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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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고서를 잠시 한 켠에 밀어두고 사무실 창문으로 걸어갔다. 종이컵에 담긴 인스턴트 커피가 혀 끝에 맴돌다 사라진다. 어젯밤부터 한 순간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조촐하더라도 신년 파티나 해 볼까, 하는 생각이 흘러내렸다. 어느새인가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폭설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가볍게 덮었기에 나는 잠시 그 하얀 폭풍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 시선은 정처없이 얼어붙은 공기를 맴돌았다. 몇 분동안 그랬을까,입술에 짠 맛이 느껴졌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소매로 눈물을 대충 걷어내고 보고서로 돌아갔다. 눈이 꽤나 건조해진 모양이다. 이 일만 끝내면 숙직실에서 잠깐은 자도 되겠지. 그리하여 나는 한동안 보고서 속에 빠져 있었다. 혼돈의 반란과 부서진 신이 어찌하여 연합하게 되었는가, 하는 장황한 서사시와 탈취된 개체의 리스트들을 헤매던 내게 슬픔이 찾아왔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방금 흐른 눈물은 피로의 증거가 아니었다. 그건, 조금 더 원초적인 반응이었다. 갈 곳 없는 슬픔이 가슴을 휩쓸고 지나갔기에 나는 보고서 위에 엎드려 울었다. 눈가와 소매가 천천히 젖어갔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눈이 오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아니면 사무실의 왼쪽 구석을 지나가거나. 몇 달에 한번쯤 이렇게 슬픔이 북받치는 일이 있었다. 찾아봐도 이유는 없었다. 한번은 아카시아 꽃 옆을 걸어가다 목놓아 운 적도 있었다. 가슴이 잔잔해지기 전에는 도저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놀랍게도 주변 사람들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도 이내 익숙해졌다. 그저 조금 특이한 정신 질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SCP-089-KO의 실험에 차출된 적이 있었다. 방은 내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신기하게도 그 때 당시에는 울지 않았지만, 한동안 계속 우울했었다. 정신 질환이 극도로 민감한 상태였다. 앞서 말했던, 아카시아 꽃을 보고 우는 경험도 그 때 일어난 일이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한 나의 정신 상태를 감안해, 재단은 내게 휴가를 주었다. 난 그 한 달 내내 눈물이 메마를 때까지 울었다. 내가 들이마시는 공기조차 내 슬픔의 재료가 되었다.

물론 나도 늘 이 병이 있던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아마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감성적인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차차 나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분명 이 병이 막 발병했을 때에는 굉장히 심했으니까. 한 7개월 전이었던 것 같다. 2주간의 휴가 끝에 나는 일을 하기 위해 연구실 문을 열었고, 그대로 펑펑 울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소년 - 믿기 힘들겠지만, 목줄에 묶인 청년과 같이 - 한명이 황급히 불려오더니 박사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고, 나가는 길에 내게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게 전부였다. 난 한동안 연구실에 들어갈 때마다 원인 모를 슬픔에 시달렸다.

한번은 내가 정말로 심하게 울었던 적이 있다. 거의 한 시간 내내 울었던 것 같다. 나는 내 옆자리의 연구원에게 단순히 오늘이 며칠이냐고 물어보았고,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하더니 필사적으로 박사를 쳐다보았다. 박사의 무언의 허락을 받은 후에야 그는 11월 30일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길로 울어버렸다.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내 동료들은 정말로 마음씨가 착한 것 같다. 사실, 재단에 아무리 괴이한 직원들이 많다지만 느닷없이 울어대는 연구원은 그렇게 흔하지 않으니까. 다들 나와 오랫동안 일해서 그런 걸까. 꽤나 갑작스럽게 이 병이 생겼는데도 그들은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가만히 와서 내 등을 다독여주거나 할 뿐이었다. 그런 단순한 행동마저도 내게는 큰 위로가 되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곧 울음을 그치고는 했다.

가끔은 궁금해진다. 나는 이 괴이한 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 분명 차도는 있고 이제는 조금 덜 울지만, 아무래도 나는 영원히 이 슬픔과 묶여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설을 볼 때 마다, 벽장 속에 어딘가 놓여있던 먼지쌓인 물건들을 볼 때마다, 사무실 구석에 비워진 의자를 볼 때 마다. 이 병은 이겨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내게 다가온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겨내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박사는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문 앞에 주저앉은 연구원을 바라보았다.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울고 있었다. 눈물을 계속해서 훔치면서도 도저히 연구실 안에 들어설 기분이 아닌 것 처럼 보였다. 그의 주변에는 침통한 표정을 지은 연구원들이 위로해주고 있었다.

"그러면 그냥 저렇게 계속 울게 되는건가?"

"아니요. 음.. 이런 경우는 가끔 보고되는 경우가 있어요. 재단의 약은 그렇게 완전하지 않죠. 기억은 지워도, 감정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 감정은 갇혀 있게 되는 거에요. 유폐된 감정이 되는 거죠. 가끔 발작적으로 터져나오는 경우는 있지만.. 점점 희미해져 가겠죠. 자연스럽게. "

자우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드문 일이었다. 아마 저 사람은 잊혀진 기억에 꽤나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겠지. 그 기억의 잔재는 어떤 약으로도 지워낼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흐려질 뿐이다. 기억을 없앤다는 건 그런 일인 법이니까.

소년은 안타까운 눈으로 연구원을 쳐다보고, 이내 문 밖으로 나갔다. 슬픈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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