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자리한 것은 광명이나 그의 눈으로는 어둠밖에 인식할 수 없었다.
김다희는 취조실에 앉아 있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복도와 복도 사이를 헤치고 나아가면 이곳이었다. 제21K기지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이곳. 다희는 눈을 돌려 문가를 응시했다. 철저하게 밀폐되어 공기 한 점 들어오지 않을 것만 같은 분위기에, 그는 질식할 것만 같은 긴장을 느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시인의 말마따나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가 그 자신을 덮치고 있었으니까.
상황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김다희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오랜 근무로 말미암은 피로, 숙소에서의 취침, 그리고 새벽에 문을 부수고 들어온 기동특무부대였다. 기동특무부대는 잠에 취한 상태의 그를 우악스럽게 깨워 붙들어 갔다. 설명을 요구하면 번번이 무시당했다.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임이 재단의 생활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런 그에게도 이런 일은 익숙지 않았다. 그러나 무얼 어떻게 하겠는가. 그저 얌전히 붙들려 갈 수밖에.
그렇게 온 곳이 이곳이다. 다희는 이곳에서 약 3시간여의 하릴없는 시간을 기다렸고 아무도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아무리 강단 있는 사람이라도 이런 단체—재단에 속한 이라면 이런 상황을 반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은 일종의 사형 선고와도 같은 결정을 표방하는 일이 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다희는 도시전설처럼 들은 재단의 처형 방식을 떠올리고 문득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갈라진 흔적같이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공포는 마취제처럼 육체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무력화시킨다. 정신에 가해지는 고통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것은 고독한 공포뿐만이 아니다. 그는 들어왔을 때부터 같은 방 안에 존재하는 어떤 기계를 인지하고 있었다. 기계는 마치 치과 의자처럼 생겼는데, 거기에 CT 기계를 융합한 것처럼 생겼다. 이따금 작동음이 들릴 때를 제외하고는 기계는 대체로 과묵하다. 다희는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이를 찬찬히 관찰하였다. 처음 보는 기계였다. 적어도 다희의 주 종목—공간 변칙에 관련된 기계가 아님은 확실했다. 타 팀과의 협력으로 대부분의 변칙 연구에 쓰이는 기계는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기계는 상당히 낯설었다. 새롭게 개발된 고문 기계인가 하고, 다희는 생각한다. 실소가 입안을 맴돈다.
다희는 허공을 응시하며 이 상황을 타개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 시도도 수백 번쯤 되풀이된 행위다. 사실인즉 그는 특무부대가 그를 봉고에 태운 그 순간부터 그런 시도를 했다. 그러나 시도는 시도에 불과했으며 실제적인 결과는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시도가 그 자체로 남을 때마다 절망은 조금씩 그의 가슴 한구석을 물들여갔다. 절망과 자책, 그리고 반성. 김다희는 문득 이 공간이 그에게만 주어진 일종의 회개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린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되짚으면서 과연 그 상부, 그 세세한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상부의 시야에 거슬리는 행동을 한 것이 뭐가 있는지를 찾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찾는다고 해서 딱히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을 텐데도. 다희는 실소를 흘린다.
이미 상황은 이렇게 되었다.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김다희는 저도 모르게 그곳을 응시했다.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였다. 특색 없는 얼굴이었지만, 다희는 왜인지 모르게 스산한 느낌을 받았다. 여자의 가슴팍에 걸린 인원증에는 김미영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김다희 선임연구원?"
여자가 큰소리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카리스마 있었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의 주도권은 자기에게 가지고 있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는 그 사실을 전혀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이런 일에는 도가 튼 듯한 사람이었다.
"제09K기지 소속," 여자는 묻고 있는 게 아니었다. "공간변칙 연구팀장."
"네, 네. 그게 저에요." 김다희는 갈라진 목소리로 응답했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데요?"
"별 거 아닙니다, 김 연구원. 단순한 절차에요."
"뭐요, 저, 절차요? 한밤중에 자는 사람 깨워갖고 델꼬 오는 기 무신—"
다희는 점차 다가오는 여자의 표정을 보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무표정한 그 얼굴에 흐르는 서늘한 감각은 절대 이 모든 상황이 단순한 절차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지만,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이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예지 아닌 예지 역시 동반하게 하고 있었다.
"전 제21K기지 정보부 보안1팀 김미영 팀장입니다. 김다희 연구원을 호출한 사람이고요."
호출, 이라. 김다희는 농담도 잘하시네, 라는 말을 목 끝에서 애써 꾹 누르고는 김미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이 다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속을 드러내놓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다희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간단한 검사 이후 면담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해당 평가에서 아무런 문제점도 밝혀지지 않는다면 근무지로 귀소 조치시켜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군일 때는 평가. 적일 때는 심문. 어디서 들은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다희의 뇌리에 그러한 말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설마—
"저기요."
김미영이 예의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며 김다희를 바라보았다.
