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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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산崖山 앞바다에서 큰 싸움이 있었다.

애산에는 원래 아무것도 없었다. 수십만 병사가 한 뜻으로 모이자 요새가 생기고 궁전이 생겼다. 앞바다에는 수천 척의 배도 띄워졌다. 이제 애산에는 많은 것이 있었다. 충신이 있었고, 의인이 있었으며, 겁을 먹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을 품은 사람이 있었다. 그 다음에는 긴 전쟁이 있었다. 화살이 날아들고 불길이 치솟는 일이 있었다. 칼과 창이 번뜩이고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배들이 가라앉는 일이 있었다. 또 한 차례 큰 폭풍이 있었다. 그 뒤에 마가라摩伽羅가 찾아왔다.

그 커다란 고래는 사람을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계속해서 사람이길 원하는 사람을 특히 좋아했다.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가라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았다. 마가라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도 알았다. 아, 그러나 한 사람은 아니었다. 애산 주위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훑어보는 마가라의 머리갑판 위에서 종근從瑾은 그 답에 의문을 갖고 만 것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애산 앞바다의 풍경을 둘러보다가, 가끔씩 옷자락 속에서 쇠경첩이 달린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여다보고는, 다시 옷자락에 집어넣고 자기 발 아래의 고래와 똑같은 눈빛으로 주변 바다에 떠다니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이 이승에서 사람 소리를 들으려면 이승에 있어야지 저승에 있어서야 안 된다 이런 말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으려면 일단 살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땅에 묻힌 시체는 늙고 병들지도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가라와 계속해서 툭툭 부딪히는, 저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니는 저것들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바다가 변덕스럽지 않았더라면 아직 사람 소리를 들을 만한 자들을 한둘 찾을 수 있었으리라. 마가라는 손님들을 언제나 그랬듯이 극진히 대접해 드렸을 테고, 종근은 그들을 장군님에게 모셨을 터이다. 그러나 바다는 피 냄새를 맡더니 사나워져서, 제아무리 가볍고 날랜 마가라라 해도 쉽사리 헤치고 나아가기가 어려웠다.

기진맥진한 마가라와 그 선원들이 애산에 닿았을 때, 거기에는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바다를 보고 마가라는 슬퍼했다. 종근도 슬퍼했지만 그 눈은 바다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의 눈은 애산을 향해 있었다. 그 버려진 섬을 향해. 종근은 마지막으로 나무 상자를 꺼내 이리저리 돌려보고는, 더 이상 그 풍경을 눈에 담기 버겁다는 듯 몸을 돌려 마가라의 안으로 들어갔다.

마가라는 고래처럼 잠수하더니 배 같은 궤적을 남기며 난바다를 향해 유유히 떠나갔다.

바위와 잔해만 남아, 애산은 그렇게 마지막으로 버림받았다.


"청해진에는 산이 있습니까?"

"산이라고 할 만큼 높다란 데는 없지." 모집관은 명단을 내려다본 채로 대답했다. "건 뭐 하게?"

"그냥 궁금했습니다."

"그래 내가 까마득히 높은 산이 있다 하면 배에 오를 생각이었나?"

"예."

"이름이 뭔가?"

"종근이오."

"성은?"

"모릅니다."

"무슨 종에 무슨 근인가?"

"모릅니다."

모집관은 그제서야 자기 앞에 선 사내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희멀건 것이 아직 앳된 나이 같았다. 그런데 벌써부터 꺼칠꺼칠해지기 시작한 턱에, 근육이 엉겨붙어서 떡 벌어진 어깨를 보아하니 그렇다고 청해진으로 들어오는 금은보화에 이끌려(또는 그 금은보화에 이끌려 온 온갖 헛것에 이끌려) 찾아온 자는 아닌 게 분명했다. 그다지 멋을 부린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신경을 안 쓴 것도 아닌, 잘 손질되고 단정한 옷이 모집관에게 확신을 주었다. 확실히 이 종근이라고 하는 자는 제법 물질에 익숙한 사내였다.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명단에 이 종근이라는 이름을 어찌 적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전에 청해대사께서 "성분이 불명인 자를 배에 태우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었는데, 성도 모르고 제 이름자 쓸 줄도 모르는 이 젊은이의 경우는 확실히 "성분 불명"에 속했으니 모집관은 속이 불편했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에 종근의 오른팔에 걸려있는 팔찌가 모집관의 눈에 띄었다. 조그만 나무 조각들을 둥그렇게 깎아 염주 비슷하게 만든 다음 이어붙인 물건이었다. 나란히 끼워진 나무 구슬들 사이에 옥구슬 하나가 끼어 있었다. 마치 갈매기 하나가 당치도 않게 까마귀 떼 사이에 몸을 숨기려고 헛고생을 하는 꼴이었다. 모집관은 그것을 보고 생각나는 두 글자가 있어, 속으로 "에라 모르겠다. 저런 사내가 길바닥에 채이는 것도 아닌데 알 게 뭐람" 운운하며 붓을 들고 새로 모집한 수부들 명단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從瑾.

"고향이 어딘가?"

"이제 관심 없습니다. 청해진에 산 없다면서요."

"수부 되면 배 타고 진만 돌다 뒤진다더냐?"

두 글자 옆에 또 세 글자가 적혔다. 金官京. 금관경은 모집관의 고향이었다.

"누가 또 물으면 금관경에서 왔다 하게. 자네는 이제 수부 종근이네. 좇을 종 자에 옥 근 자야. 이것도 잊지 말고."

"아니 이게 다 뭡니까?"

"세상 돌아다니다 보면 어디에는 산이 있겠지. 됐고 어서 올라가."


