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물의 색 - 제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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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은 눈보다 약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그는 다양한 폭발 실험을 통해 천천히 자신의 감정을 되찾으려 했다.

  각양각색의 "문제가 생겼다"라는 상황에서도, 그는 그가 가진 과감한 의사결정과 일 처리 효율성을 보여주었다.

  심지어는 많은 사람들이 '불같은 아이스버그'라는 별명 뒤에도 몇 가지 별명이나 칭호를 덧붙였다. 누군가 그 일을 중점적으로 강조하는 사람이 있는 것 마냥, '유언 해결사 아이스버그 박사'라는 칭호나, 또 예를 들어 '재단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 '서류 소각장' 같은 칭호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날 또 한번 경고 서류를 받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방금 전 기어스 박사가 통행증을 긁고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올 때의 표정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그래, 몇 년 전과 같이 여느 때처럼 무표정했다.

  '냉혹하고 무정하다.'

  그는 문서의 한 구절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분명히……" 내쉬의 무리가 또 뒤에서 제멋대로 무슨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 건가. 아니, 가만 있어 봐. 내쉬는 이미 1년 전에 SCP-1013한테 죽었잖아.

  그래서 그는 그 생각을 고이 접어두었다.

  확실히, 그날 이후 기어스는 그의 정서적인 문제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간혹가다 오늘처럼 자신의 상사로부터 경고 서류를 받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줄곧 바뀌지 않았음을 느꼈다. 몇 년 전과 똑같았다. 약을 끊은 이상, 더 나빠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현장을 잘만 돌아다니던 그 아이스버그였다.

  비록 그가 확실히 여성에게 흥미를 잃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게 무언가를 의미하진 않았다.

  그 이후에 감정을 잃어버리게 된 것도 아니잖아? 그는 여전히 여자들에게 치근덕거릴 수 있었고, 그게 자신을 업무에서 벗어나게만 해준다면 그는 기쁜 마음으로 여자들에게 치근덕거릴 것이었다.

  그도 자신의 인생이 비참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기어스와 함께 실험하면서, 그도 여러 케테르 등급 변칙 개체들과 접촉 할 수 있게 됬다. 이 일을 업무에서의 이정표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심지어는 가끔 콘드라키 박사와 함께 무기 개발 업무를 진행하기도 했다. 콘드라키는 SCP의 무기화가 주 업무였고, 자신은 신형 폭탄을 개발하는 것이 주 업무였지만, 어쨌든 협력하여 일할 수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이 콘드라키의 자리를 대신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까진 괜찮지 않을까?
  

  "아이스버그 박사, 전에 그 약에 대해 말했지 않나?" 몇 년인가 시간이 흘러, 당시 유유하던 그 글라스는 벌써 재단의 수석 심리학자가 되었다. 솔직히 말해, 그는 이제 직접 일할 필요 없이 부하에게 일을 떠넘겨도 됐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특별 명단을 가지고 있었고, 아이스버그는 그 특별 명단에 올라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몇 년 전부터, 당시 그는 글라스에게 자신의 정신 상태에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 각별히 부탁했다. 그는 어쨌든 안정제를 복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매일 이렇게 과도한 양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했다. 그는 자신을 진정시킬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온종일 폭탄을 들고 다른 사람을 쫓으며 화풀이하는 것은 결코 해결방법이 될 수 없었다. 그래, 그건 해결 방법이 될 수 없어.

  그러니깐 나는 글라스의 특별한 사례일 뿐이지, 환자는 아니라고.

  "불만 접수 빈도가 늘어났군."

  "그래? 늘어났다고 느끼진 않았는데."

  "극히 위험한 SCP의 격리 파기 사태에 직면한다면, 자넨 먼저 무엇을 할 건가?"

  "냉정한 측면에서 보자면, 아마도 폭탄을 사용해서 사태를 해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2년 전 자네의 대답은, 자신은 단지 일개 2등급 연구원이니 살아 남기 위해 도망가는 게 더 중요하다였네." 글라스의 말투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는 한 장 한 장 자료를 넘기며, 빽빽한 자료 위의 글씨를 보았다. "도망가는 것. 그게 일반 저등급 연구원이 해야 할 일이지."

  "자네가 격리 전문가인가? 아니면 요원인가?"

  "자넨 격리 전문가도 요원도 아닐세. 자넨 연구원일세. 일개 2등급 연구원일 뿐이라고."

  "그래서 뭐?"

