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거리는 열차는 오늘도 종착역을 찾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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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역은 고멘, 고멘역입니다. 1번 승강장에 도착한 열차는, [잡음]행 열차입니다. 승객 여러분은 안전을 위해 … ”

현지 시각으로 오전 6시,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는 회색조의 기차가 원래 왔어야 했을 열차 대신 역 안으로 들어왔다. 해당 기차의 차장 ‘니시키 이노리(錦祈)’는 어느덧 자신의 새 직장에도 꽤나 익숙해져 있었다. 수많은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바래다주는 일은 정말 보람찼고, 이 일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간 자신의 동생이 열차에 올라타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자그마한 희망도 품고 있었다.

이노리의 동생 '에무(永夢)'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년 전, 집에서 가출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가 이미 죽었을 것이라 이야기했지만, 이노리는 그 말들을 단지 바보들의 헛소리로 취급했다. 언젠가 동생이 자신을 용서하고, 집으로 가는 길을 찾아 자신에게 돌아오리라고, 이노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차장은 오늘의 첫 손님들을 한 명씩 좌석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승객의 표는 13A였다. 승객은 왼쪽 뒤의 좌석으로 인도되어 착석했다. 17C의 표를 내밀은 두 번째 승객은 첫 승객의 뒷자리에 앉게 되었다. 23D표의 세 번째 승객은 열차의 맨 앞자리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승객들을 한 명 한 명 안내하며 이노리는 무의식적으로 승객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훑고 있었다. 많고 많은 승객 중에 동생을 발견하려 노력하다가 들인 버릇이었다. 네 번째 승객은 인상은 비슷했으나 동생은 아니었다. 전에도 이 열차를 몇 번 탄 적이 있는 한 남학생이었다. 승객들을 관찰해 온 것도 어언 4년, 이노리는 이제 한 번 본 승객 얼굴은 반드시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다섯 번째 승객 또한 이미 탑승한 적이 있는 한 학생이었다. 이노리는 얼굴이 어디가 바뀌었는지만 빠르게 외우곤 다음 승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유감스럽게도, 여섯 번째 승객 역시 동생이 아니었다. 새로운 승객이긴 했지만, 절대로 동생일 리가 없는 호호백발의 할멈이었다.

이노리는 잠시 뒤에 서 있는 손님들을 쭉 둘러보았다. 첫눈에 보았을 때 동생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4년이나 지났으니 생긴 게 좀 달라질 수도 있는 법이었다. 그러기에 이노리는 승객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판단하기로 했다.

열네 번째 승객은 먹성이 좋아보이는 여자 아이였다. 열일곱 번째 승객은 후덕한 얼굴의 중년 남성이었다. 스물여섯 번째 승객은 얼굴에 피곤한 듯한 기색이 역력한 고등학생이었다. 마지막 승객까지 이미 안내했지만 에무는 커녕 비슷해 보이는 사람조차 한 명 없었다. 자신들의 표와는 전혀 다른 자리에 앉은 각 승객은 차장의 초조함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창 밖의 풍경을 감상하거나, 책이나 핸드폰을 꺼내 각자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노리는 문밖으로 머리를 빼꼼 내밀어 주변을 대략 훑어봤다. 열차에 타려는 사람은 더 보이지 않았다. 4년 동안 매일 이 일을 반복했으나 매번 허탕이었다. “역시 찾아올 리가 없지, 이렇게나 못난 형인데.” 차장은 조용히 한숨을 쉬며 슬슬 운전석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서히 발걸음을 뗐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저 멀리서 한 남자가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뛰어왔다. 현재 시각은 6시 7분. 열차는 6시 10분에 출발하니 사실 그에겐 아직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인지 빨간불에 길을 건너면서까지 허겁지겁 뛰어왔다.

이노리는 눈길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옮겨가며 찬찬히 이번 역의 마지막 승객을 관찰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걸음걸이로 봐선 새로운 승객인게 분명했다. 짙은 녹색과 빨간색의 짝짝이 양말을 신고 있었고, 날씨와 맞지 않는 긴소매 차림이었다. 작은 체구의 몸에는 곳곳에 옷으로 감추려 하는 듯한 흉터가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어째 이와는 맞지 않는 밝고 천진난만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어느새 이노리의 시선은 얼굴까지 올라왔다. 거기엔 놀랍게도 동생의 얼굴이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던 앳된 얼굴과는 좀 달랐고, 군데군데 상처를 가리기 위한 듯한 성형 수술 흔적이 있었지만, 분명히 동생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며, 이노리는 표를 향해 시선을 향했다. ‘에무’라는 두 글자가 표에 선명히 박혀있었다.

