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목마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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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iope 7/31/2021 (토) 02:48:21 #10309191


역시 이 맘때는 밤이 무더워 한 번 깨면 다시 잠들기 어렵다. 자면서 내뱉은 잠꼬대에 스스로 놀라 한밤중에 깨버려서는 몇 시간 째 다시 잠들지 못하고 있는 중이라, 이참에 요전에 꾸어서는 머릿속에 그 내용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이상한 느낌의 꿈에 대해 한 번 간단히 풀어볼까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자각몽, 그러니까 루시드 드림을 자주 겪는 편이다. 꿈 속에서 꿈이라는 걸 자각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걸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알지만 직접 겪는 입장에서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다. 보통 그런 류의 꿈을 꾸고 난 직후는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거나 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푹 잠들지 못해서 끔찍한 피로감에 시달리니까.

Rupert 7/31/2021 (토) 02:49:40 #30a25dfe


훈련 없이도 자각몽을 자주 꾸는거라면 꽤나 천부적인 재능인데. 자고 일어난 직후에 꿈일기를 쓴다던가 하진 않나? 자각몽을 꾸려는 사람들은 무슨 꿈을 꾸었는지 떠올리고 기억하면서 훈련한다고 알고 있다만.

Caliope 7/31/2021 (토) 02:52:59 #10309191


전혀 쓰지 않는다. 그리 드라마틱한 꿈을 꾸는 편도 아니라서 오래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

혹시 이런 류의 꿈을 꾸어본 적이 있나? 마치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간 것처럼 되어서는 행동하게 되는 꿈. 나는 이런 꿈을 생각보다 자주 꾸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은연 중에 내가 누구인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등을 자각한다. 입으로 무언가 말을 내뱉을 때에도 어째선지 자국의 언어가 아닌, 좀처럼 알아먹을 수 없는 언어로 발음하게 된다.

이런 류의 꿈을 꿀 때 나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몸에 빙의한 것만 같아서, 꿈인 줄 알면서도 왠지 모르게 들뜬 마음으로 행동하곤 했다. 그런데 이 꿈을 꿀 때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좁은 자갈길을 따라서 숲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은연 중에 이건 분명 꿈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 어려울만큼 현실감이 넘쳤다. 아마 내 방이 더웠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 숲에서 느꼈던 불쾌한 습기와 더위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주변을 둘러보니까 유치원생부터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나잇대의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다들 두 사람씩 짝지어서 손을 잡고 있는데, 몇몇은 신나게 웃고 떠들고 있었다. 나도 그 중에 하나였다. 이유는 모르지만 왠지 신나있었고, 양옆에 나보다 나이가 약간 더 많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형, 누나 거리면서 길을 걷고 있었다.

Caliope 7/31/2021 (토) 02:55:38 #10309191


자갈길을 따라서 숲속으로 들어가니, 점점 무슨 경쾌한 음악같은게 들려왔다. 무슨 오르간 소리같았는데, 교회에서 들을 수 있을 법한 그런 오르간이 아니라 조금 경박스럽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https://www.youtube.com/watch?v=kbS7IzZo4Pg

이런 류의 음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신나고 경쾌하면서도 어딘가 불쾌한 인상을 남기는 그런 음악. 그런게 온 사방에서 들리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신나서 회전목마로 달려갔다. 분홍색, 노란색, 빨간색 등 어지러운 색감으로 칠해진 회전목마에 하나둘씩 오르고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무슨 규칙같은게 있었던 것도 같다. 손을 잡고 있던 애들 중에서 한 사람씩만 그 목마에 올랐다. 나는 회전목마에 타고 싶어서 무작정 목마로 향하려 했는데, 내 손을 잡고 있던 두 아이가 나를 말렸다. 그러고서는 서로 심각한 표정으로 뭐라 쑥덕였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로 그 둘을 살폈다. 아무래도 보호자가 없어서 그런가,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니 어른으로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돌연 내 손을 잡고 있던 두 아이 중 여자아이가 자신이 제일 나이가 많으니 자신이 타야만 한다고 우겼다. 얼굴을 보니 그닥 타고 싶은 표정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타려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뭐라고 칭얼거렸지만, 단호하게 제지당했다. 결국 그 아이는 내 손을 잡고 있던 남자아이와 계속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나를 한 번 돌아보고는 회전목마로 향했다.