  글라스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곤 자신이 갖고 있던 아이스버그 본인에 대한 파일을 건네주었다. "나는 자네를 환자로 생각하지 않고 친구로 생각하네. 하지만 자네를 도울 수 있는 건 이게 마지막일세. 더 조사할 수는 없을 거 같네. 이후에 내 권한 범위로는…… 더 접근할 수 없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아이스버그는 두꺼운 서류를 받아 간단하게 훑어보곤 눈앞의 심리학자를 옅은 푸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얼음과 눈을 비교해보면 얼음은 사람을 쉽게 죽일 수 있네. 처마 끝에서 맑고 투명한 고드름이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머리엔 구멍이 날 수 있지. 얼음은 물체를 자르는 데도 이용될 수 있고. 그렇지만 얼음은 약하기 때문에 뭐든 부딪히는 것만으로도 산산이 조각나 결정이 되어 지면에 흩어지게 되네. 하지만 눈은 그렇지 않아. 눈은 부드럽기에 뭐든 덮을 수 있네."

  "그래서,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야?"

  "자넨 스스로를 얼음이 아닌 눈으로 만들 방법을 생각해야 하네."
  

  아이스버그는 밤을 새워 수중의 모든 서류를 훑어보다가 짧은 샤워를 했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야 자신과 관련해서 글라스가 모아 준 자료를 꺼냈다. 자료에는 그의 심리상담에 대한 것이나 글라스와 아이스버그의 대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기록에는 가끔 초록이나 붉은색, 파란색의 라벨이 붙여져 있었고, 그 표시들은 어떤 결과와 대응될 것인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들을 고려하여, 난 제안한다……"

  끝 페이지의 마지막 줄 문장은 뭔가에 의해 중단된 듯 완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새끼가 항상 신중하던 글라스의 말을 끊어버릴 수 있는 걸까?

  그는 종이를 꺼내 베개에 누워선 램프를 비추어 자세히 살펴보았고, 마침내 투명한 잉크로 쓰인 듯한 문자 두 개를 발견하였다.

  첫 번째 숫자는 매우 간단해서 한눈에 봐도 그게 파일 코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매일 모든 문서를 편집하고 정리하면서 몇 년째 이런 숫자들을 봐왔다. 그러나, 그 문자 아래에 줄지어진 문자의 길이는 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길었다.

  여전히 작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그는, 서랍에서 노트북을 꺼내 전원을 연결하고 버튼을 눌렀다. 그의 개인용 노트북은 오랫동안 켜져 있지 않았다. 글라스가 이 숫자를 투명한 잉크나 다른 특수 잉크 같은 거로 썼다는 것은 얼핏 보면 알 수 없게 하기 위해, 즉, 그 내용은 이미 자신의 열람 권한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재단에서 배급한 컴퓨터를 사용한다면 꼬리 잡힐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글라스도 말려들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갑자기, 이런 때에도 여전히 문제를 냉정하게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그는 기계공학 박사였다. 박사 과정 시절에는, 가끔 교수의 컴퓨터를 해킹하여 시험지를 먼저 읽어보는 일을 적지 않게 했다. 시카다 33011 사건 때도 그는 세계의 그 누구보다도 굉장히 앞서 있었고, 그렇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단순히 호스트 컴퓨터를 해킹해 파일을 전송했을 뿐이었다.

  이 문자들은 정말 암호화된 코드일까?

  하지만 그건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암호를 해독했지만, 그 문자 하나하나가 상상을 초월했다.

  자신의 손이 왜 떨리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떨리는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차례대로 입력했다.

  그러자 컴퓨터 화면은 검은색으로 변했고, 여러 가지 16진수 기호가 실행되었다. 컴퓨터가 과부하 될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재단의 공식 문서 형식에 맞춘 문서가 화면에 나타났다.

  그는 팝업창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오전 9시, 기어스 박사는 출입증을 긁고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갔다. 책상 위의 컴퓨터는 오전 8시 55분에 자동으로 켜지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그러면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메일을 확인하고, 이후 몇 가지 시급한 계획을 확인하곤 9시 30분에 아이스버그와 만났다. 그는 매일 시간을 이렇게 구상해서 보냈다.

  하지만 이날 기어스는 출입증을 긁고 들어가자, 이미 아이스버그가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는걸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놀란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평온하게 발걸음을 내디딜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전처럼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컴퓨터가 로그인 될 때 까지 기다렸다.

  "계획은 실패했겠네." 아이스버그의 한마디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무슨 계획을 말씀하시는 거죠?"

  "'계승계획' 말이야." 아이스버그는 분노를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약을 복용했을 뿐입니다. 약 때문에 감정이 사라지지도, 꺾이지도 않았다고요."

  "네, 당신은 약 복용을 중지했죠."

  "당신들이 할 일은 이 자리를 대신할 또 다른 기어스를 만드는 거죠."