“저기, 차장?” 탑승객의 두 마디가 멍해진 차장을 깨웠다. “에무, 앉는 곳, 어디가 좋을까?”

말투는 어딘가 특이해졌지만, 아직도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듯한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탑승객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이노리의 마음에 걸렸다. 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곤 해도, 기본적인 얼굴형이나 인상은 유지되었을 테고, 제복엔 이름표까지 떡하니 박혀있는데도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동생의 얼굴을 쏙 빼닮은 이 남자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멍때리느라… 이쪽에 앉으시면 되겠습니다.” 이노리는 승객에게 불편을 끼친 것에 대해 속으로 자책하며 승객을 안내했다. “그런데 실례합니다만, 혹시 절 알아보시겠나요? 제가 옛날에 알던 분이랑 되게 닮게 생기셔서 그래요. 이름도 같고요”

“어… 미안, 잘 못 알아보겠어. 에무, 어렸을 때 기억 별로 없어. 근데 어딘가 인상이 익숙한 것 같긴 해.” 승객의 대답은 이노리에게 실망스러웠다.

“혹시 성씨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사토인데, 옛날엔 달랐어. 사정이 좀 있어서 바뀌었어. 전 성씨는 잘 기억 안 나”

“… 알겠습니다. 대답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차장은 운전석으로 들어갔고, 열차는 덜컹거리며 역을 떠났다.

열차를 운전하는 내내, 이노리의 머릿속은 저 수수께끼의 남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얼굴, 체격, 목소리 등 수많은 점이 저 승객의 신원이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람이라는 결론을 시사하는 듯했다. 흉터가 좀, 아니 좀 많이 있다는 점이나 말투가 다르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건 세월이 흐르며 바뀔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저자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었을까? 자신도 한눈에 동생을 알아봤는데 하물며 옛날부터 얼굴이 한결같다는 소리를 들어온 자신의 얼굴을 동생이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설마 일부러 못 알아보는 척을 한 것인가? 동생이 아직도 자신을 용서하지 않은 걸까? 이노리의 머릿속은 새롭게 떠오른 가설에 의해서 혼란스러워졌다.

‘아니야, “용서하지 않았다” 말고 다른 이유일 수도 있어’ 이노리는 침착히 생각을 재개했다. 어쩌면 동생이 진짜로 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은 매일매일 동생만을 찾아 헤맸으니 한눈에 알아봤지만, 동생은 이미 찾는 것을 체념했거나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상태일 수도 있다. 좀 더 울적한 다른 결론은, 저 사람은 그저 좀 닮게 생긴 동명이인이란 것이다. 일본 전역에 ‘에무’가 수천수백 명은 될 텐데 그중에 얼굴이 좀 닮은 사람이 몇 명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다. 무엇보다 저 사람은 성도 다르고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도 못하는 눈치였다. 동생이 기억상실증이라도 세게 온 게 아닌 이상 저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 아무래도 내가 착각했나 보다. 하긴,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나 다름없는데, 이렇게나 쉽게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이노리는 생각을 돌리려고 주머니에서 졸음 방지용 껌을 꺼내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이노리의 머릿속에는 저자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한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기차는 얼마 안 있어 정차했다. 이노리는 내리는 손님들을 배웅하고, 새로 올라탄 손님들을 좌석으로 안내했다. 승객들을 바래다줄 때, 의도적으로 새로 탄 사람들을 에무와 다른 칸으로 보냈다. 일을 끝낸 후, 이노리에겐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험할 7분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다. 에무와 같은 칸에 남은 승객들은 두세 명뿐이었고, 그 사람들도 멀찍이 떨어져서 자신들의 일을 하고 있었다. 완벽한 조건이었다.

“저기요, 손님? 곧 차내식이 제공될 예정인데, 혹시 알레르기나 못 먹는 음식이 있다면 여기 빨간 칸에 적어 주세요" 이노리는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아, 오키, 지금 당장 쓸게” 에무는 별다른 의심 없이 종이와 펜을 잡아 들고 종이에 글씨를 끄적였다.

