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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는 무엇이냐? 커다란 모자 쓰고 수엽 덥수룩한 노인?

사실 오컬트, 비전 같은 은비학 업계는 보통 생각하는 모습하고 전혀 다르다. 마법사라 하면 떠올리기 쉬운 모습은 화염구를 적들의 얼굴로 던지는 자, 소악마 한 떼거지를 언제라도 풀어놓는 자, 생긴 건 가운 걸친 멍청이면서 오만 능력을 다 실행하는 자겠지만…

착각이다.

가장 먼저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마법사는 민간인과 그냥 똑같다. 면도기가 뭔지 당연히 알고, 멋 좀 부릴 자리에는 양복 입고 넥타이 매고 나간다. 문외한이 말하는 소위 "마법"이란 기술은 흔히 상상하는 모습보다 좀더 번거롭다. 마법은 팔로 공중을 휘저으면서 이상한 의성어 외친다고 발동하지 않는다. "아브라카다브라", "스투페파이", "샤비디바비디부" 같은 말 꺼낸 적도 없다. 말 나왔으니 이미지를 한걸음 더 깨부수자면, 진짜 마법은 몇 시간에 걸친 의식과 바보같은 기도문 몇 개로 이루어진다. 화염구를 날린다고? 한 개 날리는 데 두 달 걸린다. 마법식 세우는 데 한 달, 동그라미 그리고 기적학 회로 짜서 식 구현하는 데 3주, 최종 시험에 1주, 그러면 전구만한 화염구 하나 나온다. 이 기간도 도중에 뭐가 튀어나와서 얼굴에 닥돌 안할 때 그렇다. 그러니 아무 마법사나 붙잡고 화염구 날려달라고 부탁해봐라. 혹시나 마법사가 착하다면 라이터랑 헝겊이랑 도수 쎈 술병을 준다.

화염병이야말로 진짜 화염구다. 1분이면 만들어내고 재료가 간단한데다 어디에나 있으니까.

은비학이 완전히 쓸데없다는 소리는 아니다. 이따금 가능성의 한계를 한 걸음 넓혀주는 건 사실이니까. 중요한 점은 인류가 마법 대신 전기를 즐겨 사용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단 것이다. 오컬트는 일상생활에서는 확실히 쓸모없고, 돈이 안 되기는 독보적이다. 살면서 밥벌이를 못한다고 보증까지 설 수 있다. 내가 살아봤으니까. 7년차 "프리랜서 강령술사"로.

자본주의 관점으로 이런 쪽 업계에 거대한 시장이 존재할 것 아니냐 생각할 사람도 있겠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수천 가족들이 재회의 꿈을 꾸며 기꺼이 상당한 가격을 지불한다든가. 하지만 "상당한" 가격과 충분한 가격은 다르다. 일단 재료가 비싸다. 무지 비싸다. 더구나 결과가 기대하는 그대로냐도 문제다. 보통 기대하는 모습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멀쩡하게 다시 깨어나 로맨틱한 BGM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포옹을 나누는 장면일 텐데, 세상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저세상이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되어먹었는지, 상상은 재밌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 사람을 살려내면 직면하는 상황 때문인지 영혼을 뽑아내는 행동 때문인지 몰라도 당사자한테 피해가 막심하다. 한번 살아나면 다시 죽는 소리로 비명을 질러서 귀청을 다 박살내고 엄청나게 경련하느라 뼈가 다 부서진다. 이것도 그나마 낭만적으로 왜곡한 표현이고, 이 사건이 가족한테 그때만 문제가 되고 마는 것도 아니고…

물론 트라우마를 떼어놓을 방법도 있기는 하다. 특정한 수를 동원하면 일부분에만 다시 생명을 불어넣을 수는 있다. 그런데 그랬다간 뇌가 산낙지 되기 일쑤다. 결국 강령술은 기적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소망하는 그 기적은 아니다. 죽은 사람한테 미리 작업해놔서 산 채로 관 속에 모셔두다 마술쇼하는 것도 아니면, 진짜 "시장"이란 갑부들이 몇백만씩 기꺼이 지불하면서 전남편이나 전아내가 죽음 속에서 절규하는 모습을 구경시켜 달라고 조르는 것밖에 없다. 물론 그런 고객이야 아주 만족한다만은, 그런 예시를 농담으로도 업계 표준이라고는 안 부른다.

