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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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카일리가 서류뭉치를 툭 던지며 쏘아붙였다. 표지에는 '보안인가등급-4등급'이라는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책상에 앉아있던 남자는 카일리를 향해 대놓고 못 볼 것을 봤다는 눈빛을 보내며 표정을 잔뜩 구긴 채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농장으로 전근 갔다더니, 이 일 때문에 간 거 아니었습니까?"

"뭐? 내가? 하! 이 미친 짓거리를 막으려고 간 거다 이 비겁한 새끼야!"

카일리가 가방에서 새 서류뭉치를 꺼내 남자의 얼굴에 내던지며 신경질을 냈다.

"너 정말 나한테 무관심하구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구만?"

남자는 널브러진 서류를 정리하며 나지막하게 대꾸하며 빈정거렸다.

"제가 재단의 그 누구보다도 연구원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안다고 확신합니다. 이 일이 아무리 미쳤어도 당신만큼이나 정신 나간 일은 아닙…"

갑자기 들려오는 폭발하는 듯한 소리에 그는 말을 멈추고 카일리의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상에… 이건 또 무슨 참신한 미친 짓입니까?"

카일리가 매고 온 배낭에서 담쟁이처럼 보이는 거대한 덩굴 뭉치가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관리자님. 어디 처박혀계신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사무실로 튀어오세요. 태평양 쪽 기지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온실 스피커에서 주무계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모른 척하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이번에 할당받은 연구 과제가 너무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바람에 제때에 처리하지 못한 농장일이 너무 많았고, 적어도 오늘만큼은 아이들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다른 기지가 공격받는다고 농사꾼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을 텐데 가 봤자 무엇하리.

"지금 무슨 생각하시는지 다 알아요. 그런데 보고서를 보면 우리 일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 맙소사. 용의자가… 카일리라고?"

나는 삽을 내팽개치고 황급히 온실에서 빠져나와 사무실로 달려갔다.


"내놔."

카일리가 목소리를 깔고 차갑게 말했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머리에 가까워지는 담쟁이덩굴을 바라보는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내놔."

남자가 같은 말을 반복하는 카일리에게 같은 대답을 하려는 찰나, 갑자기 한 군인이 뛰쳐들어왔다.

"소령님! 지금 기지 곳곳에서…"

카일리가 고개를 돌려 싸늘한 눈빛으로 군인을 노려보았다. 군인이 허공에서 흔들거리는 덩굴을 보고서 더듬거리며 겨우 말을 이었다.

"…저, 저, 저, 저런 것들이 가까이 가는 대, 대원들을…"

"제삼자는 꺼져."

카일리가 억양 없이 말하며 고개를 까딱이자 덩굴이 그대로 군인의 머리를 빠르게 휘감에 몸에서 뽑아내버렸다. 이 모습을 지켜본 사무실의 주인은 그저 조용히 침을 삼킬 뿐이었다.

"자, 고든 소령님. 저 불쌍한 새끼랑 같은 꼴 당하기 싫으시거든 제가 드린 것들 모두 얌전히 내어놓으시와요."

"여기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책상 위로는 이름 모를 군인의 피가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고든 소령은 옷을 고쳐 입는 척하며 주머니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눈치 챈 카일리가 씨익 웃으며 덩굴 하나를 흔들거렸다. 끝자락에는 권총 한 자루가 달려있었다. 그가 항상 지니고 다니던 M1911이었다. 소령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미 시험을 위해 입실론-23쪽에 넘겼습니다."

"내놔라고."

카일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덩굴이 고든 소령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거의 턱에 닿을 듯했다.

"그거 알아? 난 널 정말로 사랑했어. 넌 나에게 무관심했지만, 난 너에게 굉장히 많은 관심을 줬고, 너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어. 예를 들어, 너는 지금 이걸 찾고 있다는 거?"

카일리가 고든 소령의 책상 위에 걸터앉으며 말을 이었다. 옆 방향으로 스멀스멀 기어온 덩쿨 한 줄기는 책상 안쪽에서 꺼낸 산탄총을 휘어감고 소령을 놀리듯 흔들리고 있었다.