이노리는 승객의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동생이 주로 쓰던 손은 오른손. 승객 또한 오른손으로 펜을 잡아 오른손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은 오른손잡이의 비율이 90% 가까이 되니 큰 의미는 없지만 최소한 동생이 아니라는 증거는 아니었다.

이노리는 눈을 승객의 얼굴 쪽으로 돌려 표정 변화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노리가 한 말 중에 차내식과 알레르기 조사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빨간 칸이라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종이에는 검은색과 초록색밖에 없었다. 만약 저 승객이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동생처럼 적록 색맹이란 뜻일 것이고, 그렇다면 저 짝짝이 양말도 설명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탑승객은 이상한 점을 알아보지 못 하고 글씨를 적어 내려갔다. “우유 알레르기”. 동생과 같았다.

오른손잡이의 비율은 90%. 적록색맹의 비율은 남성 기준 약 5~8%. 우유 알레르기의 비율은 잘 알진 못했지만 그렇게 높진 않으리라. 거기다가 이름과 생김새까지 고려하면 저자는 동생일 수밖에 없다. 이노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노리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에무, 다 썼어.” 에무는 종이를 다 채우고선 해맑은 표정으로 차장에게 건네주었다. 에무는 사람 생각을 확실히 못 읽는 모양이었다.

“고맙습니다, 손님. 그런데, 혹시 어렸을 때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서 오른쪽 팔뚝을 꿰맨 적이 있지 않나요?” 이노리는 종이를 집어들고선 승객에게 물었다.

“어, 이미 말한 것처럼 어릴 적 기억은 거의 없어. 근데 에무 팔뚝에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안 나는 흉터가 하나 있긴해. 근데 어떻게 알았어?”

“에무라는 이름, 중성스러운 얼굴, 작은 체격, 오른손잡이, 우유 알레르기, 그리고 적록 색맹. 제가 예전에 알던 사람이랑 놀라운 정도로 닮아서요. 정말 저를 못 알아보시겠나요?” 이노리는 마치 탐정 같은 투로 캐물었다.

“어… 미안, 아까도 말했듯이 전혀 못 알아보겠어.” 손님은 당황스럽다는 투로 전의 대답을 반복했다. 드디어 해답에 도달했다 생각한 이노리에게 이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네? 아니 그렇게나 닮았는데… 어렸을 땐 나라현에 살았고, 제일 자신 있던 과목은 사회, 좋아하던 책은 해리 포터가 아닌가요? 저예요 저, 니시키 이노리라고요. 뭐라도 짚이는 거 없나요?”

“그, 에무, 해리 포터 좋아하긴 해. 근데 다른 건 잘 모르겠어. 이름에서 짚이는 건 없어.”

“제발요. 제 눈을 바라봐주세요. 그 오랜 세월을 함께했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절박해진 이노리는 어느새 애원하며 비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니, 정말로 모르겠다니까?” 승객은 되풀이되는 질문에 다소 짜증이 난 듯했다.

“어떻게! 난 이렇게나 열심히 찾아 헤맸는데! 못 알아볼 수가 있냐고!”