결국에 강령술을 배워서 사람 살리면서 돈을 버는 최고의 방법은, 사람 살리는 강령술을 안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돈을 버느냐? 대상을 제대로 선택하고, 간단한 원칙 하나를 따르면 된다. "입을 막아주자." 말 못하는 언어장애인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반려동물 이야기다. 할머니가 푸들이나 치와와, 고양이 기르는 데 기꺼이 퍼붓는 돈이 어디 한두 푼일까? 한번 고객이 생겨나면 나머지는 훨씬 쉽다. 일단 간단하고 값싼 "묘기", 내 수준에 맞는 요술을 부려서 마음을 쏙 빼놓는다. 그렇게 확신을 사서 동물의 육신을 나한테 맡긴다고 동의를 얻어낸다.

이게 뭐냐면 원래의 육신이 너무 망가져서 다른 육신에 "영혼을 옮겨담아야" 한다고 말해주는 거다. 고객에게 "저승에서 영혼을 분간해야 하니" 동물의 성격이 어떤지, 평소에 좋아하는 물건이 뭐였는지 자세하게 물어본다.

그러고 나서 가까운 동물 보호소에서 행동이 비슷한 녀석을 골라온다. 사실 보호소를 오래 드나들다 보니 요즘은 무슨 영웅, 입양의 왕 취급을 받는다. 이런 일 덕분에 슬픔을 더는 사람은 고객뿐만이 아니다 이 말이지. 그러고서 신비해 보이지만 별 의미 없는 기호를 동물한테 서너 개 그려주면 안 속는 고객이 없다. 몇 주 동안 고객에게 익숙해지도록 훈련시키고 나서 떡하니 넘겨주면 끝이다.

"행동이 조금 달라졌다"라고 고객이 말하면 "강령술의 후유증이 조금 남은 모양"이라고 둘러대면 된다. 설명의 구멍이야 고객이 낙담하면서 스스로 채워진다. 끝으로 운만 좋으면 플라시보 약을 "영혼이 새 육체에 적응을 거부하는 현상을 막아준다"라며 평생 팔아먹을 수도 있다. 1정당 큰 거 한 장에.

물론 사기치고는 좀 커다랗지만, 웬만해서 걸리는 일은 없다. 고객은 언제나 알아서 눈가리개를 찾아 써서 믿고 싶은 것만 골라서 믿어준다. 실제로 맨 처음에 사람 말 너무 잘 믿어주는 상호구 두 명만 공들여서 설득해 줬더니, 자기하고 딱 맞는 지인들한테 나를 열정적으로 소개해 주느라고들 어느 새 이 주변에서는 내 "능력"을 감히 의심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월 수입도 금세 몇만 유로까지 오르고. 물론 GOC한테 잡혔다간 인생 종칠 테고 사실 잡는 게 당연하지만, 공인 멀쩡히 받고 존경까지 받는 수의사가 그리 쉽게 잡힐까? 금지된 책을 몇 권 가지기는 했지만 GOC가 의심하는 자료들은 동물병원하고는 전혀 무관하고, 그 바닥에서 내가 맡는 일들은 심심풀이 수준으로 설렁설렁 하는데다 워낙에 미미한 분야라서 별로 주목받지도 않는다.

물론 나는 인간의 문제 따위 실용적 수단으로서도 밥벌이 수단으로서도 관심없다. 쓸모없고 위험하고 골아프다. 평소에는 할 일 없으면 보통 달팽이를 연구한다. 하필 달팽이인 이유는 제일 크게는 소리를 안 질러서 그렇지만, 호기심을 채우는 데 달팽이만한 동물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다. 몇 가지 사소하게 궁금한 점을 이 녀석들로 해결해 봤더니 요즘은 주말에 부업으로 돈 뜯을 때 말고는 항상 달팽이만 만지는 참이다.

직업은 원활하고 수익은 짭짤하다. 인생이 아름답다. 은행이 날 사랑한다. 고객이 날 사랑한다. 나도 날 사랑한다. 부정 안한다. 이런 사소한 직업에서 돈이 솟아나올 방법을 마련하고 레이더망을 벗어난 채로 지내니까 나 자신이 천재 같다.

하지만 지금, 이 남자를 눈앞에 두고 서니 나 자신이 병신 같다. 이분도 동의해줄 것 같다. 죽었으니 못하겠지만.

이 시체를 데리고 온 저 자식들 세 명한테 본인의 직업 선택 문제에 추가 의견을 달라고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저 코트에서 삐져나온 총부리를 보자니 당장은 그따위 생각이야 잠시 집어치우는 쪽이 더 낫겠다 싶기도 하다.

이 자식들은 저녁때 가게 문을 닫으려는 참에 들이닥쳤다. 이제 문 닫는다고 말하려고 그랬는데, 코트에 피 흥건히 묻힌 사람한테 그런 소리 하기 좀 어려웠다. 이런 일은 못하겠다고 말하려고도 그랬는데, 다른 두 사람에 수술대에다 무슨 월요일 출근하듯이 시체를 올려놓으니까 그런 소리도 하기 좀 어려웠다.