"내게 씌워진 혐의 정도는 알려줘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여자는 잠시 말이 없더니, 등을 돌렸다.
"시작해."
그건 다희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자, 잠깐만!"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곧 취조실 문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들어와 다희를 붙들었다. 다희는 저항하려고 했지만 요원들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는 곧장 입에 재갈이 물리고 줄곧 옆을 지키고 있던 그 기계에 결박당해 눕혀졌다.
진짜 고문 기계였어?
다희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끈이 살에 파고들어 아파졌지만, 생존 본능이 더 강했다. 처음 보는 사람, 요원들과 함께 내려온 사람이 버둥거리고 있는 다희의 옆에 와서 섰다. 흰 가운을 입고 다크서클이 진한 그 남자는 모로 보나 다희 자신과 같은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임에 분명한 듯싶었다. 김다희는 버둥거리는 도중에도 남자와 눈을 마주치려고 시도했다. 도와달라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안녕하세요."
다희는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지금 한쪽은 꽁꽁 묶여 말도 못하는데 인사를 건넨다고?
"우리도 여성분 이렇게 꽁꽁 묶는 취미는 없지만…" 남자가 기계 화면을 툭툭 건드리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어쩔 수가 없네요."
"쓸데없는 이야기하지 마세요." 김미영이 멀리서 끼어들었다.
"아, 미안합니다, 김 팀장."
남자는 유들유들하게 받아넘기고는 다시 다희에게로 몸을 숙였다. 그의 가슴 아래서 흔들거리는 인원증에는 고신재라는 이름이 정자로 박혀 있었다.
차가운 촉감이 갑작스럽게 다희의 이마에 닿았다. 깜짝 놀라 숨을 내뱉은 그는 재빨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기 위해 최대한 고개를 돌려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다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저 금속성의 천장뿐이었다. 강제로 치과 치료를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 연구원, 이건 JUNG 아키텍쳐 기반 심상 스캐너입니다." 김미영이 어느샌가 다희의 옆으로 거닐어 왔다. "말 그대로 심상을 디지털 정보로 치환하여 해석하는 장치죠."
다희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김미영은 피곤한 것 같았다. 그저 지나가는 일이라는 듯이. 그저 또 다른 심문 중 하나라는 듯이. 그런 감상이 들자 다희는 긴장이 풀리기는커녕 더욱 어떤 공포가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몇 명이나 죽었을까. 몇 명이나 이 정체불명의 기계에 당하고 말았을까. 말은 번지르르하지만 김다희는 김미영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기계의 용도를 말해주는 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재단은 거짓과 은폐로 돌아가는 존재였으니까.
"긴장하지 마세요." 남자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조금 따끔할 겁니다."
따끔? 다희는 눈을 부릅뜨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고신재는 옆에서 어떤 약물이 든 주사기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흘러내렸다. 김다희는 생존 본능에서 비롯된 괴력으로 온 힘을 다해 몸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버둥거림이 심해지자 참관하고 있던 요원들이 그의 어깨와 다리를 붙잡고 고정시켰다.
주사바늘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김다희는 의식을 잃었다.

Художник-варвар кистью сонной
Картину гения чернит
И свой рисунок беззаконный
Над ней бессмысленно чертит.
Но краски чуждые, с летами,
Спадают ветхой чешуей;
Созданье гения пред нами
Выходит с прежней красотой.
Так исчезают заблужденья
С измученной души моей,
И возникают в ней виденья
Первоначальных, чистых дней.
어느 화가가 우매한 몽롱한 붓으로
천재의 그림을 검정 칠하고
자신의 엉터리 그림을
그 위에 어리석게 덧칠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낯선 그림은
노후한 비늘처럼 떨어져 나가고
천재의 작품은 우리 앞에
예전의 아름다움으로 되돌아오다.
그렇게 고통받은 내 영혼에서
오해는 사라지고,
그 속에서 처음 순수한 날의
환영들이 다시 살아난다.
"…그래서요?"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상황이 다 정리된 이후였어요. 난 3층에 눕혀져 있었고, 한 사람이 내 옆에 있었죠."
어떤 빛. 구속된 몸은 자유의 공기를 즐긴다. 나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망막에 내리쬐는 햇살에 다시 눈을 감는다. 아니, 햇살이 아니다. 강렬한 전등의 빛. 나는 몸을 일으키고, 동시에 내 옆에 앉아있는 한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 본 적이 있다. 젊어 보이는 인상에 눈동자가 보이지 않게 웃는 모습.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무어라 말을 하려고 시도하지만 목이 아파서 아무런 단어나 문장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다.
"나중에서야 그 사람이 제01K기지 인사이사관보라는 걸 알았어요. 강유택, 심 연구원도 알죠?"
"모를 리가요." 심시영이 진이 빠진단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 도무지 속내를 모르겠다니까요."
"하하, 인정하는 바에요. 이강수 이사관과 거의 동급일 걸요."
"그나마 이강수 이사관은 매사에 웃고라도 있지." 시영이 툴툴거렸다.