“그… 정말 미안. 전혀 기억나질 않아. 에무, 화장실 좀 잠깐 갔다올게.” 살짝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을 한 승객은 자리에서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칸 밖으로 나섰다. 이노리는 그런 승객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남자는 정직하게 열차 내를 걸어가, 화장실 입구가 있는 통로로 들어갔다. 그 후 통로 문을 닫고는, 몇 걸음 더 움직였다. 소리를 들어선 화장실 반대쪽을 향해서였다. 이노리는 즉시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손님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노리는 열차 밖으로 뛰어나왔다. 승객의 발자국을 따라 걸음을 옮겨봤으나 그는 이미 멀리 사라진 후였다. 순간, 이노리의 머릿속에 자신이 방금 한 일에 대한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내가 대체 무슨 일을 한 거지?" 이노리는 생각했다. 만약 동생이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이었다면 이걸로 동생의 마음은 완전히 떠나버렸으리라. 만약 동생이 아니고 자신이 다른 사람을 착각한 것이었어도, 이는 자신이 무고한 승객에게 목소리를 높이며 추궁했다는 뜻이었다. ‘난 차장 실격이야. 아무리 감정이 격해졌다 해도, 승객에게, 아니, 그 누구에게라도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이노리는 이렇게 생각하며 털썩 주저앉았다. 털썩? 아니, 그 소리는 ‘털썩’이라기보단 ‘텁'에 가까웠다. 이노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땅을 쿡 찔러봤다. 손가락에 느껴진 질감은 흙바닥도, 콘크리트도 아니었다. 손끝엔 사람 피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더 이상 일반적인 역이 아니었다. 이곳은 어느새 뒤틀린 외부 차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토양은 기괴한 질감이었고, 사방에서 불쾌한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거대한 기형종이 자리 잡고 있었고, 제대로 된 생명체는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확신할 순 없었지만, 저 멀리 자신을 닮은 시체도 몇 구 놓여있는 듯했다. 이노리는 이차원에 대해선 잘 몰랐지만, 최소한 이런 불안정한 차원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점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열차를 타고 이곳으로 왔으니 열차를 통해 다시 나갈 수 있을 테지만, 승객이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곳에 고립돼버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를 데려오느라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된다면, 뒤에서 들어오는 열차에 의해 대형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제기랄!” 이노리는 서둘러 열차 안으로 들어가, 출발 시간이 지체되었다는 거짓 공고를 올린 후, 승객을 찾기 위해 뛰쳐나갔다. 무고한 사람을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끔찍한 최후를 맞게 하는 것은 분명 옳지 않은 일이리라. 열차가 지금까지 정차한 시간은 4분, 열차 간의 주기는 약 9분. 열차의 능력으로 출발을 두 번 정도 지연한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30분 정도였다. 주변에 자전거를 빌릴 수 있는 곳이 있을 테니 그걸 이용하면 금세 저자를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살점으로 이루어진 토양 위엔 빨갛게 발자국이 파여 있었다. 발자국들이 승객의 이동 경로를 보여주었지만, 흙바닥 위의 자국과는 달리 금세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이노리는 자전거 대여소로 서둘러 뛰어갔다. 방향이 발자국과 반대쪽이었기에 이노리의 마음은 조급해지었다. 대여소에 도착하자, 이노리는 길가의 짱돌을 하나 쥐어 들곤, 자물쇠를 내리쳐 박살 냈다. 어차피 이 공간엔 사람이란 없는 듯했으니 주인이 찾으러 올 일도 없으리라. 이노리는 자전거에 올라타, 페달을 열심히 밟기 시작했다. 자전거 좌석 높이가 영 편하진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시간이 없었다. 자국이 사라지기 전에 어서 승객을 따라잡아야 했다.

역을 벗어나면서 기현상이 점점 더 심해져 갔다. 거리 곳곳엔 자기자신의 시체가 놓여있었고, 자신을 탓하는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맘만 같아서는 귀마개라도 쓰고 싶었지만, 승객의 인기척이라도 듣기 위해선 그럴 수도 없었다. 이노리는 페달을 밟아가며 발자국을 조심히 관찰했다. 발자국은 앞부분만 보였고, 점점 더 띄엄띄엄 있었다. 발자국의 주인이 뛰어가고 있었다는 뜻이다. 드문드문 보이는 거대한 기형종이나 시체 때문에 놀라 도망간 것이 아닐까, 하고 이노리는 생각했다.

골목에 다다르자 발자국이 잠깐 좁아지더니, 골목길 사이로 사라졌다. 자전거를 타는 게 서투른 이노리는 잠시 정차한 후 이어서 쫓아가기 시작했다. 이노리는 발자국들을 응시하다가, 어딘가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 발자국이 이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발의 크기나 형태는 거의 똑같았으나, 간격이 어딘가 이상했다. 발자국의 간격이 줄었다 늘었다 했는데, 멈췄다 뛰었다 멈췄다 뛰기를 반복한 게 아닌 이상, 이런 모양으로 나타날 이유는 없었다. 이노리는 발자국을 더 잘 관찰하기 위해 속도를 잠시 줄였다. 자세히 보니 발자국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대략 ⅓ 정도의 발자국은 뒤꿈치를 들고 뛰어가는 전부터 있었던 발자국이었다. 발자국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고 있는 걸 봐선 지쳐서 속도가 줄어든 듯 했다. 하지만, 나머지 ⅔는 좀 더 성큼성큼 걷는 듯 했고, 간격도 뛰어가는 발자국에 비해 더 좁았다. 아주 미묘한 차이였다. 그리고, 딱 한 사람이 혼자서 이렇게 걸어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됐다.