"또 있어. 우리 만날 때 네가 거짓말하는지 보려고 계속 모른척했는데, 넌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못해. 거짓말을 할 때만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네, 연구원님.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돌려드리지 않을 겁니다. 저희는 O5 평의회에서 직접 내린 지시로 입실론-23과 함께 연구했던 겁니다. 지금의 행동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건 너무 과격한 것 아닙니까? 지금이라도 그만두시면 기억소거, 재사회화 및 가벼운 강등만으로 사건을 종결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미소를 띤 채 카일리가 책상 위로 고든 소령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담쟁이의 덩굴은 여전히 그의 몸 주변에서 닿을 듯 말듯 흔들리고 있었다. 어느새 카일리는 고든 소량의 뺨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어머. 딱딱하게 연구원님이 뭐야. 예전처럼 귀엽게 누나 해봐 누나."

"군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그런 낯간지러운 말은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이만 돌아가시겠습니까?"

"하긴. 날 이용해먹으려고 접근한 거였을 텐데 지금 와서 살갑게 대해 주고 싶진 않겠지."

카일리가 책상 아래쪽에서 덩굴 하나를 에서 뛰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있잖아, 내가 차이면서 너에게 집착이 어쩌고저쩌고하는 말을 듣고서는 그대로 믿었다? 그래서 내가 혼자서 정말 많이 울고 고민도 많이 했거든? 그런데 이 비겁한 새끼야! 그 와중에 내가 이딴 서류를 찾아냈으니, 열 안받게 생겼냐고!"


"관리자님. 태평양 쪽에서 이런 자료를 보내왔습니다."

주무계장이 나에게 서류를 건넸다. PW-Γ531-E 계획이라는 제목이었다.

PW-Γ531-E 계획은 변칙성 식물 무기화 계획이었다. 정신에 영향을 주는 변칙성 식물은 온 세상에 널려있었고, 인간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식물을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풀이나 나무를 무기라고 의심할 적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정신력으로 작동하는 식물 모양의 무기는 아주 매력적인 제안 같았다. 하지만 SCP-197은 재단에 큰 교훈을 남겼다. 식물과의 의사소통으로 식물은 인간보다 훨씬 강한 정신력을 가졌다는 것이 알려졌다. 문제는 식물의 '정신'이 동물의 정신과 달랐다는 것이다. 정신을 억제하여 인간이 다를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실패만을 거듭하며 결국 사건 197-a644와 같은 비극만을 남겼다.

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윤리위원회에서는 허락하지 않았고, PW-Γ531-E 계획은 그대로 무산되는 듯했다.


"…다른 건 몰라도, 오해는 풀도록 합시다. 전 연구원님을 이용하려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닙니다. 엔터프라이즈호를 걸고 맹세컨대, 저는 진심이었습니다."

고든 소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는 덩굴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이 곤란하다는 듯이 사무용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카일리는 뜬금없고 유치한 소령의 맹세에 웃음이 나와 잠시간 고개를 숙여 큭큭거렸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소령은 재빨리 펜 하나를 소매 속에 숨겼다.

"여전하네. 이 상황에 그런 헛소리가 나오냐? 진짜 마지막으로 묻는다. 표본은 어디다 처박아놨냐? 이번에도 대답 안 하면 머리를 뽑아다가 네 녀석 뇌에서 직접 정보를 추출해버리는 수가 있어."

다시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온 카일리가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는 수 없지."

카일리의 눈이 살짝 흔들렸지만 그 손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에서 흔들거리던 넝쿨들이 고든 소령의 머리를 휘감으려는 찰나, 소령이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말했잖습니까. 저도 진심이었다고. 나도 누나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 잘 알아서, 어떻게 해야 잠시 시선을 돌릴 수 있을지도 알고 있었어. 누나야 말로 여전하네. 유치한 거 정말 좋아하는구나."

소매 속에 숨겼던 펜 모양을 한 단발 권총이 어느새 카일리의 머리를 향하고 있었고 미간에 구멍이 뚫린 카일리가 털썩 쓰러지자 사무실에서 흔들리던 담쟁이들은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끓는 물에 살짝 데친 나물마냥 힘없이 축 늘어졌다.


"관리자님― 방― 새로― 보고가― 들어왔― 구역― 소령― 용의자를―"

바다 위 헬리콥터 안에서 보고서를 읽고 있는 나에게 주무계장이 외쳤다. 소음 때문에 제대로 들을 순 없었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헤드셋을 두들기며 통신기를 통해 말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주무계장은 그제야 마이크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말을 이었다.