Reiner 7/31/2021 (토) 02:56:00 #35486612


꿈이라고 한 것치고는 너무 리얼하고 세세한데. 즉석에서 지어내고 있는거 아니야?

Caliope 7/31/2021 (토) 02:56:41 #10309191


그렇게 생각해도 별 수 없다. 난 그냥 자고 일어나서 떠오르는대로 아무렇게나 적고 있을 뿐이니까. 그리고, 다른 꿈은 몰라도 이 꿈만큼은 왜인지 모르게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서 지워지지를 않는다.

Rupert 7/31/2021 (토) 02:57:24 #30a25dfe


꿈은 현실 무의식의 반영이니까, 과거에 겪었던 일을 꿈으로 본다던가?

Caliope 7/31/2021 (토) 02:59:41 #10309191


아니, 난 외동이다. 꽤 늦둥이긴 하지만 형제자매라고 할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꿈에서 보았던 아이들이나 숲속 회전목마는 어디서도 본 기억이 없다. 어딘가에서 봤던 이미지들이 꿈속에서 혼합되었던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처음 꾼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

Randolph 7/31/2021 (토) 03:00:00 #33384631


꿈의 내용이 그것뿐이었다면 여기에 올리지도 않았겠지. 클라이막스가 남았을 것 같은데.

Caliope 7/31/2021 (토) 03:03:41 #10309191


맞다. 꿈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그 여자아이가 회전목마로 향한 다음에도 몇몇 아이들이 목마에 타기 시작했다. 나도 타고 싶었지만 내 손을 잡은 아이가 놔주질 않아서 결국에는 오르지 못했고,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차츰 오를 아이들은 다 오르고, 다른 아이들은 부러운 시선으로 그걸 지켜보고 있을 즈음이었다. 목마는 멈춰있었다.

언제쯤 목마가 회전하기 시작하려나— 하면서 눈으로 목마에 탄 아이들을 훑어보고 있을 무렵, 들려오던 음악이 어딘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음이 어긋나고, 왜인지 조금씩 왜곡되는 듯한…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누가 머릿속으로 텔레파시를 보낸 것처럼, 원래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회전목마에는 아직 빈 자리가 남아있다는 것을, 타야하는 사람이 타지 않았다는 사실을…

내 손을 잡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나를 어디론가 억세게 잡아끌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른 아이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끔 최대한 조심스레 빠져나와서, 왔던 길을 따라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자갈길이 보일 무렵부터, 그 아이는 내 손을 꽉 잡고 뛰기 시작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채 그대로 따라 달렸다. 그 아이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내 이름을 부르면서 절대 잡히면 안된다고 외치며 뛰었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놀이공원 관계자라거나 그런 사람들은 코빼기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달렸다. 숨이 가빠질만큼 뛰었다. 한참을 달려서 서로 더 이상 뛰지 못하게 되었을 즈음에, 갑자기 그 아이가 내 입을 막았다.

숨이 턱끝까지 차서 헥헥대고 있던 와중에 갑자기 입을 틀어막아서 죽을 것만 같았는데, 그 순간에 나도 깨달았다. 그 공터에서 연주되던 오르간 소리, 그 오르간 음악 소리가 계속해서 커지면서, 가까워지고 있었다. 분명 아무도 우릴 보지 못했을텐데. 뭔가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온몸이 섬뜩했다.

Caliope 7/31/2021 (토) 03:06:11 #10309191


우리는 다시 달렸다. 그냥 길이 나있는대로 무작정 달렸다. 어린아이의 몸이라서 그런지 조금만 뛰어도 금방 숨이 차오르고 힘들었다. 있는 힘 없는 힘을 다 끌어모아 오르막길을 내달리니, 다른 아이들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도와달라고 소리치려던 순간에, 봐버렸다.

그 뒤에는 아직 탈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회전목마가 있었다.