속도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곧 승객을 찾을 수 있으리란 뜻이겠지만, 또 다른 발자국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이곳에 사람은 나와 저 승객밖에 없을 텐데 어떻게 또다른 흔적이 있을 수 있는 거지?" 이따금씩 다양한 신체 부위로 이루어진 거대한 살덩어리들이 보이긴했지만, 대체로 어딘가에 속박되어 있고 이리 정교한 걸음을 흉내낼 순 없어 보였다. 게다가 기형종들의 형태는 대개 심하게 뒤틀려있고 원 부위의 모습과 판이한데, 이 경우엔 두 발자국의 모양이 거의 똑같은 이유 또한 불명이었다. “이 기분 나쁜 차원엔 아직도 내가 모르는 게 넘쳐나나 보군." 이노리는 이런저런 가설을 생각하며 페달에 박차를 가했다.

끼이익! 쾅!

갑자기 자전거가 급정거했고, 이노리는 그대로 자전거와 함께 뒤집혀 날아갔다. “으…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노리는 아픈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천천히 일어섰다. 건물 벽에 붙은 살덩어리가 자전거의 뒷바퀴를 따라 감싸며 올라가고 있었다. 이노리는 근처의 날카롭게 생긴 돌 하나를 주워서, 살덩어리의 줄기 부분을 내리찍었다. 기형종은 의외로 쉽게 반으로 잘려 피를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이노리는 역겨운 광경에서 고개를 돌려 자전거를 세우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안타깝게도, 자전거의 바퀴에 바짝 달라붙은 살점은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바퀴는 더 이상 굴러가지 않게 됐다.

“젠장!” 이노리는 다시 발자국을 쫓아 승객을 따라 뛰어가기 시작했다. 넘어졌을 때의 엉덩이 통증이 아직도 남아있었으나, 발자국이 사라지기 전에 쫓아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골목길 사이를 지나가며 발자국을 따라갈 때쯤, 갑자기 오른쪽 모퉁이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눈앞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자신이 찾고 있던 바로 그 탑승객이었다. 이노리는 드디어 승객을 찾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남자를 불러세우려 했다. “저기요 손님! 제가 이곳에서 나가는 길을 알아요! 어서 이리로 오세…”

이노리는 남자에게서 어딘가 이상한 점을 느끼고는 말을 멈췄다. 눈앞의 남자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무미건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동생이나 승객에게서 느꼈던 천진난만한 기운은 어디에도 없었다. 남자가 허공을 쥐고, 무언가를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하자, 바닥에서 거대한 살덩어리가 솟아나와 이노리를 덥치며 길을 막았다. 남자는 그 후 로봇처럼 일정한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시 무언가를 향해 떠났다.

공격을 피하려다가 뒤로 넘어져버린 이노리는 자신 앞에 일어난 광경을 보고 잠시 벙쪄있다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아마 방금 자신이 맞닥뜨린 자가 두 번째 발자국의 주인일 것이었다. 자세한 것은 몰랐으나, ‘1. 저자는 알 수 없는 위험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2. 저자는 방금 자신을 공격했다.’ ‘3. 승객은 모종의 이유로 저자에게서 도망가고 있다.’ 이 세 가지 사실만으로도 저 알 수 없는 자를 경계할 만한 사유는 충분할 것이다.

이노리는 근처의 유리 조각으로 손에 달라붙은 살점을 잘라낸 후, 다시 일어섰다. 이노리는 다음 모퉁이를 향해 달려갔으나, 다시 마주친 남자가 다시 살점으로 길을 막았다. 똑같은 일이 수차례 더 반복되자, 이노리는 잠시 걸음을 늦추고 생각을 시작했다.

일단, 저 새로운 남자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미리미리 길을 막아두지 않는 점이나, 자신의 능력으로 승객을 잡으려 하지 않는 점에서 추론할 수 있었다. 골목길의 길이를 토대로 계산해보면 아마 사정거리는 3미터 정도가 한계일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저자를 따돌릴 수 있는 것일까?

