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속의 겨울밤

비가 내리는 것 쯤이야 별 것 아니다.

비는 어쩌면 매달 내렸다. 다만 눈이라는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데 뛰어나다는 점을 감안하면 언제나 어깨에 와 닿는 비를 눈치채기는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였고, 특히나 충분히 남쪽에 위치하여 눈이 잘 오지 않는 곳이라면 당연한 일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비라는 것은 특히 날이 선 기상 현상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눈이 되지 못한 천상의 눈물은 그대로 추락해서 가끔은 어깨 위에서, 더러는 길 위에서 얼어붙어 버리는 일이 있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자객처럼 도로 위로 다니는 모든 물체는 넘어지거나 고꾸라지도록 그 얕은 얼음에 의해 강제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윤성재가 유령이 되고 나서 대단히 기뻤다고 잠시나마 생각한 몇 안 되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였다. 차라리 겨울비를 맞을 일도 없어지면 그러한 기상이 부르는 어떠한 사고에서도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비가 지독하게 위험한 다른 이유라고 하면 다만 물리학적이고 기상학적인 면만이 아니라 윤성재마냥 생각보다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 불행한 독립체들에게 무자비한 공감각적 심상을 주입한다는 점이다. 겨울비가 일단 내려서 가뜩이나 차가운 겨울을 더더욱 식히고 나면 그 한없는 추위 사이에서 다른 눈이나 서리조차도 잊게 만들 정도로 아찔한 기후가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오늘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누군가 죽었다.

윤성재는 이를 언제나 알고 있었다. 심야클럽의 인사부장으로서 다만 오늘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누군가 죽었다, 그 문장을 명심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명심해야 했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유령이라는 희박한 소생 확률을 경시해서는 안 되고, 윤성재는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새로 재탄생한 유령들을 찾아가서 사후에 걸맞는 이야기를 해 두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죽었다는 말에 대한 무게를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 해야 할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소멸과 타락과 광란의 내부 위기와 재단이나 다른 심령능력자들에 의한 외부 위기를 모두 안고 있는 섬세한 존재가 바로 유령이다. 으레 값싼 공포영화라던가 귀신이 나오는 괴담에서 흔히 보이는 그런 유령들처럼 마구잡이로 분노와 설움에 휩싸이는 일이 정말로 있고, 그 단계까지 가면 원귀는 더욱 통제불가능한 존재가 될 것이다.

그 전에 무거운 말을 해 두어 심야클럽을 소개시키는 것이 윤성재의 일이 아닐 수 없다.

윤성재가 처음 죽었던 전쟁이 한창일 때는 누구도 그리 말해주지 않았다.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윤성재가 가슴팍을 찢고 관통해놓은 그 총탄 탓에 쓰러져 누워 있는 동안 수백의 영혼들은 아무 맥락 없이 사라져 갔다. 일단 죽고 나면 모든 것은 생명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전쟁터의 슬픔에 사로잡히거나 분노에 지배당하는 일은 허다했고, 그 어두운 그림자의 어둠 아래에 놓이는 일도 윤성재는 너무나 똑똑히 본 적이 있었다.

칠십 년 전에는 비록 윤성재에게 심야클럽과 같은 어떠한 존재도 없었다. 거의 몇십 년은 클럽 없이 애매한 상태로 전전하면서 다른 유령들과 접촉한 적이 있었다. 그 동안 비록 온갖 경험을 하기는 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맥락이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유령을 구해내야 한다는 그 맥락 속에서 활동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새벽비는 내리며 새벽이 밝아오지 않는다.

너무 이르다. 그 무엇이든 낮과 관련된 것을 찾아두기에는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다. 이 정도야 잘 알고 있는 자만이 밤중에 떳떳하게 방황할 수 있다. 기대해서는 안 된다. 밤중에는 낮 정도의 상식에 지배받을 수가 없다. 이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가 그일 것이다. 마치 박제나 피규어처럼 굳은 채 영원의 삶이 유지되고 있는 그 남자는 얼핏 보기에는 살아 있는 자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이기는 했다.

다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상당한 차이점이 있었다. 으레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어린 새처럼 부드럽게 움직여야 하는 흉부의 동작과 거울 따위에 얼굴이 비칠 때의 그 또렷한 거울상이라던가 체온 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설령 새벽이 밝아오지 않더라도 밤에 익숙한, 이 작은 도시의 몇 안 되는 존재들 중 하나였다. 오히려 태양에 익숙하지 않았다.