얼마 지나지 않아 청해진의 거의 모두가 종근이 사실 금관경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근데 그러면 그는 대관절 어디서 온 사람인가? 그것은 종근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제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채로 길바닥에서 사마귀나 개 고양이를 동무 삼아 자라는 아이들은 있는 법이라지만 종근은 또 그런 길바닥 출신 수부들과도 달랐다. 우선 그는 흥무왕처럼 건강했다. 그것도 그냥 몸만 튼튼한 게 아니라 심기체가 하나로 건전했다. 종근이 수부로 일한 수십년 간 그는 길 가는 개 한 마리 걷어차는 일이 없었고, 신라의 보화를 노리고 배를 몰아 쫓아오는 일본 배나 기타 잡것들에 맞서 제일 먼저 칼을 뽑는 사람이 종근이었으며, 그러면서도 자기한테 날아오는 창칼이나 화살을 잽싸게 피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럼 종근은 길거리 출신이 아니구나, 하고 사람들은 결론지었다. 물론 여전히 궁금해 못 견디는 사람 몇몇이 남아서 종근의 일거수일투족을 기웃거리곤 했다. 그 오지랖 넓은 작자들이 그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몇 가지 있었으므로, 아주 수확이 없는 짓거리라고는 못 할 것이다. 첫째로 염탐꾼들이 알게 된 것은 종근의 산에 대한 사랑이었다. 뱃사람이 산을 좋아한다는 건 해괴한 일이지만 아무튼 종근은 그런 사람이었다. 항해를 하다가 근처 뭍에 산이나 언덕이 보이면 종근은 늘 육지 쪽에 서서 한참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약간의 어림짐작이 더해진 소문이 청해진 안에서 빠르게 돌았다. 나중에 멋모르고 새로 들어온 뱃놈 중 하나가 종근더러 산에 사는 선녀와 정분이 났다는 소문이 진짜냐고 물었을 때 종근은 별 지랄 염병을 다 보겠네 하는 표정으로 그놈을 흘겨보았다. 세상 무뚝뚝한 종근이 아주 드물게 짓는 표정이었다.

또 염탐꾼들 중에서 나름 눈썰미가 좋은 치들은 종근이 두 가지 진귀한 물건을 분수에 맞지 않게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모집관이 본 그 괴상한 염주였고, 또 하나는 조그만 나무 상자였다. 그 나무 상자는 종근이 언제나 자기 품에 지니고 다니면서 가끔 열어 들여다 보곤 하였는데, 거기서 뭘 꺼내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대관절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날 개중에 마음이 악독한 치 중에 하나가 종근의 침소에 숨어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상자를 빼돌렸다. 도둑놈은 자기 자리로 돌아와서는 종근이 그리 애지중지하던 물건이 뭘까 궁금도 하고, 사실 장물아비는 그 물건을 얼마나 더 애지중지할까가 더욱 궁금하여 상자를 열려 하였으나 뭐가 어찌 되었는지 아무리 용을 써도 열리질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수 없이 나중에 뭍에 닿으면 목수나 대장장이를 찾아서 열어달라 하리라 하고 자기 품에 넣은 채 잠을 청했다.

상자는 그 다음날 아침에 종근이 놓아둔 바로 그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종근도, 물론 마음이 좀 켕겼겠지만 도둑놈도 한 마디도 안 했으므로 그 괴이한 사건은 딱히 소문으로 돌거나 하지는 않았다.

한편 청해대사는 종근이 처음 배에 오른 순간부터 그를 수상쩍게 여겼다. 대사의 아랫사람들인 수부들이 편하게 '장군님'이라고 부르고 후세 사람들은 무례하게도 장보고라는 이름 석자로 부르는 그는 청해진이 청해진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이요, 신라의 많은 영걸들 중에서도 진정으로 위대한 인물이었다. 다만 그런 대사가 보기에도 종근은 소문만 무성할 뿐 실제로는 놀라우리만치 허심탄회한 사람이었으므로, 대사는 종근을 그냥 제 할 일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런 사람이 세월이 계속 지나도 한낱 수부의 직책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도 퍽 이상한 일일 것이다. 종근이 처음으로 배에 오른 지 4년이 되었을 때, 청해대사는 그를 자신의 장선將船으로 데려왔다. 하필 뭍에서도 가장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미련을 가진 이상한 수부 종근은 그렇게 대사 직속의 일꾼들을 감독하는 수부장의 지위에 올랐다. 여전히 그의 마음가짐은 파도치는 바다보다는 뭍에서 구르고 자라는 목석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이상한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누가봐도 바다가 아니라 산에 마음이 가 있는 사람이 전혀 배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사실 그는 며칠 뒤 청해대사가 물었을 때 자신은 산에 오르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청해대사는 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라 사방 바다에서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예를 모르는 무리는 그의 깃발이 휘날리는 곳에는 감히 발을 들이지도 않았고, 바다와 닿아 있는 모든 항구에서는 그의 견고한 배와 군기 엄정한 선원들을 보고 감탄하고 칭송하는 소리가 끊이는 법이 없었다. 역사를 글로 기록하여 남기는 자들은 왕과 영웅들의 연대기에 기꺼이 그의 이름 석자를 적어넣었다.