더욱 빨리 지나가 저자를 앞지른다는 것은 해답이 될 수 없었다. 이노리의 속도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던 것에 반해 저 알 수 없는 자는 쭉 일정한 속도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름길을 찾는 것이 답이었다.

다음 모퉁이가 나타났을 때, 이노리는 골목으로 들어가는 대신 그 옆의 건물로 들어갔다. 이노리는 계단을 재빨리 뛰어 올라가, 옥상에 다다랐다.

이노리는 옥상에 올라가 거리를 내려다 보았다. 승객은 이곳 지리를 잘 모르는 모양인지 막다른 길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노리가 생각한 방법은 건물 옥상 사이를 건너뛰어서 빠르게 마을 사이를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건물 사이의 거리가 영화 ‘스파이더맨’에 나오는 것처럼 긴 것은 아니었지만 한 번만 삐끗해도 바로 나락이었으니 떨릴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고, 이노리는 도움닫기를 하며 뛰어올랐다. 사뿐히 착지한 후, 관성을 유지하며 다시 한번 달려 나가 점프했다. 두 번째 착지는 첫 번째보다 수월했다. 거리는 어느새 상당히 많이 좁혀졌다. 그러나, 세 번째 착지에서 이노리는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이노리의 몸은 옥상 위를 굴러가 배기관에 꽝! 하며 부딪혔고, 큰 소리가 사방에 울려퍼졌다. 지금까지는 이노리의 발걸음이 워낙 조용한데다가 곳곳에서 들리는 꽤 시끄러운 목소리에 묻혀서 들키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지만, 이걸로 자신의 위치가 드러나 버렸다.

“거기 누구 있어? 제발 에무 좀 도와ㅈ…” 무언가가 조이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말소리가 끊겼다. 그 직후, 살덩어리가 벽에서부터 솟아 나오며 천장을 만들어, 이노리를 두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했다.

이노리는 정말로 빨리 움직여야 했다. 일단 전에 돌이나 유리로 찍었을 때 의외로 쉽게 잘리던 걸 보면 저 살점의 내구성은 그리 높지는 않은 게 분명했다. 근처에 날카로운 도구는… 이노리는 유리병 하나를 주워 바닥에 내리쳤다.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는 사람은 정말 아무 데나 있는 모양이었다. 뾰족하게 쪼개진 병 주둥이 부분을 조심히 손에 쥐고, 이노리는 그대로 뛰어내렸다. 이곳은 3층 건물이니까 바닥까지의 높이는 대략 9미터. 저 살점 능력의 사정거리를 3미터 정도라 가정하면 6미터 정도의 높이였다. 살덩어리가 완충 작용을 해줄 테니 일반적인 추락보단 더 안전할 것이었다.

들썩! 하는 소리와 함께 이노리는 떨어졌다. 늘어난 살점을 유리 조각으로 끊어 내곤 그대로 바닥에 착지했다. 낙법을 취했다곤 하지만 아픈 건 마찬가지였다. 이노리의 눈앞엔 두 명의 똑같이 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한 사람은 양손과 머리가 벽에 살점으로 묶인 채 서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입 아래론 가려져 있어서 뭘 말하려 하는진 들을 수 없었지만 새파랗게 질린 얼굴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알 수 없는 포커페이스를 하고선 자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노리는 팔을 들어 방어 태세를 취했다. 세 사람 사이엔 잠시 적막이 흘렀다.

“저, 저 사람을 당장 놔줘." 이노리는 떠는 기색을 애써 숨기려 하며 말을 걸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포커페이스의 남자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난 지금 무기도 갖고 있어. 당장 뭐라도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이노리는 유리병을 치켜세우며 남자를 위협하려 했다. 남자가 아무것도 소환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아까처럼 대규모 소환을 한 후에는 잠시 능력이 제한되는 것일거라고 이노리는 추측했다.

그 순간, 이노리의 발목을 무언가가 조여왔다. 아뿔싸! 소규모 소환은 여전히 가능하거나 쿨타임이 벌써 돈 모양이었다. 남자는 이노리가 허둥지둥대는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달려들어 넘어뜨렸다. 이노리는 옴짝달싹 못 하게 됐고, 살덩어리는 점점 더 이노리의 몸을 조여왔다. 완전히 땅에 묶이기 전에, 이노리는 꾀를 내 유리 조각을 땅에 마구잡이로 내리꽂았다. 살점으로 이루어진 땅에서 피가 솟구쳤고, 이노리는 재빨리 피를 자신 위에 올라와 있는 남자의 눈에 흩뿌렸다. 남자가 당황한 사이에, 이노리는 남자를 복부에 한 번 가격한 후, 유리조각으로 살덩어리를 끊고 탈출했다. 이어서 벽에 묶여있는 승객한테 달려가 승객 또한 풀어주었다.

