을 흐르고 지나갔다. 눈물이 모여 바다라도 이룰 것처럼, 눈은 물을 한도 없이 흩뿌리고 있었다. 나는 정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가 평범하게 죽든 변칙적으로 죽든 상관 없었다. 나는 죽음의 정의를 잘 알고 있었다. 다시는 어떤 사람을 볼 수 없는 것. 보고 싶어도, 너무나 보고 싶어도 다시는 그 사람을 찾아갈 수 없는 것. 나는 정을 그렇게 두고 싶지 않았다. 정의 생사가 걸린 안건에 나의 학구열은 결코 관여되지 않았다. 정은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지금 이렇게, 변칙적으로 죽어 누워 있다. 변칙적으로… 하필, 정이. 하필… 나는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했다. 정이 아니라 내가, 그 병적인 학구열때문에 하나뿐인 선생을 죽게 내버려둔 내가, 그 병적인 학구열에 걸맞는 죽음을 당한 머저리같은 내가 저 차가운 철판으로 몸을 감싸고 누워 있어야 마땅했다. 내가 죽었어야 했다.
내 눈물이 죽은 정의 얼굴로 떨어졌다. 정의 얼굴 앞에서, 지난 날의 기억들은 두서 없이 수면 위로 튀어올랐다. 손을 뻗어 그녀의 파란 피부를 어루어만졌다. 죽음에 빠져 더 이상 나와 함께 거닐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 그녀의 눈꺼풀이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마음 속 깊이 썩어가는 죄책감과 자기혐오를 같이 짊어지고, 어느새 되돌아온 학구열의 꼬리를 붙든 채 그녀의 얼굴 속에서 어떤 감정을 읽어내려 애썼다. 무언가가 읽히고 있었다. 내 눈물이 떨어져 그녀의 볼로 흘러갔다. 정은 미동하지 않았다. 무언가가 보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죽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저 감정, 저 표정. 변칙으로 초래되는 모종의 상태. 니르바나의 경지.
이것은 타나토스의 황홀경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