그러나 세상 일은 마치 파도에 사람이 휩쓸리듯 천천히, 그러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변해갔다. 왕은 청해대사를 총애하는 마음과 함께 세상을 떴다. 조금씩 조금씩 청해진은 바닥부터 녹슬었다. 청해진의 배에, 사람들의 마음에 녹이 슬자 한때 그리도 아귀가 잘 맞았던 청해진의 하나부터 열까지 한바탕 부딪히고 어긋나며 마찰음을 발했다. 그 시절 서로가 서로에게 품은 악의, 사람들이 꾸민 모략과 흉계는 이미 다른 곳에 기록된 바 있다. 그 모든 일의 한가운데에서 청해대사는 무진주 사람 염장閻長과 함께 어울리던 모습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해신처럼 군림하던 청해진이 갑자기 머리 없는 사람처럼 되자 청해진과 청해진이 떠받치고 있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녹슬 것도 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종근은 대사의 부장 정년鄭年과 같이 산산조각나려 드는 청해진을 지켜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이미 신라의 흙과 바위 위에서는 청해진이 설 자리가 없었음을 그들도 고통스러울 만큼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종근의 목석처럼 굳건한 마음마저 절망으로 인해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던 그 순간에, 청해대사가 마가라와 함께 돌아왔다. 마가라는 청해진에 남은 사람들을 동정해 그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었다. 이윽고 청해진이 신라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을 때, 청해진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사람들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신라의 역사에 속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마가라는 곧 호마護摩가 보낸 생물이었으니, 청해진 사람들은 이제 호마의 역사에 속해 있었다.

청해대사는 종근과 정년의 분투를 치하하고, 청해진의 생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천명했다. 마가라는 먼 바다를 향해 깊은 물 속을 잠항하며 이제 마가라의 선원이 된 청해진 수부들을 아직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그들의 목적지로 이끌었다.

다만 종근은 이제 산으로부터 더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한 곳에서 멀어진 자는 다른 곳에 더욱 가까워지게 되는 법이다. 이제 마가라의 인도를 받는 청해진 수부들은 한때 그들의 무덤이었던 깊은 바닷속까지도 그들의 일터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뭍으로부터 분리된 것이나 다름없는 청해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수면을 오가는 다른 뱃사람들에게도 예전만큼의 관심을 쏟지 않았다. 청해진의 옛 적도, 동맹도, 과거에 그들이 알고 접촉했던 그 누구도 유유히 깊은 바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마가라를 따라 들어오지 못했기에.

청해진은 화물선과 금은보화, 신라나 당이나 일본의 일로부터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제 그 눈은 어디를 향했는가? 청해대사는 자신의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얻은 두번째 기회는 호마가 준 것. 모든 것이 깊은 바닷속처럼 어둠에 잠긴 청해진의 운명 속에서 오직 호마라는 불꽃만이 유일한 빛이 되어 그의 정신을 밝혀 주고 있었다. 청해대사가 호마에 대해 아는 것은 수부들이 짐작하는 것과 다르게 그리 많지 않았으나, 그들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호마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청해대사가 자신의 의도를 수부들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수부장 종근은 대사가 기대했던 대로 그의 계획에 누구보다 빨리 동참했고, 다른 이들은 종근이 동의하는 것을 보고 동의할 만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일단 그들이 비유적으로도 한 배를 탄 몸이 되자 마가라가, 더 나아가 호마가 그들의 결심을 굳혔다. 조금은 경악스러운 방식이었다. 그들이 온 바다를 종횡무진하던 어느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마가라는 신라로 일행을 다시 이끌었다. 다만 신라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변해 있었다. 사실 그들이 기억하던 신라는 사라져 있었다.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항구의 분위기도, 나랏님의 이름도, 강과 산의 모습까지도. 그런데 청해진은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제서야 청해진 사람들은 호마의 권능을 알게 되었다. 마가라의 심장은 비단 마가라 뿐 아니라 그가 자기 안에 들인 모두의 심장도 뛰게 한 것이다. 영원히.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들의 운명을 알게 된 청해진은 저마다 제각각으로 반응했다. 어떤 이는 얼굴빛이 환해졌고, 어떤 이는 얼굴빛이 새하얘졌다. 하지만 수부들 대부분의 얼굴빛은 둘 중 어느 쪽이라고 단정짓기 참 애매한 색이었다. 한편 종근은 그것을 알게 된 순간 청해대사를 찾았다.

청해대사는 마가라의 등에 세워진 함교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종근은 방금에야 올라올 생각을 한 사람을 함교에 떡하니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괴이하기도 하고, 실은 뭔가 계획이 있었다기보다는 본인도 혼란스러워 내친김에 덜컥 올라온 것인지라 그만 우뚝 서서 멍한 눈을 하고 가만히 서고 말았다.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반면에 대사는 대사답게 침착하고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기가 앉은 곳 옆의 의자를 가리켰다.

"길게 붙잡지 않겠습니다." 종근은 그렇게 청해대사의 제안을 사양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마가라가 우리를 붙잡아 두고 있는 걸세. 우리 중 누구라도 호마를 다시 찾기 전에 눈이 닫히면 아쉬울 터."

"언제까지 이어지는 겁니까?"

"마가라의 불꽃이 꺼지면 더 이상 우리를 잡아놓지 못할 테지."

청해대사는 그렇게 대답하고 의문이나 분노가 담긴 추가적인 질문을 기다렸지만, 종근은 이 함교에 올라올 때부터 모든 행동을 완벽히 즉흥적으로 하고 있었기에 다시금 멈춰 버렸다. 잠시 뒤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앞서 사양한 대사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대사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종근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거 의외군." 청해대사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 자네가 제일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어."

