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너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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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인해 흐른 피들이 내 손을 자꾸만 적신다… 멎어야 하는데 멎지 않아, 숨을 거둔 시체들이 매트를 빨갛게 물들여, 자꾸만, 영원히…

쾅쾅

방문 두들기는 소리.

"D-1954, 얼굴 벽 보고 손 머리에다 잘 보이게 대세요."

이 좁아터진 방 천장만 몇 시간째 잠도 못 자고 멍하니 쳐다봤는데, 겨우 좀 피곤해지려는 이때 찾아온다고? 이런 씨발…

조용히 몇 초를 가만히 있자, 간수가 문을 다시 세차게 두드린다.

쾅쾅

"D-1954, 지시대로 안 하시면 강제로 시킬 수 있습니다. 지금 일어나시고 말씀드린 대로만 하시면 편안하게 나오실 수 있습니다. 얕은 수 자꾸 쓰시면 저한테 끌려서 나오십니다."

아는 목소리다. 올(Aule) 요원은 참을성 없기로 유명했다. 또 너그러움 없기로도. 그냥 순순히 따르기로 한다. 약간은 투덜거리면서.

벌써 여기서 석 달째다. 나나 여기나 대체 뭣들 하는 건지 아직도 십중팔구는 이해가 안 간다만, 어떤 정부기관 비슷한 곳인 듯은 하다… 무슨 "재단"이라던데… 그런 것들을 연구하는… "그런 것" 말고 그것들을 뭐라 할지 모르겠다. 아직 나는 비질만 하고 피만 뽑아주고, 그 이상한 것들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만… 다른 재소자 (혹은 저 사람들 말로는 "D계급") 하는 말들을 듣자면… 저 사람들이 보통 시간 아닐 때 찾아오기만 하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끼이익, 경첩 소리를 내며 철문이 열린다. 위엄 가득한 경비원이 신중하게 다가오는 모습이 곁눈으로 보인다. 공식 서류상 나는 "정서 불안한" 살인자인지라, 방을 나서야 할 때마다 이런 대접을 굳이 받는다. 뭐 그것 때문만도 아니긴 한데… 경비원이 날 이렇게 적대시하는 데는 내가 죽인 사람들의 나이도 한 몫 한다.

"오케이, 손 등 뒤로 하고 출입구 쪽으로 얼른 가만히 서세요."

"젠장, 내가 어떻게 죽는지 나도 참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빈정거리니, 허리춤을 딱딱하고 차가운 총신이 푹 찌른다. 그만하기로 한다.

"장난 같으시죠? 갑시다, D-1954."

"저 이름 있는 거 모릅니까?"

"지금은 없습니다."


맨 먼저 시체들을 묻는다. 조그맣다… 너무 조그맣고 너무 가벼워. 카를(Carl)부터 먼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 자기 그림 보여주면서 인생 최고 걸작이라 자랑하곤 했어. 이 통통한 얼굴이 이제는 스케치북 백짓장보다 하얀색, 그리고 가슴팍엔 커다랗게 빨간 반점, 지붕 그릴 때보다 더 짙은 빨간색.

"꾸물거리지 마세요!"

호통소리, 나도 모르게 멈춰선다. 주황색 유니폼 입은 친구가 바닥을 대걸레질하느라 열심이다. 피웅덩이, 새빨갛네…

그 다음은 제레미(Jérémy). 우리 장남. 평소처럼 흙투성이 무릎. 노란색 검은색, 제일 좋아하는 슈퍼히어로 문양 있는 티셔츠가, 목에서 콸콸 나온 피 때문에 찐득해졌네. 이 조그만 시체를 정원에다 묻는데, 물방울 하나가 손에 똑 떨어진다. 이상해. 비도 안 오는걸.

"뭘 그리 보십니까, D계급 인원?"

한 연구원이 펑펑 우는 동료를 달랜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모양이다. 쯔쯔… 딱하고 바보같은 인생, 하지만 살아가야지.

"D-1954, 아직 도착 안 했습니다. 계속 가세요."

마지막으로, 알리스(Alice). 작디작고 항상 웃던 우리 알리스. 아빠로서 애들 편애는 안 했지만, 알리스는 제일 많이 좋아했어. 매일 밤 이야기 들려줄 때마다 바짝 나한테 붙었는데. 이제 내가 이 시체에 바짝 붙네… 뺨이 축축해진다. 이상하네. 무슨 소리가 들려. 어떤 웃음소리. 처음에 가볍다가, 나중에 더 요란해지는 웃음소리. 나야. 아내랑 아이들 모두 죽이고 웃는 나야.

"피험자 D-1954, 2015년 5월 17일 아내와 아들 둘, 딸 하나를 살해한 죄로 종신형 선고. 정서불안에 폭력적인 놈인데… 정말 이번 실험에 사용하실 겁니까, 콜리(Cawley) 박사님?"