살면서 이때보다 무서운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짐작이 안 갔다. 이 자식들이 누구인지, 내 가게는 어떻게 알았는지, 나한테 말을 거는 저 자식 이마에 난 큰 상처는 뭔지.

"이 녀석 살려내."

"저… 죄송한데… 이분은 벌써 죽으…셨지 않나요?"

"맞아. 살려내. 들을 말이 있어."

"제가 그런 쪽을… 아니… 뭐랄까… 죽은 분은 죽은 분 아닌가요?"

"맞아. 그러니까 병원 말고 여기로 왔지. 살려내."

"네? 어떻게 여기를-"

"다 알고 왔어. 키키Kiki를 살린 놈이면 유세프Youssef도 살릴 수 있겠지."

"키키요?"

"회색 페키니즈 있잖아, 마담이 키우시던."

죽을지도 모른다는 압박으로 기억을 뒤죽박죽 두서없이 헤집었다. 꽤나 빠르게 떠올려냈다. 마담 드 로네de Launey. 그 괴짜 할멈. 이쪽 업계는 이것저것 잘 안다고 나름 자칭하는데 실제로는 현실을 구부리는 조정자와 숟가락 구부리는 마술사도 구별 못하는 사람이었다. 마치 손가락 자르기 마술 보고 나서 마술이란 무엇인지 연구하기로 맹세한 어린이 같았다. 돈은 꼬박꼬박 챙겨주니까 좋았지만 나도 이 할멈이 크리스마스 기대하듯이 자기 개가 죽기를 기다려서 악취미삼아 오컬트를 즐기려고 앉았는지 의심할락말락하던 참이었다. 안락사당한 개를 냉동보존해서 데려오는 고객이 절대 흔할 리가 없잖는가. 뭐 그래도 그때는 상관없었다. 주인이 개를 잘 모를수록 속이기 훨씬 쉬우니까.

"마담 이름 걸고 오실 거면 마담도 이런 일을 아셔야죠, 엄연한 고객인-"

"원래 그런 거 따지는 사람 아니라면서. 마담이 그러시던데. 돈은 두둑하게 줄 거야."

"돈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본질적으로-"

"원칙 문제. 알아. 다시 말하는데 마담이 다 말하셨어, 당신이 지키는 도리가 뭔지. 근데 원칙은 원래 유연한 거야. 정의는 좀 덜 유연하겠지. 이 녀석 말을 들어야 해. 오늘 저녁에 성경대한테 우리 이름을 팔아넘긴 자식 이름을 들어야 한다고. 살려내면 너나 나나 부자가 될 수 있어. 실패하면 너 죽고 나 죽어."

"그렇다 해도 저-"

"부탁 따위 아니야. 오컬트 연합한테 잡혀서 엿되기 싫으면 얼른 움직여."

"그래도 인간은-"

"잘 들어 등신아. 몇 시간이고 통사정할 생각 없어, 몇 시간을! 인간이고 말고는 우리 사정 아니야. 개를 살릴 줄 알면 유세프도 살릴 줄 알아야 말이 되지. 딱 몇 분이라도 상관없어, 어떤 놈이 지랄해서 목숨을 끊어버렸는지 알기만 하면. 총알 맞기 전에 움직이기나 하라고! 몰래카메라 찍으러 이러는 것 같아?"

"제가-"

"입 싸물어 빙신아! 우리가 너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을 것 같아? 너한테 선택지가 있는 줄 알아?"

"저-"

"더 말대꾸 안해줘 이새끼야! 빨리 이 녀석 살려, 머리통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정말 대답하려고 그랬는데 권총 때문에 차마 신음소리 하나 꺼내지도 못했다.

시체 "유세프"는 수술대에 누워 있었다. 방금 한 빨래처럼 새하얬다. 뭐 시체치고는 평범한 일 같았다. 그럴 만도 하지.

어느 새 메스를 들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는 듯이. 세 사람은 이제 나를 교장 선생님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뭐부터 해야 할지 도저히 짐작이 안 갔다.

달팽이나 만지고 놀았는데…

칼자국 흉터 난 남자가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냈다. 생각해보니 지금 메스만 덩그러니 든 채로 머릿속에서 생각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마법의 손짓이라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아무 생각이 안 났다. 빨리 뭐라도 하자 싶어졌다. 일단 옷을 벗기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대체 뭐하러 메스를 집어들었을까? 절망이 너무 큰 나머지 메스를 셔츠에다 꽂아버렸다. 셔츠 자르기. 이거 괜찮네. 옷부터 벗기면 전문가스럽고 시간도 벌겠다 싶었다. 처음 행동치곤 괜찮네.