"고든 소령님께서 용의자를… 크흠. 사살했다고…"

"말도 안 돼! 어떻게?!"

나는 적잖이 당황하여 보고서를 아무렇게나 대충 집어 던지며 말했다. 주무계장은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 관리자님? 두 분께서 각별한 사이라는 것은 저도 알지만, 소령님께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무직의 쓸모없는 위로 같은 것을 끝까지 들어 줄 여유는 없었다.

"젠장, 그런 문제가 아니야. 태평양 기지 쪽에 연락해서 절대로, 절대로 카일리가 기지를 공격할 때 사용한 식물체를 소각하면 안 된다고 전해. 내가 도착할 때까지 아무것도 건들지 말라고도 전하고. 빌어먹을. 일 더럽게 꼬이네."


"거 참, 더럽게도 많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이런 걸 만든 거야?"
"놈이 아니라 년이라던데."
"엉망이로군."

군인들이 투덜거리며 덩굴을 한 곳으로 모으고 있었다. 그들은 마지막 담쟁이의 파편을 밀어 넣고 소각장의 문을 닫아 소각로를 가동하려 했다. 하지만 컴퓨터의 모니터에는 켜지지 않았고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신호가 들어가지 않았다.

"이병 마오위 시엔 보고드립니다, 중위님, 소각로가 먹통입니다. 중앙 처리 장치에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고든 소령이 한숨을 쉬며 무기 개발 부서에서 비상시 사용하도록,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았지만 사실상 자살용으로 쓰도록 지급된 펜 모양의 단발 총기를 대충 집어 던지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카일리를 내려다보았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과 이런 식으로 재회하고 또 그런 사람을 이런 식으로 떠나보내는 것은 뼛속까지 군인이었던 소령에게도 정신으로 큰 부담을 주었다.

"소령님. 주요 구역의 지뢰는 모두 수거했습니다. 하지만 기지가 공격받으면서 중앙 처리 장치가 손상이 심해 소령님께서 직접 원격 제어로 가동해야 할 것 같은데, 사무실 쪽 사정은 좀 괜찮습니까?"

소령이 목이 뽑힌 군인의 인식표를 수거하고 직접 시신을 수습하던 중 무전이 들려왔다.

"고마워 중위. 소각로는 내가 알아서 가동하지. 나머지 구역에서도 계속 수고해 줘.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개체가 섞여 있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고."

조슈아 세이건 병장의 이름을 확인한 소령은 관리자용 단말기를 꺼내 기지 관리 인터페이스를 열어 소각장의 가동 상태를 살펴보았다. 1호, 3호, 4호, 7호 소각장이 준비되어 그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각로를 가동하려는 찰나, 지원을 요청했던 하사드 쪽에서 통신이 들어왔다. 그가 카일리를 얼마나 아꼈는지 잘 알고 있던 소령은 늙어빠진 젊은이의 잔소리를 이겨낼 자신이 없어 음소거를 하고서 사무실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다시 소각로 창을 띄워 아무 생각 없이 버튼을 눌렀다. 등받이에 기대어 얼굴을 위로 향한 채 생각에 잠긴 소령은 소각로를 가동함과 거의 동시에 카일리가 매고 온 배낭이 꿈틀거리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관리자님. 소령 측에서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많이 다쳤나 본데요. 어디로 연락해서 말을 전하죠?"

주무계장이 다급하게 말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태평양 기지의 대원들은 아주 유능하니 지금쯤이면 소각이 시작됐을 테고 그렇다면 이미 늦은 것이다.


"병장님, 제가 식물에 대해선 일자무식이라 그런데, 혹시 담쟁이를 태우면 원래 폭발하는듯한 소리가 나는 겁니까?"
"멍청아. 기지가 쑥대밭이 됐는데 소각로가 잘못돼서 뭐가 터지는 거겠지."
"방금 시스템이 복구됐는데, 연료 주입도 정상적인 데다가 터지는 소리는 소각로 바로 안쪽에서 나고 있습니다."
"뭐라고? 비켜봐.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

병장이 뭔가를 확인하려고 소각로 문으로 다가가는 순간, 갑자기 큰 소음과 함께 불이 붙은 덩굴이 문을 부수며 튀어나와 병장을 휘감았다. 소각로 안의 담쟁이들은 불이 붙기 전보다 훨씬 커지고 수도 많아진 것처럼 보였다. 몸에 불이 옮겨붙은 병장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고 남은 대원들은 재빨리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곧바로 따라 튀어나온 다른 덩굴들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소각로 문에서 튀어나온 덩굴은 허공을 빙빙 돌며 잎에서 연한 갈색의 가루를 사방으로 뿌려댔다.