  "당신은 계획을 볼 권한이 없어야 합니다." 기어스는 마침내 자신의 보조 연구원을 마주 보고자 했다. "책상에 앉아서 일 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때가 되면, 당신도 이해하게 될 겁니다."

  "그때 당신은 프로젝트를 중단하겠다고 약속했을 때, 난 당신이 중립적인 입장에 서길 바랬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 내 체온을 멈춰주지도 않았고. 하지만 나를 너처럼 만들 방법은 없어!"

  그는 흥분하여 총알 여섯 발이 장전된 리볼버를 들고 일어났다.

  "내쉬의 말대로, 당신은 유클리드 등급 격리 전문가야. 근데 왜, 왜 이렇게 유클리드 보다 케테르 등급 프로젝트를 더 많이 책임지고 있을까. 왜냐하면 기어스 박사, 당신은 5등급 연구원이자 케테르 등급 격리 전문가이기 때문이니깐!"

  "그리고 해당 등급의 격리 전문가는 실험과 격리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감정을 나타내선 안 됩니다."

  "그래, 그게 당신이 유일한 케테르 격리 전문가인 이유네."

  "그리고 당신이 두 번째가 될 수 있죠." 기어스는 냉정하게 총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재단에 굉장히 중요한 인재겠네."

  "당신도 그렇습니다. 아이스버그 박사."

  "내 체온은 외로움에 익숙해지도록 설계되었겠지. 왜냐하면 외로움은 익숙해지기 가장 어려우니깐. 내 업무량은 스트레스에 저항하는 능력과 문서 처리 속도를 늘릴 수 있도록 설계되었겠고. 모든 건 미래에 있을 수 있는 격리 실패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고안되었겠지. 너였어. 내 인사 파일에 그 문장을 추가한 건 너였어!"

  "네, 제 짓입니다." 기어스는 여전히 침착했다.

  "어, 어째서?" 그는 지금 자신이 흐느끼며 울고 있는지 몰랐다, 그는 확실히 슬퍼하고 있었다. 그가 확실하게 느끼는 것은 자신을 파묻어 버릴 듯한 슬픔과, 믿고 있던 사람에게 속은 느낌,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 아픔, 분노, 괴로움, 실망, 상실감, 그리고……

  하지만 그걸 표현했을까? 그저 평소보다도 더 차분하게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고 있는 거 아닐까?

  그에겐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스승이자, 그가 실험하도록 이끌었던 상사였고, 그와 친하며 그를 명확한 길로 이끌어 준 친구였다.

  '당신이 현재 있는 것처럼, 나도 과거에 당신과 같았었고
  내가 현재 있는 것과 같이, 당신도 미래에 나와 같이 될 것이다-
  나를 따를 준비를 하라.'

  그가 묘비명을 발견했을 때, 마침내 기어스의 총애를 받았다는 느낌이 아닌 언젠간 그와 함께 높은 수준에 서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속으로 기뻐 날뛰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충분히 노력하기만 하면 말이다.

  "저는 보통 사람이기 때문에 죽을 겁니다." 그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재단은…… 배어링을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난 실패했어. 그렇잖아!" 그는 방아쇠를 당겨 연달아 여러 발을 발사했다. 마치 그가 흘렸어야 할 눈물처럼, 총알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는 자신이 흘렸어야 할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만약 그가 정말 울었다면 말이다.

  "제 실패입니다, 아이스버그 박사." 눈앞의 남자는 차분하게 말했다. 아이스버그는 세 발의 총알이 모두 빗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은 단지 기어스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신은 결국 저와 다른 사람이긴 하지만 억제제를 포함하여 모든 건 제 계획 범위 안에 있었습니다. 그날, 당신은 저에게 억제제 복용을 끊고 감정을 자신의 능력으로 제어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도 모두 제 계산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눈이 될 방법이 없단 건 계산하지 못했지."

  "당신이 그렇게 비유를 하고 싶으시다면야, 그렇죠." 그가 말하였다. "저희는 감정을 못 느끼는 연구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연구원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중립적인 입장이라고 하셨는데, 당신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건 다른 박사의 계획과는 다르니까요. 이 계획은 당신이 제안하고 당신이 주도하는 겁니다. O5는 반대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 계획은 제가 2등급 연구원으로 승진했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보통, 제 결정은 O5의 반대를 받지 않습니다."

  "기어스 박사!"

  "죄송합니다, 제가 적응을 너무 잘한 탓입니다." 기어스가 일어서며 말했다.

  회색 눈동자는 눈앞에 자신보다 조금 더 키가 큰 연구원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또렷하게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일지도 모른다.

  "울고 있군요."

  "애초에 내 감정을 뺏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는 자신한테서 얼음 결정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반짝반짝 빛나며 바닥에 떨어져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물방울로 변하였다.