“뛰어요!” 이노리는 이렇게 외치고 승객과 함께 도망치기 시작했다.

“에무를 닮은 저 도플갱어는 대체 뭐야? 아니, 애초에 이 공간은 어떻게 돼먹은 거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일단 확실한 건 저 녀석한테서 도망쳐야 한다는 거예요.”

이노리는 뒤를 돌아봤다. 도플갱어는 어느새 다시 일어나 매서운 속도로 두 사람을 쫓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수를 생각해내야 했다. 현재 저자와의 거리는 약 10미터. 3미터 내로 거리가 좁혀지면 금세 결박당할 것이 분명했다. 둘은 점점 속도가 줄고 있었지만, 저 도플갱어는 어찌 된 일인지 전혀 지친 기색 없이 일정한 속도로 두 사람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노리는 주위를 둘러보며 저자를 따돌리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지 살펴봤다. 가르면 피가 나오는 땅은 이미 한 번 써먹었으니 안 통할 가능성이 높았다. 기형종들은 잘라서 들고 다니기도 번거로울뿐더러 휘두르기 좋게 생긴 놈은 찾기도 어려웠다. 유리 조각을 하나 갖고 있긴 했지만 근접 전투에선 기습이 아닌 이상 자신이 불리할 게 자명했다. 그 외의 선택지는…

이노리의 머릿속엔 문득 작전 하나가 떠올랐다. 조건에 맞는 장소를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겠지만 그 외엔 완벽해보였다. 때마침 앞에 모퉁이가 하나 보였다.

“제가 작전 하나가 있어요!”

“뭔데?”

“저기 20m 쯤 앞에 있는 모퉁이에서 꺾어주세요! 그 후, 옥상에 저와 똑같이 생긴 시체가 있고, 계단엔 창문이 있는 건물을 찾아주세요! 찾은 다음에는, 어떤 방법으로든 그 건물 위치를 제게 신호해주면 됩니다.”

“뭐?”

“그다음엔 그냥 거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나머진 설명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이 무슨…”

“모퉁이 다 왔습니다!”

이노리는 승객을 모퉁이로 떠밀치고, 자신은 도플갱어를 유인하기 위해 잠시 멈춰 섰다. 그 전 갈림길에서 돈 괴물이 눈앞에 나타나자마자, 이노리는 다시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노리가 이제 해야 하는 일은 신호가 올 때까지 저자한테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노리는 달리다가 길에 있던 단단한 돌덩이 하나를 줍고는, 자기 뒤의 사람에게 강하게 던졌다. 도플갱어는 살덩어리로 벽을 소환했고, 돌은 방어벽을 살짝 손상시키며 튕겨나갔다.

이노리가 돌을 하나 더 줍기 위해 허리를 다시 굽힌 순간, 등 위로 돌이 날아왔다. 돌멩이는 아슬아슬하게 이노리를 빗겨나가며 벽에 부딪혔다. 이노리는 날아오는 돌을 피하고자 갈림길이 많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쉴 새 없이 도망 다니며 신호를 기다리던 중, 멀찍이서 연기가 올라왔다. 승객이 보낸 신호가 틀림없었다. 이노리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괴물을 신호가 온 건물을 향해 유인했다.

건물 안에 들어서서, 이노리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 2층을 향해 뛰어 올라갔다. 계단 문을 잠가 시간을 벌었으나 곧 뚫릴 것이 분명했다. 계단을 막기 위해 근처의 바퀴 달린 벽장을 끌고 오던 도중, 도플갱어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살점을 열쇠 모양으로 변형해 문을 열었던 것이다. 당황한 이노리는 그만 계단을 올라가려다 발이 미끄러져 버렸다. ‘망했다.’ 이노리의 머릿속에 세 글자가 스쳐 지나갔다. 이노리는 땅을 짚어가며 근처의 방으로 숨기라도 하려 했으나, 땅에서 살덩어리가 솟아나 자신의 왼발을 옭아맸다. 그 사이, 동생의 얼굴을 한 도플갱어는 자신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남자의 포커페이스가 어째 자신을 향한 분노를 드러내는 듯했다.