분명 반대방향으로, 왔던 길을 거슬러 달렸는데도 우리는 어느새인가 그 앞에 와있었다. 소름끼치는 오르간 연주 음악 소리가 숲을 한가득 채웠다. 패닉에 빠져있던 내 손을 다시 그 남자아이가 잡아끌었다. 가야한다고, 도망쳐야 한다고 몇 번이고 중얼거리면서 길도 나지 않은 숲속으로 나를 이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는 다리에 힘도 빠지고, 숨이 차올라 더는 달릴 수도 없어서 간신히 걷는게 최선이었다. 그러다가 튀어나온 돌부리를 미처 보지 못하고 심하게 넘어졌다. 다리에서는 피가 났고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내 손을 이끌고 앞서가던 남자아이는 무척이나 당황하며 나를 돌아봤지만, 갑자기 사색이 되어서는 가던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는 이미 꿈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은연 중에도 추호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그냥 그 자리에 넘어진 채로 그대로 울고 있었다. 뭔가 다가오는 기척은 느끼지 못했는데, 내 뒤로 점점 음악소리가 가까워졌다. 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한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숲을 이루고 있는 다른 나무들과 똑같은 나무였는데, 그 나무의 기둥 부분이 갑자기 괴기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사람 얼굴의 형상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걸 어떻게 묘사해야할지 모르겠지만, 그 부분의 껍질이 바스라지고 눈과 입구멍이 뚫렸다. 그 안으로는 온통 검었다. 그건 분명 나를 보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오르간 소리를 내면서 웃고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억지로 충격을 주어서라도 깨어났을텐데, 당시에는 도무지 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직까지 그 순간이 생생하다. 눈앞의 그것이 나를 보며 검은 구멍을 드러내고 입꼬리를 올려가며 미친듯이 웃고 있었다. 앞서 가버린 아이를 부르려고 했는데, 너무 두려워서 그런지 몸이 고장이라도 난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입술을 떼기도 어려웠다. 어떻게 무엇을 해야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Rupert 7/31/2021 (토) 03:06:58 #10309191


뭔진 모르지만 굉장히 이상한 꿈을 꾼 모양인데. 그 상황에서 깼나? 아니면 뭔가 다른 행동을 했나?

Caliope 7/31/2021 (토) 03:09:11 #10309191


몰라. 나는… 웃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입구멍 너머로 검은 어둠만이 보이는 그 나무를 앞에 두고,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한채로 필사적으로 웃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웃었다. 그냥, 그냥 그래야만 한다는 강박에 휩싸여서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고 하, 하하하, 아하하하하, 하면서 쇳소리를 내면서 웃으려고 애를 썼다.

날 내려다보던 그 나무도, 한참동안이나 내가 웃는 모습을 보고, 웃었다. 나처럼 소리를 내서 웃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를 내려다보면서 그 눈과 입꼬리를 더욱 기괴하게 비틀어올렸다. 비웃음을 퍼붓고 있는 그 나무를 보며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꼬리를 내리지 않으려고 발악을 했다. 나는 웃는게 목적이 아니었다. 내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그 나무에게 보여주는 것만이 내 목적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에 와서는 떠오르지 않는다.

돌연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내 손을 뿌리치고 달려간 아이가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문득 뒤에서 '그래, 이제 너는 가도 돼'라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웅얼거리듯이 낮은 소리였는데, 한순간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목마로 향했던 그 여자의 목소리랑 비슷했다.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그 아이한테 달려가려고 했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형, 이라고 외치면서 헐떡거리며 잠에서 깼다. 그 덕분에 아직까지 잠들지 못하고 있다.

Caliope 7/31/2021 (토) 03:11:41 #10309191


더위 때문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아직 그 꿈에서 헤어나오질 못해서 다시 잠들지 못하고 있다. 쓸데없는 질문들이 자꾸만 떠올라서 잠들 수가 없다. 고작 꿈일 뿐인데.

왜 나는 그 아이들을 형, 누나라고 불렀을까. 나는 왜 그리도 필사적으로 웃었을까.

만약 내가 그 회전목마에 올라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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