고든 소령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카일리가 쓰러지면서 당연히 무력화됐으리라 생각했던 덩굴이 갑자기 커지면서 목적지 없이 제멋대로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휘감을 수 있는 것과 닿이면 눈에 보일 만큼 빠른 속도로 천천히 감아 올라가고 벽에 닿인 덩굴은 벽을 타고 기었다. 소령은 아직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덩굴을 피해 황급히 사무실을 빠져나오며 단말기의 소리를 켰다.

"하사드 관리자님? 들립니까? 고든 소령입니다."

소령은 복도에 서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담쟁이를 계속 주시하면서 하사드를 불렀다.


"관리자님. 고든 소령님이십니다."

주무계장이 나에게 단말기를 건넸다. 나는 읽던 보고서를 좌석 한쪽으로 치우고 단말기를 받아들여 나의 헤드셋에 설정을 맞추었다.

"여. 오랜만입니다 소령님. 아까는 바쁘셨나 봐요?"

"젠장, 지뢰에 저런 기능도 있었습니까? 갑자기 엄청나게 자라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저거 지금 포자를 뿌리는 겁니까? 담쟁이가 포자로 번식하는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방금 연락한 것도 그래서 그런 거였죠. 이미 늦었나 봅니다. 그 지뢰라는 것들, 태우셨죠?"

"아니 그럼 그 많은 걸 어떻게 처리합니까? 반찬이라도 해 먹으란 겁니까?"

소령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게, 옛날에 12구역에서 만들었던 지뢰랑은 좀 많이 다른 물건인데, 사실 총알에 더 가깝죠. SCP-199의 유전자를 쓴 건데, 불붙이면 말 그대로 좆됩니다.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킬 순 있지만 불이 붙으면 다시 활성화되죠."

"그런데 제가 왜 몰랐습니까? 그런 걸 몰래 개발하고 게셨단 겁니까?"

"서류 읽는 걸 굉장히 싫어하시나봅니다? 일전에 저와 윤리위원회가 막았던 '악마의 정원' 계획 아시죠?"

"하. 어련하시겠습니까. 잠깐만. 그런데 총알이라셨습니까? 아니, 저딴 게 총알이면 대체 빌어먹을 총은 뭡니까?"

"총은 이미 보셨을 겁니다. 소령님 사무실에 직접 걸어 들어가서 깽판 쳤잖아요."


"총은 이미 보셨을 겁니다. 소령님 사무실에 직접 걸어 들어가서 깽판 쳤잖아요. 그리고…"

하사드의 말과 동시에 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든 소령의 사무실 벽이었다. 자리를 뜨려고 했던 그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미친,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령은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무전기에서는 하사드의 말이 계속 흘러나왔다.

"…지금쯤이면 총도 수리가 끝나가겠군요."

미간의 구멍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무너진 벽을 넘어 천천히 걸어 나온 카일리가 그 어느 때보다 싸늘하고 매서운 눈빛으로 고든 소령을 노려보고 있었다.


고든 소령은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덩굴 한 덩어리를 주머니칼로 힘겹게 겨우 끊어내었다. 아직 힘을 다 찾지 못했는지 카일리는 힘겹게 걸어 나오며 날 선 억양으로 말했다.

"무슨 괴물 보듯이 보네? 너희가 만들려고 하던 게 이런 거잖아."

"소령님? 혹시 악마의 정원 계획을 모르시는 겁니까?"

"저희는 그냥 사소한 장비 몇 가지를 연구했을 뿐입니다. 악마의 정원이 뭔지 알 게 뭡니까!"

소령이 총을 꺼내들고 카일리를 겨누며 말했다.

"거기 선배에요? 저도 저 새끼한테 표본을 넘겨줄 때 그렇다고 생각했죠. 아, 부하를 소중히 생각하는 훌륭한 상관이구나. 그런데 12구역, 입실론-23, 카이-17의 주도로 악마의 정원 계획이 다시 가동되었다는 문서가 있더라니까요."