"제가 산을 좋아하는 것 때문에 그렇게 헤아리셨습니까?" 종근이 예전처럼 조용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나오는 의구심의 흔적은 아직 지우지 못했다. 청해대사는 대답하는 대신 희미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네는 내 선원들 중에서 가장 비밀이 많은 사람이야." 청해대사는 잠시 뒤에 말을 이었다. "모집관이 적은 이름도, 출신지도 모두 거짓이었지. 자네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다면 청해진에 발을 들인 첫 날에 내 배에서 쫓아냈을 걸세."

"제 이름은 종근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 종 자에 그 근 자는 아니잖나."

"그렇지요."

"그러니 자네 이름은 그 '종근'이 아닌 게야. 아니면 짐작 가는 것 있나?"

종근의 맑은 빛깔 눈이 잠시 멀리 떨어진 어딘가를 향하는 것을 보고, 청해대사는 유도신문이 먹혀들어갔음을 깨달았다. 청해대사의 이 계획은 종근이 함교에 쳐들어온 것 만큼이나 즉흥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궁금해 하는 비밀을 캐내기 위해 자신이 신뢰하는 수부장을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고민 속으로 빠뜨리는 계획을 세울 만큼 멀리 보는 사람도, 또 그럴 만큼 잔인한 사람도 아니었다. 허나 그것이 어떻게 언제 나온 계책이었든, 썩 나쁘지 않은 계책이었다. 종근은 자기 품 속에 손을 넣어 정말 까마득한 오래 전부터 들고 다니던 나무 상자를 꺼냈다.

"이 상자는 제가 산에서 거둬졌을 때 제 옆에 있었습니다." 종근은 그렇게 말하며 오른팔 소매를 걷었다. "이 팔찌도. 산간에 세워진 절에서 기거하시던 스님들이 저를 발견해서 돌봐주셨습니다. 종근은 그분들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런 이름이라면 기억에 남을 텐데, 이상한 일이군."

"글을 깨치기 전에 왜구들이 뭍으로 올라와 산을 불태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 저만큼 명줄이 길지 못했습니다. 스님들이 이 상자와 팔찌를 불공에 보태 쓸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분들께서는 이것은 제 것이니 늘 품에 가지고 다니라고 하셨습니다." 종근은 그렇게 말하며 약하게 헛웃음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상자 안에 뭐 귀한 게 든 건 아니었지만 저는 어쨌든 이걸 늘상 지니고 다녔습니다."

갑자기 그는 상자를 열었다. 청해대사는 그가 다른 사람이 보는 자리에서 상자를 여는 것을 본 바가 없었기에 순간 크게 놀랐다. 두 사람은 잠시 상자 안에 든 것을 바라보았다.

"이제 자네 진짜 이름을 어떻게 써야 할 지 알겠군." 청해대사가 그렇게 감상을 말했다.

"어릴 적 스님들이 제게 해 주시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분들 말로는 제 발목에 조그만 쪽지가 하나 묶여 있었답니다. 어떤 사연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아이인지 알 수 있을까 싶어 읽어봤지만 '이 아이를 산으로 보내시오'라고 하는 말만 적혀 있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분들은 자네를 산간 절에 맡겨진 아이 쯤으로 생각한 모양일세."

"어쩌면요. 저는 다른 의미가 더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절을 떠난 이후에도 줄곧 산에서 지냈지만,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청해대사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종근은 계속해서 말했다.

"하루는 산에 정나미가 다 떨어져서 상자 안에 든 것을 수풀에 쏟아 버리고 그냥 산을 내려왔습니다. 다시는 산을 보지 않으리라고 결심해서 뱃일로 먹고 살았는데, 그 모든 게 잊혀지려고 할 쯤에 상자가 멀쩡히 제 옆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제가 산에 버리고 온 것들이 그대로 담긴 채로요. 그 이후로 산을 마음 속에서 지울 수가 없더랍니다."

청해대사는 종근의 이야기나, 감정이나 판단에 대해 딱히 논평하지 않았다.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불심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제외하면 극도로 합리적인 사람이었으니, 아직 땅 위에 세워진 청해진을 다스리는 사람일 적에 종근의 이 모든 하소연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를 단순히 헛소리꾼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와 그의 선원들은 호마가 보낸 고래를 얻어 타고 천길 물 속에 잠겨 있지 않았던가. 대사는 호마가 사람인지 귀신인지도 알지 못했으니, 분명 옛날의 대사라면 할 수 있었을 조언이나 반박들을 지금의 그는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다행히도 종근은 청해대사에게 해답을 묻지 않았다.

"호마는 알까요?"

"응?"

"장군님이 찾고 계신다는 그 사람 말입니다. 그런데 호마는 사람이 맞습니까? 사람이 영원히 사는 짐승을 제맘대로 부릴 줄 안다는 얘기는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습니다."

청해대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도 모르네. 어쩌면 사람도 귀신도 아니고 거북이나 학 같은 영물일지도. 그래서 자네는 호마가 자네와 산 사이에 얽힌 인연을 알려줄 거라고 생각하나?"

"걸어볼 만 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제가 지금까지 만나고 말을 나눈 사람들 중에 답을 아는 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 호마라고 하는 자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아는 게 많아 보입니다만. 또 어쩌면 사람이 아니라 더 나은 무언가일 수도 있으니 또 어찌 아니라고만 하겠습니까?"

"내가 처음 수부들에게 호마를 찾으러 간다고 했을 때, 자네가 제일 먼저 찬성했지." 청해대사는 곰곰이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것 때문이었나?"

종근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나는 모른다'라기보단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에 가까운 표현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장군…… 생사의 이치를 어지럽혀 가면서까지 호마를 찾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는 호마가 사람인지 아닌지 논하고 있지만, 마가라가 산 사람의 운명에서 억지로 끌어낸 우리는 과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청해대사도 처음 마가라에 올랐을 때부터 언젠가는 대답할 필요가 있겠구나 싶었던 질문이었다. 그는 지체없이 대답했다.