영겁의 시간이 지나기를 기도하며 옷을 벗겼다. 세상에서 제일 느리게 옷 벗기는 사람 아닐까. 완전히 괜찮은 생각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할 시간은 벌었지만 기분은 더욱 뒤흔들렸다. 시체의 차가운 가슴을 보자니 두려워졌다. 실수로 손이 닿자 손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다음으로 뭘 할지 생각이 안 났다. 뭘 할지 자체가 생각이 안 났다. 죽음만, 내 면전으로 닥쳐온 죽음만 생각났다. 오늘밤에 내가 죽는구나 하고 확신이 들었다. 가슴팍에서 셔츠가 잘 떨어지지 않았다. 가슴을 온통 뒤덮은 피가 다 말라붙어서 피부에다 옷을 끈끈히 붙여두고 있었다. 옷을 잡고 확 떼어냈다. 동전만한 구멍이 심장 한복판에 2개 뚫렸고, 테두리에 피가 특히 흥건했다. 말라붙은 피 부스러기 너머로 수술대가 빤히 보였다. 두 눈을 감았는데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듯했다. 입을 다물었는데도 이를 훤히 드러내고 웃는 듯했다. 그때 내 앞에 있던 것은 한 가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이란 개념 그 자체였다. 지금 같은 경우에 내 죽음은, 가만히 웃으며 거울 너머에서 내 운명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 내가 시체를 내려다보듯이 시체는 나를 내려다봤다. 나와 죽음이 서로 눈을 맞췄다.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강령술사가 죽음이 무섭다고? 그런데 자주들 그렇다. 대개 이렇게 시작한다.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사라진다는 공포, 사후세계의 두려움. 그리고 죽음을 열심히 연구했다고 두려움이 싹 가시는 것도 아니다. 이쪽 바닥의 체계에는 불가피한 것에게서 도망치고 싶다, 저승사자를 따돌리고 싶다 하는 인간의 기초적 본능이 깔려 있다. 성공한 사람은 적고 오랫동안 성공한 사람은 몹시 적다. 불멸이란 이 바닥에서 현자의 돌과 같다. 그저 몽상, 이루지 못할 이상이다. 강령술은 불멸이 불가능한 세계에 반항하는 미봉책이고, 답이 있을까 찾아 헤매며 죽음을 굳이 합리적으로 설명해보겠다는 수단이다. 결국 강령술 따위는 자기의 죽음을 최대한 미루고 불가피한 그 시점까지 남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어볼 방법밖에 안된다. 그 시간을 몇 초, 몇 시간, 며칠, 몇 년으로 늘려보자는 게 강령술사의 소위 이상적 목표다.

내가 하는 짓은 멍청하게 달팽이가 펑 터졌다가 다시 살아났다가 반복하는 거 구경밖에 없었다. 그냥 궁금해서,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서. 이 업계의 선현들이 품었다는 "위대한 동기" 따위 나는 평생 쓸데없다고만 생각했다. 그 평생이 오늘 끝날 예정이었다. 나한테는 앎을 추구한다는 목표 하나면 충분했다. 역사 속에 묻힌 바보들이 말하던 고귀하고 건전한 목표 따위 집착하지 않는다고 자화자찬까지 했다. 하지만 오늘에야 선현들이 이해가 갔다. 심연을 들여다보노라니 이 몇 초가 모든 짓의 대가처럼 느껴졌다. 연구에 매진할 숱한 시간을 날린, 연구 따위 하나도 매진하지 않은 대가.

이 시체가 다시 살아날 일은 없었다. 나는 이론만 아는 사기꾼, 취미 수준밖에 모르는 달팽이 강령술사였다. 유세프가 말할 일은 없었다. 오늘 나는 죽는다.

메스를 내려놓고 수성펜을 집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보고 싶었다. 시체에다 아무 원이나, 아무 기호나 그렸다. 대충 고대 인장처럼, 바꿔치기한 동물들한테 그려놓는 낙서처럼.

오늘이 마지막이다.

울고 싶었다. 세 남자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만 죽 쳐다봤다. 대마법사에게서 구원을 기다리듯이, 어린이가 죽은 친구한테 남근 모양 기호를 그리는 모습을 관찰하듯이. 조금만 있으면 눈치채겠지. 그다음엔 어떡할까? 노래라도 불러? 뭘 어떡해도 총 맞고 개처럼 죽을 거다. 그러면 우주가 인간 보호소에서 나 대신 다른 인간 데려다놓고 그 녀석도 똑같이 죽겠지. 죽음의 두 구멍이 내 눈길을 펌프처럼 빨아들였다. 펌프 끝에는 마지막이 있었다. 내 마지막이.