카일리가 평소의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일리의 미간에 있던 상처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고 다시 한 번 소령이 쏜 총알이 이마를 관통했다. 하지만 잠시 총알의 힘에 뒤로 밀려날 뿐, 카일리는 쓰러지지 않았다. 다리를 노리고 여러 번 격발했지만 총에 맞는 순간 잠시 휘청일 뿐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야 이 새끼야. 누나 이야기 하는 거 안보이냐? 어디다 대고 총질이야?"

"관리자님, FM에선 머리에 총알을 박아도 움직이는 괴물이 절 죽이려들면 사지를 절단하라던데, 그것도 안 통할 것 같습니다.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누나 누나하면서 따라다닐 땐 언제고, 이제 헤어졌다고 막말하는 거 좀 봐라."

"소령님, 일단 어떻게든 튀세요. 소각로가 작동하고 있는 한 절대 못 막아요. 그리고 악마의 정원이 다시 가동되었다니 무슨 소립니까?"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선배, 저 새끼 연기하는 거에요. 벌써 입실론-23 쪽은 알아보고 왔다고요."

"바로 그겁니다! 카이-17은 기능을 제안하고 현장검증을 할 뿐이란 말입니다! 뒤집어엎으려면 입실론-23쪽으로 가야지, 왜 여기로 옵니까? 걔네들이 이상한 짓 한 걸로 괜히 저한테 불똥 튀는 거 아닙니까 이거?"

"아, 그게 제가 트랜스포존과 연계시킨 퍼지 마커와 터미네이터를 좀 써서 표본 복제나 분석이 불가능하거든요. 카이-17이 표본을 가지고 있다면, 입실론-23은 없는 겁니다."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입실론-23은 쓸모없는 데이터만 가지고 있어서 저 미친년이 여기로 꼬였다 그겁니까?"

"그래, 헤어질 때도 그랬지. 내 성격을 도무지 감당을 못하겠고 집착도 너무 심하다고. 이젠 노골적으로 미친년 미친년 하는구나?"

"어이, 신입. 지금 니가 하는 짓은 차여서 진상부리는 걸로밖에 안보여. 내가 저 군바리보다 훨씬 중요하고 높은 사람이니, 지금이라도 그만두면 좋게 좋게 해결하도록 도와줄게."

"아니 그러니까요 선배, 우리가 힘들게 겨우겨우 막아놓은 걸 저 새끼가 다시…"

세 명의 말이 정신없이 오갔다. 평생 군인으로 살아 온 고든 소령으로서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하사드의 어려운 설명과 상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 말하는 카일리때문에 복도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 와중에 카일리는 힘을 완전히 되찾은 듯 다시 주변의 덩굴을 빳빳이 세우고서 소령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악마의 정원 계획이 대체 뭐길래 신입이 저렇게 정신 나간 짓을 하는거에요?"

주무계장이 물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엉터리 논리지만, 기밀 처리된 것이 아니라 폐기하면서 말소된 정보이니 보안 상 문제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단말기 너머의 소령이 카일리를 막을 방법을 떠올릴지도 모르니, 이 참에 최대한 설명을 하는 것이 좋을 거라 판단한 나는 통신기를 켠 채 설명을 시작했다.

"아까 네가 준 PW-Γ531-E 계획. 악마의 정원이라 불리는 식물 무기화 사업이야. 그리 참신한 생각은 아니지만, 실전에서 누가 식물을 무기로 인식하겠어? 그 모태는 기지 방어용 함정을 만드는 계획이었지. PW-Γ512-E, 일명 푸른 문지기 계획. 지금도 실전 배치 중이야. 재단 기지 복도 곳곳에 놓인 화분이 깨지면서 뿌리가 노출되면 반경 500m 이내의 비인가 인원을 48시간 이상 마비시키는 포자낭이 터져. 기지나 구역마다 보안 코드도 달라서 재단 인원이라도 해당 구역에 출입 허가를 받지 않은 인원에게도 효과가 있지. 그동안 '운이 좋았던' 침입 사건이나 탈주 사건의 숨은 공신이야."

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말기 너머로 총성과 함께 도자기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48시간은 아니라도 시간은 좀 끌어줄 것이리라.