"살아있으면 사람이지." 그의 말투는 거침없었다. "다른 의견을 말해 보게. 이래야 사람이다, 저래야 사람이다 하는 것들이야 많지만 죽은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

종근은 말이 없었다.

"내가 청해진의 대사로서 무엇을 제일 중히 여겼는지 자네는 아네. 청해진에 들어오던 그 온갖 금은보화가 기억나나? 범인들이 기억하는 건 그런 것들이었지. 보물, 재산, 산해진미…… 하지만 나는, 자네 같은 수부들이 청해진과 그 사람들을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면 웃음짓던 것이 그 어떤 것보다 먼저 떠오른다네. 또 나를 믿고 따라 주었던 완도 사람들이 밤에 안심하고 잠들거나, 내일 굶는다는 생각 없이 오늘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기뻐하는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해. 살아있는 사람들만이 그렇게 웃고 그렇게 기뻐할 수 있는 법이지. 죽은 사람들이 그럴 수 있을 것 같나? 곧 죽을 사람들은 그럴 수 있을 것 같나?"

"그걸로 되는 겁니까?"

"마가라를 생각해 보게. 호마는 분명 살아 있는 사람의 숨이 멎는 것을 원치 않네. 적어도 마가라에 탄 우리가 죽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은 분명해. 그는 산 사람을 원하네. 그것도 그냥 숨만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사람을."

종근의 낯빛은 여전히 어두웠다. 청해대사의 말이 허황된 것이 아님을 그도 알고는 있었지만.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장군."

"지금 당장 납득하라고 요구할 생각은 없네, 수부장." 청해대사는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 "일단은 우리 앞에 놓인 과업에 집중하세나. 시간이 지나면 자네 앞에 놓인 길이 분명히 보이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다시 나를 찾아오게."


애산 앞바다에서 큰 싸움이 있었다.

애산에는 원래 아무것도 없었다. 큰 싸움이 있은 뒤에도 마찬가지로 텅 빈 땅이었으나 이제는 더 쓸쓸하고 비참한 곳이 되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땅보다 더 비참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때 사람들의 발길이 있었으나 이제 끊기게 된 땅, 버려진 땅…… 애산은 버려진 섬들의 무덤이 되어 그런 슬프고 애처로운 모습으로, 풍랑에 시달리며 달려온 마가라와 청해진 사람들을 맞이한 것이었다.

그리고 종근은 바로 그곳에 있었다. 마가라는 자신이 할 일이 이곳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로 하여금 이 쓸쓸한 광경을 오래오래 보고 머릿속에 잘 새겨두라는 듯이 파도와 함께 밀려오는 시체와 잔해들을 묵묵히 견뎌내며 수십 분을 바다 위에 가만히 떠 있는 채로 보냈다. 종근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런 마가라를 괴롭히는 시신들과 찢긴 돛, 불탄 자국이 남은 뱃조각 뿐이 아니었다. 애산, 삼강三江과 피로 물든 그 앞바다. 수십만의 수부와 선원과 선비들이 끝까지 지켜내리라 헛되이 맹세했던 옛 왕조의 마지막 땅. 종근은 그런 것들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과거 장군님께서 하신 말씀이 종근의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장군께서는 사람이란 살아있어야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여기 바다에 즐비한 것들은 사람이 아닐 터. 정말 그렇게 구분 지어도 좋은 것인가? 사실 종근은 그 말을 들은 시절로부터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민중이었던 것이다. 허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괴이하게도 종근의 이마에 주름살 하나 생기는 일 없이 이어져 온 그의 여정은 그로 하여금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삶이냐 산이냐?

산이다. 죽음이 아니다. 마가라의 불꽃이 지탱하는 종근의 삶 속에서 둘은 사실 같은 것이다. 마가라는 산을 오르지 못하므로 만약 산을 오를 것이라면 혼자 올라야 한다. 그러면 그는 죽을 것이다. 그런데 왜 산을 올라야 하는가? 돌이켜 보건대 산에 올라서 그의 삶에 좋은 일이 생겼던가? 그의 마음 속에 산이 바위나 나무뿌리처럼 박혀 있는데, 그 덕분에 그의 마음 땅이 단단해졌는가? 산에서 뭘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끝끝내 찾지 못한 채 비척거리며 배 위로 오른 후회 막심한 수부, 그가 바로 종근이었다.

하지만 산이 그의 삶에 박은 못을 생각하면서 마가라의 등에 올라 산에 대한 미련을 통째로 지워버리려고 할 때마다 그의 옆에 상자가 있었다. 사실 종근이 대사에게 털어놓은 이야기에서는 상자가 단 한 번 버려졌으나, 그는 대사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관절 이 상자는 뭐길래 어디에 어떻게 버려지든 똑같이 돌아와서 종근이 그토록 잊고 살려고 하는 그 무익한 갈망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것인가. 사실 종근은 이제 자신이 산에 가야 하는 이유보다도 그 쪽이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상자가 돌아오는 것은 불법佛法의 힘인가? 아니면 귀신의 힘인가? 애초에 누가 그에게 이 상자와 그 팔찌를 주었을까?