칼자국 흉터 없는 남자가 다른 둘보다 훨씬 초조하게 나를 바라봤다. 금발이었다. 긴장이 역력했다. 짐작하기로는 내가 성공 못하면 자기도 죽는 줄 훨씬 크게 체감하는 모양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이미 죽었지만 그 사실을 몰랐다. 수성펜이 말라붙은 피에 딱 붙어 있었지만 감히 들어올리지 못했다. 초조한 남자가 진짜로 살릴 수 있냐고 물었다.

애써 슬프게나마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 당연하죠, 제가 이 바닥 프로인데…" 내가 생각해도 개소리다. 할 말은 입에게 완전히 내맡긴 채로 머리는 조금 있다 내 몸에 이렇게 낙서할 자리는 얼마나 남을까 생각해보았다. 마지막 작품 삼아 시선으로 시체의 심장 주위로 나선을 그렸다. 나선의 끝이 보였다. 마지막 장면이었다.

죽음.

탕, 왼쪽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총소리였다. 좋아, 이제 죽었네, 그럴 줄 알았어. 긴장 증세인지 반사적으로 내 머리가 쳐들렸다. 칼자국 흉터 난 남자가 보였다. 얼굴이 총알구멍이 나서 으깨져 있었다. 내 운명을 보는 건가? 너무 잔인하다. 그리고 길다. 매우 길었다. 두 번째 총소리, 세 번째, 넷째. 내가 세상 마지막으로 듣는 소리구나. 그런데 반복해주네. 칼자국 흉터 남자가 어느새 바닥에 고인 피 위로 쓰러졌다. 어우 흉하다. 고개를 돌렸다. 금발 남자도 누워 있었다. 미래의 환영이 도처에 깔렸나 보다. 아니 과거인가. 남은 한 남자를 쳐다봤다. 입에서 피를 쏟고 있었다. 벽에 간신히 기대여 핏물에 질식하는 채로 뭐라 말을 꺼내려 안간힘을 썼다. 남자에게 다가갔다. 시간 바깥에서 내 마지막 유언을 들어보려고.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서, 피 흘리는 남자를 까만 펜을 든 채로 바라봤다. 유언이 흘러나왔다.

"배신자 새끼…"

남자가 마지막 숨결을 내뱉자, 방에 짙은 침묵이 깔렸다. 주변을 데꺽 둘러봤다. 나 혼자 서 있었다. 땅에 쓰러진 남자를 봤다. 죽었다.

내가 아니었다.

내가 살아 있었다.

전혀 예상 못한 결과였다. 나쁜 일이라기보다는 아예 상상외였다. 선 채로 오랫동안 안 움직이고 그대로 있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머리를 비웠다가, 생각이 떠올랐다가, 짐작이 갔다. 유세프가 말하려던 이름은 다름아닌 금발 남자였다. 보복당해 죽을까봐 먼저 죽였던 거다. 그렇게 녀석들은 서로의 손에 죽었다. 내가 뭐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 채로 눈먼 총알 한 방 안 맞은 건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아무튼, 이제 새로운 문제는 가게에 마피아 3명과 정부 스파이 1명의 시체가 누워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살아남았다. 인생 경로와 다른 전개였다. 연합은 건수가 잡히면 술렁술렁 넘어가지 않았다. 이쪽 업계에서 굴러다니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혼자서는.

하지만 나는 살았고, 앞으로도 계속 살고 싶었다. 손에 아직 들린 수성펜, 이걸로 나는 끝까지 세 사람을 속였다. 혼자서 연합과 맞서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면 된다. 나는 사기꾼일지언정 이론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최고는 아니더라도 지식은 풍부하다. 그들에게 나는 소중한 인적 자원이다. 나에게 그들은 마지막 구원이다.

현장에서 황급히 빠져나와 차를 타고 한 시간쯤 달렸다. 가게를 치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떤 도시에 차를 세웠다. 조촐하지만 사람은 꽤 많고 무엇보다 치안이 안전한 곳이었다. 땅바닥에 큼지막한 원을 그리고, 원 안을 가리키는 화살표 세 개를 덧댔다. 그리고 보도에 앉아 기다렸다.

이제 찾아오겠지. 이럴 때면 항상 찾아오니까.

가랑비가 얼굴을 슬며시 적셨다. 나는 살아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살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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