나는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선다. 밖에서는 아까 보았던 인사들이 서 있다. 김미영 팀장은 조금 뚱해 보이는 인상이다. 그야 그렇겠지. 매번 이어지던 취조의 나날 중 유일하게 변칙적인 날이 아니겠는가. 남자는 조금 편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내게 손을 흔들고 있다. 대책 없이 마음 편한 인종임을 알 수 있다.
강유택 인사이사관보가 내게 의자를 가져다주고, 방금까지 있었던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제야 나는 이 모든 일이 일곱 시간 전에 종결되었음을 깨닫는다. 내게 주사된 최면제의 효과가 너무 강했던 모양이다. 나는 말없이 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듣는다. 그리고 이 일련의 상황이 그야말로 오랜만에 신이 내게 내린 엿이란 사실을 인지한다.
"난 처음에 상황 듣고 언니가 스파이라는 게 제일 웃겼다니까."
"그러게나 말이에요."
"그래도 내부보안부로 상황 이전되기 직전에 정보부에서 마지막으로 검사하겠다고 막아서서 다행이라곤 생각해요." 시영이 카페라테를 입안에 털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아시잖아요. 광역정보국이랑 내부보안부 치들, 그 사람들은… 아직도 옛날 방식으로 한다는 소문."
"그건 그래." 다희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대꾸했다. "아이러니하기도 하죠. 나는 그이들이 날 죽이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날 살려준 은인들이라니."
"정보부 사람들이 마냥 음침한 사람들은 아니니까. 난 오히려 무속학부 사람들이 더 특이해." 시영이 킬킬댔다. "참, 미영 씨한테 사과는 들었어요?"
"네, 되게 덤덤하게 하더라고요."
다희는 그 무표정한 얼굴에서 흘러나온 사과의 말을 떠올렸다. 신기하게 찬바람이 부는 것 같지는 않은 감촉의 언어. 그래서 그는 김미영에게 괜찮다고 말할 수 있었다.
"원래 그런 표정인가…"
"네, 미영 씨 원래 그래요. 가끔 보면 발렌타인이 미영 씨보다 감정 풍부한 것 같아."
"발렌타인?"
"네, 여기 인공지능징집병 있어요. 그러게 내가 21K로 전근 오랬잖아."
"됐거든요, 이제 서울 쪽으로 머리 대고도 안 잘 거야. 이런 꼴을 당했는데." 다희가 웃음기 섞인 투로 농을 던졌다.
"그런데, 대체 왜 언니가 스파이라는 거에요?"
갑작스럽게 던진 시영의 질문에, 다희의 얼굴에 조금 그늘이 깃들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다희가 뒷목을 문질렀다. "자세한 건 나한테도 알려주질 않더군요. 단지 어떠한 상황이 있었고, 그 상황과 연관된 증거가 나를 가리켰는데, 알고 보니 증거에 착오가 있었다고…"
"뒤가 구린데요."
"맞아요. 그런데도 하는 수 없더군요. 일단은 더 험한 꼴 안 당한 걸 다행으로 여기고 있어요."
다희는 어깨를 으쓱였다.
거짓말의 식감은 이질적이었다.
나는 눈앞에 서 있는 자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다시 한 번 묻는다.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느냐고. 누가 그런 짓을 걸리지 않고 자행할 수가 있느냐고.
강유택 인사이사관보가 내게 태블릿을 건넨다. 태블릿의 화면에는 제37K기지의 화상이 담겨 있다. SCP-100-KO의 일부로 변환되고 있는 그 모습이.
"누군가 제37K기지의 보안을 파괴하고 타 기지와의 연락을 전부 끊은 뒤, 이와 같은 일을 자행했어." 강유택이 편안한 목소리로 설명한다. "해당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에 이태진 박사가 암호화된 메세지로 상황을 설명했는데, 그 내부에 배반자가 있다고 했지. 우리 측은 자세한 이야기를 요구했지만 답은 다시 오지 않더군."
"하지만," 목소리가 떨려 나온다. "하지만 그게 어째서 제가 이 일을 벌였다는 이유가 되는 거죠?"
"두 가지 이유가 있었지." 강유택은 내 항변 아닌 항변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히 말을 이어간다. "첫째는 이런 일에 능숙하면서도 최근 제37K기지에 다녀온 기록이 있었던 인원 중 하나가 당신이었다는 것."
차가운 공기가 목에 와 닿는다.
"둘째는… 누군가 당신이 한 일이라고 밀고한 것."
"…네?"
"그리고 그 밀고가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강유택이 잠시 말을 멈춘다. "너무나도 교묘한 술수였어. 우리 측 인공지능징집병들조차 그 밀고의 발신자가 가짜 신원을 달고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거든."
"대체…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거죠?"
"그건 아직 우리도 몰라."
인사이사관보가 씨익 웃어 보인다.
"누군지는 몰라도 판 하나 벌일 작정인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