수백 년 동안 해결되지 못한 채 쌓여온 고민과 의문이 종근을 강하게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마가라의 등 위에 바닷바람을 맞으며 그는 서 있었으나, 그의 정신은 억만 근의 쇳덩이 아래 깔린 것처럼 엎어져 일어서려 안간힘을 썼다. 애산 앞바다에 불던 사나운 바람은 자신 앞에 병약한 정신이 있는 것을 알기라도 하였는지, 더욱 흉폭한 폭풍이 되어 몰아치기 시작했다. 넘실거리던 파도가 더욱 위압적인 모습으로 그 위에 표류하던 모든 전쟁의 흔적들을 후려치기 시작하자 청해진의 용감한 수부들도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마가라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종근도 마찬가지였다. 그 거대한 폭풍이 종근을 후려치자, 마치 화두話頭를 수행하는 제자를 스승이 후려쳐 깨우는 것과 같았다. 종근은 그 한 순간에 눈을 떴다. 그의 눈 앞에 하나의 곧은 길이 쏘아져 나가는데,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뻗어지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종근이 길의 끝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 길의 시작이었는데, 거기에는 산 속에 버려진 아기 시절의 자신이 있었다.

아기 시절의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을 거두어 준 스님들, 스님들이 찾은 쪽지와, 그의 것이 된 상자와 팔찌, 상자 안에 든 것, 불타는 산간의 절과 그가 상자를 버리고 나온 것, 뱃일, 청해진, 장군과 호마와 호마가 보낸 마가라, 생사의 이치를 장군과 논하던 것, 애산 앞바다와 광풍이 모두 그 한 길 위에 순서대로 놓여 있었다. 그 순간 종근은 이것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고, 자신이 살고 겪으며 제멋대로 무의미하다 여기고 후회했던 모든 것이 차곡차곡 쌓여 자기 삶이 마침내 멈추게 되는 그곳까지 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종근은 그 모든 것을 '쌓기' 시작했다. 그는 그와 일평생 함께한 상자와 팔찌를 모퉁잇돌로 삼고, 자기가 만나고 함께 지내었던 사람들을 기둥으로 삼았다. 그 사람들은 이제 모두 죽었다…… 청해대사를 제외하고. 따라서 그 기둥 위에 청해대사가 버티고 섰다. 청해대사가 말했다. "살아있어야 사람이다." 그 한 마디 말 위에 많은 것을 놓을 수 있었다. 불타버린 산을 놓았다. 돌아가신 스님들을 놓았다. 역사 속에 사라진 신라를 놓았다. 애산 앞바다의 사람이 아닌 것들을 놓았다. 양 옆에서 호마와 마가라가 그들의 불꽃으로 탑의 꼭대기를 비추었다. 탑의 맨 윗부분은 바로 애산이었다.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버려진 섬이었다. 그 섬의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탑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을 때 종근은 멈추었다. 저 탑의 꼭대기에 바로 그가 평생 고민하던 질문의 해답을 얹어야 했다. 종근은 이윽고 몸을 돌려, 자신을 향해 뻗어나가는 길을 거꾸로 보지 않고 길의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탑 위에 무엇이 올라가야 할 지 알았다.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종근은 함교에서 수백 년 전 그때처럼 청해대사와 함께 앉아 있었다. 종근은 그때와는 달리 잘 정리된 계획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약간은 서글프게, 그러나 확신에 찬 태도로 대사에게 말했다.

"저는 떠나야 합니다."

"그렇군." 청해대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역시 산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는 어려웠나?"

"산은 그저 높은 곳일 필요가 있기 때문에 오를 뿐입니다."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지금 종근의 얼굴에는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는 알겠습니다. 제 목적은 산이 아닙니다. 산은 그저 제 목표를 이룰 수단일 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잠시 바깥으로 나가지 않으시렵니까?"

두 사람은 함께 함교에서 나와 마가라의 등 위에 올라섰다. 하늘은 푸르고 맑았으며, 바다는 잔잔히 출렁거렸다. 그러나 어딘가 묘하게 불쾌한 것이 그 풍경 속에 있었다. 그들은 청해진이 마가라에게 구원받은 바로 그 날, 땅 위에 세워진 청해진이 아직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완도 앞에 있었다. 청해진이 무너진 것도 이제 까마득한 오래 전의 일이건만, 완도에는 또다시 연기와 죽음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땅에서 들려오는 소문에 따르면, 관백関白 이 한때 신라가 있던 땅을 제 것으로 하려 군사를 일으켰다고 했다. 그들이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은 바로 그 큰 싸움이 훑고 지나간 흔적임이 분명했다. 청해진은 오랜 시간 동안 물 위에서 모습을 숨기는 법을 터득하였기에 뭍에 있는 사람들은 마가라를 보지 못했으나, 마가라 위의 두 사람은 청해진의 옛 땅을 불태우고 다니는 왜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언제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어나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종근이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자네가 저런 사람들이 땅에 묻히는 것처럼 죽어 묻히지 않길 바라네. 자네는 수부장으로서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야. 마가라에 자네 같은 수부장이 없다면 청해진도 예전같지 않을 걸세."

"압니다."

"자네가 마가라와 이별하는 순간에 자네는 죽을 걸세. 그토록 오랫동안 버텨왔던 자네의 살과 뼈가 자네를 배신할 테고, 자네는 흉측하게 늙은 그 몸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마지막 숨을 내쉴 테지."

"그 바닥은 어떤 것일까요?"

"뭐?"

"흙바닥이냐, 돌바닥이냐 하는 말이었습니다." 종근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뻗어 저 너머 펼쳐진 수평선을 가리켰다.