"악마의 정원 계획은 거기서 더 발전시킨, 자각이 있고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식물체를 만드는 계획이었어. 식물 무기는 많았지만, 쓰기가 까다로웠거든. 그래서 식물이 지성을 가지면 통제하기 쉬울 거라 생각했어. SCP-197은 식물에게 지성과 일종의 텔레파시 능력을 부여해. 우린 그 원리를 이해할 순 없었지만, 197에서 자란 식물체의 능력을 확대하는 데에 성공했고, 거리가 떨어지고도 대상과 직접적으로 이어질 수 있게 만들었지. SCP-401로 유전자 감응 체계를 만들면 무기 사용자만 그 식물체의 능력을 자신이 직접 쓸 수 있게 되는 거야.

하지만 약점이 있어. 일단, 흔히 식물이 무기란 것을 깨달으면, 그걸 태워버리려 할거야. 우리는 거기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어. SCP-199는 불에 엄청나게 반응하면서 타오르는 식물체야. 143을 비롯한 다양한 생명체의 내화성을 부여한다면, 불에 타지도 않고 그 폭발적인 반응성만 활용할 수 있게 되지. SCP-506의 폭발적인 적응력과 성장력이라면, 불이 붙었을 때 오히려 힘을 되찾는 몸체를 만들 수 있는 거야. 불이 붙으면, 더 강력해지는 거지.

통제당하는 식물체의 정신력은 굉장히 약해. 199의 흉내는 내고 범위는 넓혔지만, 어쨌든 불완전한 기술이란거지. 그래서 사용자가 없다면 평범한 식물처럼 얌전해져. 카일리와의 정신 감응을 끊기만 하면 돼."

단말기 너머로 고든 소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맙습니다, 관리자님. 일단 마비는 시켜놨는데, 어떻게 해야 저 담쟁이들과 카일리의 연결을 끊을 수 있습니까?"

나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전 주무계장에게 말 한건데 듣고 계셨나요. 뭐 대충 상황이 정리되는 것 같은데, 저도 거의 도착했습니다. 그 문제는 제가 직접 해결하도록 하죠."


"그러니까, 카일리는 처분되지 않을 것이라 그겁니까?"

고든 소령이 불만과 안도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미묘한 표정으로 하사드에게 물었다.

"네. 윤리위원회와 제가 악마의 정원 계획을 중단시킨 이유가 바로 그거죠. 식물체를 무기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정신력이 너무 강해, 통제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식물을 기르기로 했습니다. 카일리가 대학원생일 때부터 재단에 들어와서까지 7년 정도 관계를 가지셨다고 했죠? 이상한 거 못 느끼셨습니까? 좀처럼 나이를 먹지 않는다거나."

"부끄럽지만 카일리 연구원님 외에 여자를 만난 경험이 없습니다. 여자는 다 그렇게 관리를 잘 하거나 화장을 잘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별의 별 사람이 넘쳐나는 재단인데, 안 늙는 사람 몇 명 있는게 어디 대수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사랑한 사람이 식물이었다니. 허."

"카일리가 항상 들고 다니던 화분 아시죠? 사실 거기에 담긴 떡잎 세 개가 있는 새싹이 카일리입니다. 사람 몸은 401로 배양한 신체인데, 그 신체의 뇌가 폭력성을 분출한 것이니, 그렇지 않을 새로운 몸을 만들어주면 그만입니다. 카일리의 본체를 처분할 필요는 없죠. 사실, 카일리는 지극히 식물스러웠습니다. 성격이며 행동이며 모든 면에서요. 오늘 있었던 일도 굉장히 식물로서의 본성에 충실한 행동으로 보입니다. 인간으로서 자라면 식물의 본성이 자연히 묻힐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제 실수에요. 징계는 카일리가 아니라 제가 받게 될 겁니다."

"퇴직하면 농사나 지을까 생각하곤 했는데, 저도 농부가 되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령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식물스러움이라.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사건 197-a644를 아십니까? 담쟁이덩굴이 연구 중이던 다알리아 킹슬리 박사의 머리를 뽑아 화분에 심었습니다. 인간이 꽃을 보고 예뻐서 다른 화분에 옮겨심듯이요. 악의는 전혀 없었고, 그 담쟁이는 다알리아의 아버지가 분노한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걱정했습니다. 그 녀석이 말하길, 따님의 아름다움을 훌륭하게 지키며 잘 보살필테니 걱정하지 말라더군요. 그게 식물입니다."