"그럼. 이런 사연이야 D계급들한테서 넘쳐나니까. 정신이 나가 봤자… 뭐 물론 벌써 나가버린 놈이겠다만, 어쨌든 별로 큰 손해도 아니야. 그리고 나도 어린 자식 죽인 아버지놈이 어떤 질문 받게 될지 궁금하거든."

다 들리는 거 알아? 물론 다 알겠지… 들어봤자 어쩔 건데 싶겠지. 어차피 내가 뭘 또 어쩌게? 내가 저 두 연구원을 마주보긴 한다만, 나는 차 뒤쪽 화물칸에 실려 있고, 구속복을 꽉 입은데다 무장경비원 두 명이 두 눈 부릅뜨고 떡하니 옆에 있다. 그리고 사실, 저네들 말이 맞잖아? 나같은 그냥 미친놈 하나, 어떻게 되든 무슨 대수라고?

에밀리(Emilie)… 네 피가 내 손에 흘러… 아이들 피도 손에 흐르네… 들려, 에밀리?

"문으로 다가가세요, D-1954."

문…이라고? 그래, 내가 뭘 기대했는진 나도 모르겠지만 그런 건 아닌가 보다. 이렇게 죽는 건가… 근데 무슨 문이지? 벽장인가? 벽장이면 괴물 튀어나와서, 나보고 혹시 맛있으세요 그렇게 물어보고 나서 생으로 처묵처묵하고, 그 동안 저 착한 콜리 박사하고 그 꼬꼬마 멍멍이는 완전 신나서, 이 문은 이놈 앞의 다른 불쌍한 놈들처럼 자식 죽인 아버지 맛있게 먹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이번 실험 정말 흥미로웠다 그렇게 메모하고, 그런 결말이라도 되나 보지.

하지만 아니었다.

"누가 알리스를 죽였는가?"

흠칫, 뒤를 돌아봤다. 올 요원, 그냥 차갑게 이쪽을 째려보고, 연구원과 조수, 관심으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그 밖에 아무도 없는데… 그리고 셋 중에 이 질문을 했을 사람도 없다. 그럼 설마… 이 문에서?

"누가 알리스를 죽였는가?"

아무도 질문을 반복하지 않아… 그저 나만… 자꾸 머릿속에 들려와… 무슨 뜻이야? 어떻게? 왜? 아무도…

"D-1954, 질문에 대답하세요."

몸이 떨려온다. 모르는 거야? 내가 죽인 줄? 다 알잖아, 내가 살인자야, 나라고… 제발 이러지 마, 빨리 저기 괴물 꺼내서 나 먹으라고 해줘…

"D-1954?"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어. 내가 였어. 가 죽어. 내가 안 죽였어. 내가 안 죽였어. 그녀가. 그녀가. 그녀가. 그녀가.

"D-1954, 어서 질문에 대답 —"

"입 닥쳐, 내가 안 죽였어!"

관찰하는 세 명이 모두 흠칫 놀란다. 올이 무기를 빼어든다. 콜리가 명령만 하면 바로 쏘겠단 듯.

"에밀리야… 에밀리가 모두 죽였어…"

끼익

순간, 그 소리가 들린다. 누구나 다 아는, 문 열리는 소리. 하지만 그냥 문이 아냐. 내 문. 정원으로 가는 문. 모두 묻힌 거기로.

나아간다. 구속복이 스스로 풀어진 게 느껴지지만, 놀랍지 않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소리치는 게 들리지만, 돌아보고 싶지 않다. 걸어가 문지방을 넘어선다. 곧바로, 확 바뀐 공기가 느껴진다. 갓 깎은 잔디 특유의 향. 그리고 거기 보인다. 에밀리. 한 손에 칼 들린 에밀리. 발치에 카를과 제레미의 시체, 무릎에는 잠든 알리스. 에밀리가 깜짝 놀라 날 바라보다…

"자기 왔어? 저녁때까지 올지 몰랐는데. 아들들 벌써 재워뒀어. 알리스도 잘 건데 그 전에 이야기 들려주고 있을래?"

"…그래."

내 칼이 에밀리의 배를 찌른다. 언제부터 내가 칼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상관없다. 에밀리가 마지막으로 날 쳐다보고, 내 뺨을 어루만진다.

"자기 일찍 안 왔으면 나 혼자 잠들려 그랬는데…"

그리고 내 발치로 쓰러진다. 알리스가 여전히, 푹 자고 있다. 에밀리한테 내가 줬던 알약 먹고 자는 거겠지. 왠지 난 항상 알고 있었다.

내가 모두 죽였다. 하지만 야누스 신이, 내 죄를 일부나마 씻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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