"장군, 보십시오. 저기에 바다가 있습니다. 저 드넓고도 드넓은 바다 위에 수천만의 섬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니까 마가라의 우리가 아니라 배를 타고 바다를 누비는 우리 모두는 그 셀 수 없이 많은 섬 위에 올라 집을 짓고, 가축을 키우고, 삶을 살았습니다. 청해진도 완도에 뿌리를 내렸던 시절에는 다를 바 없었지요. 섬은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위에서 살며 섬을 가꾸기 시작하자 거기에 풀이 자라고 짐승들이 뛰놀게 되었습니다. 섬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것처럼 사람들은 서로 싸웠습니다. 서로 싸우고 죽여 결국에는 섬 위에 아무도 남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미워하고 증오했다 이겁니다. 사람이 사라지고 나서 짐승들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풀도 사라지고, 풀뿌리가 붙잡아두고 있던 흙도 바람에 날려 사라졌습니다. 종국에는 섬에 바위들만 남아, 처량하게 버려진 꼴이 되었습니다. 장군도 기억하시겠지요. 우리는 그렇게 변해가는 것을 우리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래, 그랬지." 청해대사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종근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게 다 자네와 무슨 상관인가?"

"장군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람은 살아있어야 사람이라고. 저는 이렇게 괴이하게 연명하고 있는 우리도 과연 살아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지가 늘 궁금했습니다. 애산에서 그 참혹한 광경을 봤을 때, 어쩌면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산 사람들이 그저 자기 혼자 사는 것으로 그 삶을 끝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보여드린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기억하시는지요?"

"기억하네."

"그것을 생각하고, 제 안에 있는 산에 대한 갈망을 생각하고, 또 마가라에 머물며 연구하고 알게 된 것을 모두 그러모아 놓고 보니, 제 앞에 갈 길이 명확해졌습니다. 제가 산에 올라가야 하는 것은 버려진 섬들 때문입니다.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짐승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풀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모두 사라진, 그런 처량한 섬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저는 죽게 되겠지만 말입니다."

청해대사는 자신의 수부장이 하는 말을 주의깊게 경청하고, 한때 그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상자 속 내용물을 떠올린 뒤, 경탄했다. 비록 그는 자신의 충성스럽고 유능한 부하를 떠나보내야 하겠지만, 종근을 보내주는 것이 호마에게로 더 가까워지는 첩경임을 대사는 알아차렸다.

"알겠네. 하지만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을 터인데, 내가 도울 게 있는가?"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압니다. 나머지 하나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청해대사는 그 나머지 하나를 찾아냈다. 그렇게 크지는 않으나, 아주 높이 우뚝 솟은 산이 하나 있는 남쪽 바다의 섬이었다. 마가라가 해안에 머물러 있는 사이 청해대사가 보낸 부하들은 산을 빙 둘러 한 바퀴를 돌아도 모두 마가라의 불꽃에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청해진은 섬의 해안가에서 잔치를 열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때로 마가라에 오른 사람들 중 뭍의 인연을 버릴 수 없었던 자나 아니면 더 이상 삶에 미련이 없는 자들이 청해진을 떠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청해대사는 잔치를 열어, 땅에 발을 붙이고 살든 땅과 하나가 되든 그들과는 이별하게 될 사람을 위해 만찬을 열고 술잔을 기울이며 그를 배웅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열린 잔치는 이전과 달랐다. 청해진의 거의 모두가 종근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그가 청해진을 위해 어떤 일을 해 주었는지, 어떻게 살았고 어떤 마음을 품었으며 어떠한 말을 했는지 그들 모두가 알았다. 이제 그런 그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임무를 위해 마가라를 떠나 스스로를 바치려 하는 모습을 보며, 잔치에 참석한 모두가 뭐라 말할 수 없는 경외심을 느꼈다.

기쁨이 있으나 경박하지 않았던 그 엄숙한 이별의 장에서, 종근은 청해진 사람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잔을 나누고, 청해대사를 향해 한 번 절한 뒤 몸을 돌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수부들은 그의 기이한 상자와, 옥구슬 하나가 끼워진 수상한 팔찌, 그리고 여느때와 같이 무감정하지만 뜻모를 밝은 빛이 서려 있는 그의 맑은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자기들 나름대로 그들의 수부장을 배웅했다.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가파르고 험했다. 종근은 숨이 찼으나, 오랫동안 뱃일로 단련된 그의 몸과 그 몸에 여전히 원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는 마가라의 불꽃 덕에 종근은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고 돌과 흙을 밟고 올랐다. 그는 올라가면서, 마치 마가라가 자신이 하려는 일을 응원하고 지켜보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 그 영험한 고래는 실제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종근은 정상에 올랐다. 그곳은 산이 세워져 있는 좁은 섬보다도 더 비좁은 곳이었지만, 그래도 몇 발 정도 걸음을 옮길 만큼의 공간은 있었다. 종근은 앞으로 다가가 천길 낭떠러지 위의 풍경을 보았다. 사방에 펼쳐진 바다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바다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종근은 바다 너머에 있을 버려진 섬들을 짐작해 보고, 그 위에 있었으나 사라져 버린 생명을 애도했다.

그때 별안간 그의 뒤에서 무언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종근이 몸을 돌리자, 늙지도 젊지도 않은 흰 옷의 사내 하나가 그의 뒤에 있는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게 아닌가.

"바로 당신이었군요." 종근이 말했다.

사내는 대답하는 대신 크게 웃었다. 그가 웃는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는 사람도 같이 웃게 만드는, 진정 행복으로 가득하고 그때문에 전염성이 강한 웃음이었다. 그래서 종근도 웃었다. 두 사람은 눈물까지 흘리며 저 바다 너머까지 들릴 웃음을 터뜨리다가 한참 뒤에야 진정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나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 내가 누구냐고 묻더군." 그 사내가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 채 말했다. "하지만 그걸 말하는 사람이 자네일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했어. 그러면 자네는 이제야 자네 이야기의 끝을 보게 되겠군 그래. 잘 왔네. 나는 이 날을 오래도록 기다렸지."