윤성재는 고작 영체(靈體)일 뿐인 교복 모자를 푹 눌러쓰고 골목길을 걷는다. 겨울밤은 아직도 죽어가고 있다. 물가에서는 시허연 얼음 위에서 서리 무리가 떼를 지어 춤추며, 땅을 얼려버리는 성에가 내리는 날들이 되었다. 차라리 여름날일 때면 허황된 납량특집으로 귀신들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가 쉴새없이 나오고는 하는데, 윤성재는 이러한 점을 씁쓸하게 여기고는 했다. 비록 실제 유령들이 정말 사람을 죽이는 일이 없느냐 하면 아닐 테지만 그 한 면만을 보는 것은 최악이다. 그래서 윤성재는 간혹 이 겨울을 즐겼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령의 존재조차도 장담할 수 없겠지만.

윤성재는 그림자처럼 벽과 벽 사이를 교묘히 스치면서 목적지로 향했다. 골목은 미로나 세포들의 혈관만큼이나 복잡해서 어쩌면 현지 사람들조차도 이곳에서 확실히 운명을 장담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윤성재 본인이 살던 시절 혹은 적어도 몇십 년 전에는 이런 곳이 정말로 사람을 가두어 놓고 빠져나갈 수 없도록 했다는 말을 들은 바 있다. 지금에서야 온라인과 인터넷의 망 덕분에 큰 문제야 존재하지 않겠지만, 윤성재는 그렇더라도 자신이 길을 잘 찾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 궁금증이 막 불안으로 치닫고 있을 때가 되어서야 그는 낡은 건물과 조우했다.

그 건물은 유명한 곳이 아니였다. 소도시 변방 작은 동네의 작은 지상 4층짜리, 지하 1층짜리인 오랫동안 비워져 있는 건물. 그곳은 주인이 팔아치우고 신경을 끄기 전까지, 그리고 새 주인이 나타나자마자 다시 사라진 그때까지도 유명한 곳이 아니였다. 누군가 거기서 위대한 일을 한 적도 없고, 뜨겁게 사랑한 적도 없고, 기억되지도 않는 곳. 설립될 때부터 그리 가치 없도록 설계된 곳. 이제 아무 것도 남지 아니한 그곳에는 사람의 발길이 몇 주간 없었고, 지금은 차가운 바람이 낡은 창문 새를 할퀴고 지나가면 페인트 파편과 죽은 미물들이 낙엽처럼 흔들릴 뿐이였다.

남자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날아든 바람은 보도블록의 잡초와 이끼의 푸름을 지나 그의 손을 스치고, 그 건물의 안쪽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쉽게 느낄 수 없는 바람의 흐름에서 오는 기묘함은 주의 깊게 살피지 못한다면 눈치채지 못할 터였다. 남자는 근처를 살폈다. 사람 없음. 근처 가게는 문 닫음. 건너편 카메라 시야는 이곳까지 못 닿음. 옆 건물 카메라 한 달 전 고장. 근처에 개입할 것들 없음. 모든 것이 안정적임을 확인하고서야 남자는 손을 들었다. 바닥에 놓인 잔가지, 콘크리트 조각 같은 것들이 보이지 않는 힘으로 떠올라서 건물의 양문을 내리쳤다. 잡동사니들은 으레 더 강한 것과 충돌한 잡것들이 으레 그렇듯이 떨어져 내려갈 따름이였다.

문이 닫힌들 의미 없다.

윤성재는 마치 안개처럼 유연히 흩어졌다가 다시 창문을 통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선다. 안쪽은 비었고 먼지와 알 수 없는 말라죽은 것들이 가득하다. 그는 조용히 계단 위 아래를 응시한다. 기척이 전무하다. 당연하지만 당연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데 지금 이 상황이다. 없나. 이미 소멸해버린 것일까? 사라진 것인가? 최악의 경우라면 이미 재단이나 연합 따위가 개입했을 터지만 그런 기척은 없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 그가 이미—

"아차."

윤성재는 도약하여 공중을 붙잡고 섰다가 뒤로 추락한다. 무언가가 오고 있다. 켜질 이유가 없을 전혀 없을 백열등들이 일제히 반딧불처럼 커진다. 불행한 적수이자 윤성재가 찾아야 했던 그 무엇이 지금 어둔 지하로부터 오고 있었다. 공기가 얼어붙듯이 더더욱 차가워졌다. 어둠이 드리우고 있고 곧 윤성재의 목을 꺾어 죽여버릴 듯 그 무엇이 임박하고 있다. 그는 이 시점에서 세 시간 전을 회상한다. 윤성재는 몇 달을 쉬었다. 그래서, 오늘 길을 떠날 때 한 후배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최고의 유령 윤성재의 귀환이네요.