한 계단, 또 한 계단. ‘너 때문이야’ ‘네가 잘못한 거야’라고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저 남자의 것이 아니었을까?

‘이번만큼은 꼭 살리고 싶었는데’ 이노리는 머릿속으로 이 말을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땡강, 하는 소리와 함께 도플갱어가 쓰러졌다. 그자의 뒤엔 프라이팬을 든 채 서 있는 승객이 있었다. 이노리는 한순간에 안도했다.

“에이, 차장씨, 자신만만하게 소리쳐놓고 이러면 안 되지. 큰일날 뻔했잖아, 에무가 없었으면 말이야.” 승객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죄송합… 조심하세요!” 바닥에 놓인 몸에서 살덩어리가 스멀스멀 기어오르며 승객의 발목을 향해 늘어지고 있었다. 이노리는 무서운 속도로 회복해 다시 일어서려 하는 남자의 몸을 계단 아래로 걷어찼다.

“옥상으로 가자!”

맨 아래층으로 떨어진 도플갱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시 일어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1층과 2층 사이까지 걸어갔을 때쯤, 밖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밖을 내다보니 방금까지 쫓던 남자의 몸이, 피를 철철 흘리는 채 미동도 없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도플갱어는 조심스레 팔을 살점으로 덮고는, 유리를 깨부수고 건물 밖으로 뛰어내렸다.

옥상 위의 두 남자는 그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서둘러 뛰어 달아났다.

“저게 진짜 먹힐 줄이야… 곳곳에 차장씨를 닮은 시체가 있는 건 소름 끼쳤는데 이걸 대역으로 써먹네. ”

“아직 저자가 쫓아오고 있을 수도 있으니 긴장을 늦추지 맙시다. 아마 기차에 도착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응, 물론이지. 그건 그렇고, 이쪽 길이 확실한 거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으론 둘째가라면 서러웠어요.”

“그것 참 듣던 것 중 다행이네”

“…저기 있잖아요”

“응?”

“전에 기차 안에서,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었던 건 정말 죄송합니다. 동생이 집나간 이후로, 계속 녀석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손님이 그 얘랑 되게 비슷하게 생겨서 착각했었어요. 왜 얘가 날 못 알아보는 거지, 하고 생각하다가 그만 감정이 격해져 버렸었네요. 아무리 흥분했다고 해도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진심으로 사과드려요.”

“에이, 에무, 그런 거 벌써 다 잊었어. 동생이 어디있을진 몰라도, 아마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응, 에무한테 그런 예감이 들어”

“하하, 이렇게 잘 대해주니 면목이 없네요.”

얘기를 나누며 돌아가다 보니 두 사람은 어느새 역에 도착해있었다. 소요된 시간은 25분. 딱 알맞게 돌아왔다.

“일단 저 열차를 타고 다음 역까지 가시고요, 그 후 다른 열차를 타고 이 역으로 돌아오시면 제대로 된 이 장소로 올 수 있을 듯하네요. 만약 푯값이 필요하다면 제가 내겠습니다.”

“아, 그럴 필요 없어. 사실, 에무, 다음 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좀 일찍 내린 거였어.”

“앗, 이런 일이. 또다시 실례를 끼쳐버렸었네요.”

“에이, 미안해 할 필요 없다니까 차장님.”

두 사람은 열차에 올라탔다. 손님들 사이에 열차 출발 시간이 한참이나 지연됐단 사실을 눈치챈 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열차는 다시 덜컹거리며 선로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풍경은 창문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손님들은 각자 책이나 핸드폰을 꺼내 자신들의 일을 하고 있었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한 사람, 아니 어쩌면 두 사람의 마음을 빼면 말이다.

열차가 정차하자, 이노리는 손님들을 안내하고 배웅하기 위해 일어서 걸어갔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승객들은 열차를 오르내렸다. 그리곤, 어느새 마지막 손님, 동생의 얼굴을 닮은 사내의 차례가 되었다.

“저 손님,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응, 차장님, 말해봐.”

“그 동생을 닮은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하는데, 이 열차를 언젠가 다시 이용해 주실 수 있나요?”

승객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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