  "네." 기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에 대해선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건 가역이 아니야, 그렇잖아! 눈이 부서지면…… 그건 얼음으로 변하겠지만 다시 눈으로 되돌아갈 순 없어."

  "네." 그는 다시 긍정적인 대답을 반복했다. "그 점에 대해서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이스버그는 왼손으로 개머리판을 가볍게 잡곤, 떨리는 오른손을 진정시켰다.

  "난, 난 그저, 다시 당신과 함께 걷던 때로 돌아가고 싶은 것 뿐이야……"

  "네."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압니다."

  결국, 여섯 번째 총알이 그를 다치게 했으나, 뺨을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새빨간 피가 상처에서 흘러내렸다.

  마치 오랜 꿈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그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손의 리볼버가 바닥에 떨어져서 내는 둔탁한 소리는 마치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와도 같았다. 그는 심하게 떨리는 자신의 두 손을 보았다. 피가 묻진 않았으나 마치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인 것 처럼 더럽게 보였다. 아마도 그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그런 계획에 서명했을 것이다.

  그래, 아마도 재단은 그가 살인을 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을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도록 말이다.

  그가 고개를 들자 눈앞의 상사는 표정 변화 없이, 자신을 쳐다보곤 발을 움직여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싫어. 싫어 오지 마. 나한테 다가오지 말라고.

  마음속으로 이렇게나 외쳐댔지만, 이걸 입 밖으로 꺼낼 방법이 없었다. 둘 사이를 책상이 가로막지 않을 때까지, 상사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자신이 숨을 쉴 때마다 흰 연기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기어스도 똑같이 입에서 흰 연기를 내뿜었다. 서리는 이미 기어스의 사무용 책상 위에 기어 올라와 있었다. 이미 오랫동안, 오랫동안, 꽤 오랫동안 이런 일은 없었다. 언제부터 통제할 수 없게 된 걸까?

  언제부턴가 그는 이렇게나 깊은 슬픔을 느끼지 않게 됐다. 자신을 물에 잠기게 할 만큼의 깊은 슬픔도, 믿은 사람에게 속은 느낌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도, 분노도, 고통도, 실망도, 상실도, 그리고……

  난 아직 사람이야, 아직 기계가 되진 않았다고.

  하지만 이 사실을 지금에서야 깨닫는 건, 내가 더 이상 평범하지 않다는 뜻 아닐까, 그렇지?

  "떠나셔도 좋습니다. 기억 소거나 전근 처리를 하겠습니다. 오늘 모든 서류에 서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내일 다른 부서로 갈 수 있습니다."

  기어스의 시선이 그의 연구 조수에게 쏠렸다.

  하지만 후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아이스버그는 웃는 얼굴로 울면서 실성할 뿐이었다. "사람의 영혼을 구성하는 건 생각과 기억이야. 이것들이 모두 없어져도 난 여전히 나일 수 있을까?"

  "하지만 살아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난 살아 있을 필요가 없어, 기어스." 그는 다시 말했다. "난 살아 있을 필요 없어."

  그도, 그의 감정도 여전히 얼음처럼 연약하다. 실수로 한번 떨어뜨린 것 만으로도 여러 개로 나뉘어 부서지겠지만, 그것도 결국 자신의 일부분이며, 그가 보호하고자 했던 부분이었다.

  "양복 안에 항상 총을 소지하고 다니는거 알아." 그가 말했다. 그는 기어스의 가죽 구두 위로 서리가 오르는 것을 보고 감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콘드라키 박사한테 했던 것처럼. 제발, 그 총으로 날 쏴줘.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이번에 그는 마침내 눈가의 눈물에 피부를 데었다…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미 그것들은 얼음덩이가 되어 방 안에 흩어졌기 때문에, 그는 단지 눈물이 흐르는 것만 느꼈고, 자신의 일부가 줄어들고 자신의 마음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는 분명히 이 방의 온도가 점점 낮아지고 있는 것 때문일 것이다.

  앞에 있던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반자동 권총을 꺼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권총을 휴대하고 다녔다. 효과가 그렇게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권총이 스스로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마지막 한 발만을 남기더라도 더 나은 결말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의 손이 무언갈 말하고 싶어하는 듯, 기어스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내 꿈은……

  ……나한테 너무 중요해.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불길에 휩싸여 끝날 것이라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얼음에 잠겨 끝날 것이라 말한다.'

  왠지 모르게 이런 시가 생각났다. 지금의 나에게는 안성맞춤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증오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고 있기에,
    얼음도 불 못지않게
   충분히 세상을 파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계속 이어져갔고


  

  그리고 마침내, 모든 소음이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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