"그만합시다. 더 어려워지기만 하고, 여전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농사로 노년을 보내신다니, 분명 무슨 말인지 깨달으실 겁니다." 하사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카일리는 재능 있는 농부였어요. 이 곳에 들어오고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죠. 아주 힘들어했고, 윤리위원회와 카일리와 전 악마의 정원 계획이 얼마나 위험하고 비도덕적인지를 설명하며 O5 평의회를 귀찮게 굴어 겨우 중단시켰습니다. 그런데 소령님. 이상하게 각종 변칙적인 식물체를 이용한 장비의 표본을 살펴보니, 인공지능 보조 코어나 유전자 감응 장치 같은 악마의 정원 계획에 쓰이던 것과 겹치는 것이 많더군요. 여기에 대해 설명 좀 해 주시겠습니까?"

"아, 정말 우연입니다. 제가 필요한 장비를 카일리 연구원님께 설명했더니, '농장에 이런 게 있어!'하면서 이것저것 챙겨주는 거 아니겠습니까. 전 그걸 입실론-23에 보내 장비를 요청했고, 그쪽에서는 도저히 연구를 진행할 수 없다며 표본을 반납했습니다. O5쪽에서는 차후 사업을 위해 관리를 똑바로 하라고 엄포를 놓길래, 열심히 표본을 지키고 있었고, 카일리가 거기서 오해를 했나봅니다."

"그래요, 좋아요. 소령님을 믿겠습니다. 카일리가 소령님을 믿었으니, 저도 믿어드려야죠. 얘가 199나 143로 만든 무기로 무장하지 않았던 게 다행입니다." 하사드가 카일리의 품에서 꺼낸 작은 화분을 챙기며 말했다. 떡잎이 하나 더 많을 뿐 평범해보이는 새싹이었다. "저기 사람의 몸은, 그냥 껍데기일 뿐이니 알아서 처리하세요. 연결이 끊겼으니, 담쟁이와 저 몸에는 불에 변칙적인 반응 없이 잘 타오를 겁니다."

"…믿어도 됩니까? 이거 크게 고생 했더니 불을 붙이기 무섭습니다." 소령이 씁쓸하게 말했다.

"태우기 싫으면 어디 매립장에 묻으시던가요. 그러면 그 자리에 싹이 날걸요. 소름끼칠 겁니다. 네, 그냥 태우세요. 그럼 수고하십쇼. 어휴, 기지가 개판이네. 당분간 바쁘시겠어요. 정리 다 되면 부르세요. 제가 한 잔 사죠."

하사드가 뒤돌아서서 헬기에 올랐다.


[표본은?]

소령의 단말기에 통신이 들어왔다. 발신자는 O5-6이었다. 소령은 카일리가 자신에게 던진 서류더미를 뒤적이며 말했다.

"확보했습니다. 기지에 중계기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표본간의 정신 감응이 끊겼다고 생각하고 그냥 떠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O5 씩이나 되면서 꼭 이렇게 몰래 해야 합니까?"

[어쩔 수 없어. 윤리위의 결정에 찬성하는 사람이 아홉이나 된다고.]

"그 촌놈이 이 문서를 못 본 게 다행이긴 한데, 실험체가 어떻게 이걸 찾아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실험체는 비교적 쉽게 얻었지만, 제 대원의 희생이 너무 큽니다. 이거 영 마음에 안 드는데."

[그래도 멀쩡하게 활동 중인 재단 인원을 표본으로서 확보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잖은가. 좋게 생각하게. 그럼 난 입실론-23쪽에 소식을 전하지. 계속 수고해주게나.]

"알겠습니다." 소령이 대답하며 통신을 종료했다.

소령은 씁쓸한 표정으로 카일리라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살덩어리를 내려다보았다. 하사드와 O5-6의 설명을 듣기 전 까지는 그저 무기화한 식물을 다루는 인간 병기를 만드는 계획으로만 알고 있던 소령은 이 여인이 계획의 첫 작품이자 피해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서 느껴지는 찜찜한 마음을 도무지 정리할 수가 없었다.

"젠장. 그래도 난 정말 진심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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