"참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럼 제 발목에 글을 적어서 묶어놓은 것도 당신이겠군요?"

"어디 그뿐인가. 상자와 팔찌도 다 내가 자네에게 준 거야."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종근의 손을 맞잡았다. "종근이라, 참 좋은 이름이야. 스님들이 참 좋은 이름을 지어 주셨어. 어쩜 그리도 자네 갈 길을 정확히 아셨는지."

"저 아래에 당신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 그게 참 놀라워. 나는 청해진이 무너지려 하는 걸 보았다네. 그들의 대장은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과 자신의 목숨을 구하길 원했고, 나는 그들의 청을 들어주었지. 그래서 마가라를 보낸 거야. 그가 아끼는 사람들 중에 자네도 포함되어 있었을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나?" 사내는 마가라가 있는 곳을 짐작하려는 듯 한 방향을 바라보며 말하다가, 다시 눈을 돌려 종근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때가 되면 깨달을 테지만, 이제 저들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네. 하지만 자네는 관련이 있지. 팔찌를 주겠나?"

종근은 자신의 오른팔에서 팔찌를 빼내어 사내에게 주었다. 사내는 그 팔찌를 받아 염주 세듯이 자신의 손으로 팔찌의 구슬들을 하나씩 넘기다가, 옥구슬에서 멈췄다.

"이 옥은 사실 이 섬에서 난 것이야. 아주 오래 전에, 심지어 신라보다 오래된 옛날에 사람들이 이 산에서 옥을 캐냈지. 나는 그들이 참 좋았어. 그래서 그들을 도왔지. 그러자 사람들은 내게 이 조그만 옥으로 보답했네. 그 자체로는 보잘것 없는 물건이지만 나는 사람들의 정성을 본다네. 이건 그들이 이 섬에서 처음으로 손에 넣은 옥이거든.

이 섬에 살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자 모두 사라졌네. 다른 섬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고. 또 다른 섬에서, 또 그 다음 섬에서……" 사내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나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게 슬펐다네. 하지만 사람들이 사라질 때 다른 것들도 같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 더더욱 마음이 아팠어."

"그래서 그 상자를?"

"나는 버려진 섬들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더 나아가 생명에게 버려지지 않기를 원한다네."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팔찌를 옷소매 속으로 넣었다. "하지만 내가 직접 그렇게 바꿀 수는 없어. 섬을 버린 죄는 사람의 죄이지, 생명의 죄가 아니니까. 그래서 사람이 직접 그 상자를 손에 넣고, 사용하는 방법을 스스로 깨달아 알 필요가 있었지. 사실 그건 어려운 일이야. 백년 살고 나서 사라지는 사람의 일생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지. 하지만 내게는 시간이 많아. 언젠가 이 산 위로 자네의 후손이나 뭐 그런 사람이 상자를 들고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올라온 사람이 종근 자네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네. 자네가 어떻게 마가라를 찾았는지 원…… 참 기묘한 일이야, 그렇지?"

"참으로 그렇습니다."

"솔직히 정말 대단하다고 말해주고 싶어. 이곳은 바다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참 바람이 뜸한 곳 중 하나인데, 일 년에 단 하루 동안은 안 그렇지. 그게 오늘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냈나?"

종근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쑥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마가라가 큰 도움이 됐죠.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지만, 결국에는 알게 되었습니다."

"잘했네. 정말 대단해. 자, 이제 마지막 매듭을 풀어 보도록 할까……"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섰다.

저 아래에서 맑고 청아하면서도 사람의 늘어진 마음을 다시 팽팽하게 하는 마가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가라가……?"

"이제 그는 이 섬을 떠날 걸세. 이제 정말 자네 삶의 결말이 가까워져 가는군." 사내는 팔을 들어 수평선을 가리켰다. "종근, 모든 것이 자네에게 달렸네."

종근은 경건히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수평선을 향해 헤엄쳐 가며 섬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마가라와 청해진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마가라의 따뜻한 불꽃이 종근을 떠나자, 얼음장 같은 바다의 냉기가 종근을 덮쳤다. 그는 차게 식어가지만 떨리지 않는 굳센 손으로 상자를 꺼내 열었다.

곧이어 그가 처음 경험하는 무시무시하게 강력한 돌풍이 그의 뒤로부터 불어왔다. 산바람과 바닷바람이 하나가 되어, 종근이 든 상자 안에 있는 것들을 빼앗아 하루빨리 흩뿌리려 애썼다. 종근은 이 바람이 마침내 자신의 이야기를 끝맺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며, 열린 상자를 머리 위로 들었다.

거세게 부는 바람이, 상자 안에 들어 있었던 조그만 풀씨와 뿌리들을 자기 등 위에 태우고는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종근은 그 순간 수백년 세월의 파도를 한 몸에 받고, 산산이 흩어져 또다른 씨앗과 뿌리가 되어 사내의 배웅을 받으며 섬과 사람들로부터 멀어졌다.

사방으로 퍼져나간 돌풍은 종근과 그의 상자 속 씨앗들을 만리 밖으로 날려, 온 바다의 버려진 섬들, 이제 생명이라곤 없이 흙과 돌만 남아 처량한 노래를 부르는 그들에게 보내주었다. 한때 청해진의 수부장이었던 사람의 흔적이 풀뿌리와 씨앗들과 한데 어우러져, 생명에 목말라하는 빈 땅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버려진 섬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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