글쎄, 하면서 윤성재는 그때 너털웃음을 지었던 것 같다. 그리고는 후배더러 오늘 새벽에 아지트로 귀환하면 낮 동안에는 영화를 보겠다고 말하고 길을 나섰다. 윤성재는 겉모습이 어쨌거나 노인이다. 적어도 팔십 살 먹었고, 일본 제국이 땅을 짓누를 때 태어나 남북이 처절하게 싸울 때 죽었으며 그때 다시 눈을 떴다. 그래서였는지 요즈음조차도 옛날 영화가 그렇게나 보고 싶었나 보다. <베니치아에서 죽다>라던가 <전망 좋은 방>이라던가.

왜 그 생각이 지금 났을까. 윤성재의 표정이 미술적으로 굳었다.

쉬익, 하며 대기가 부드럽게 찢어지나 싶더니 유리 조각과 근원 모를 파편들이 날아온다. 윤성재는 공중에 집중하여, 그것들을 순간 조용히 정지시킨다. 바람 소리에 지나지 않는 잡음들만이 맴돌지만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는 차다. 마치 두 개의 공기로 된 차량의 충돌과도 같이 현실이 일순간 팽팽해지고 만다. 윤성재는 공기에 뒤섞인 원념과 창백 그리고 냉기를 느낀다. 이 정도라면 상대는 꽤나 뒤틀린 무엇일 것이 뻔하다. 윤성재마냥.

어쩌피 우리 동류잖아. 윤성재는 그 순간 언젠가 들었던 그 말을 생각해냈다. 어쩌피 결국 유령 대 유령이고, 윤성재는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목적이며 둘 중 하나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망설임 없이 공중을 밀어젖힌다. 갈 곳을 잃고 균형조차 일은 잡동사니들이 와르르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다 침묵한다. 그리고 뻗쳐 나오던 촉수 같은 원념과 감각도 순간 정지하고 만다. 그나마 괜찮아진 것일까.

"저기요—"

윤성재는 길게 외친다. 소년스러운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동굴 안처럼 버려진 건물은 텅 비고 고독해진 탓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분명 이에 대해 안심할 수 없는 것은 상대가 윤성재에게 전혀 응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대화를 거부당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게다가 상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라면 대화는 이어질 가능성조차 잃어버리고 맥락은 쌍소멸해 버린다. 윤성재는 파편이 날아왔던 곳을 추적하여 그곳으로 간다.

그 순간 단말마처럼, 혹은 종언을 고하려는 하느님의 천사들처럼 창백하고 단호한 여성의 음성이 들려온다.

"죽어."

비수처럼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잇따라 물건들이 날아들었다. 깨진 유리병과 잿떨이, 맥주컵, 심지어 어디서 날아왔는지 과도 한 자루까지 닥치는 대로 그의 사지를 겨냥했다. 윤성재에겐 기묘한 일이다. 죽어,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한 번 더 죽는단 말인가. 윤성재는 미친 듯이 날아드는 물건을 보이지 않는 힘으로 공중에서 붙잡아 땅으로 떨어뜨리기를 반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물건 대부분이 남자에게 붙들려 고꾸라진 채였다. 확실히 상대는 원귀였고, 미친 듯이 날서 있었으며 강하고 차디찼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구십 년 먹은 윤성재가 더 강했다,

"죽으라고."

고 생각했다.

격통. 윤성재의 가슴팍에 쓰린 통증이 느껴졌다. 으레 살아있는 육신의 가슴에 주먹이 꽃혔을 때 오는 통증. 그 시야가 비록 흐려졌지만, 상대가 보였다. 아주 짧은 순간 상대는 가까이 왔다. 윤성재보다 조금 나이가 많아 보이는 대학생뻘 여자였다. 흐린 왼손이 주먹을 쥐고 있는 것이 선명했다. 윤성재는 뒤로 엎어질 뻔 하다가 벽을 투과해 복도까지 구르고 나서야 멈췄다.

당연히 이런 종류의 귀신은 정말로 드물었다. 유령이 다른 영적 존재에게까지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이십 년에 한번 나오는 존재였다. 윤성재는 다시 날아오는 물건 여럿을 쳐내며, 시허연 빛에 둘러싸여 있는 여자를 응시했다. 빠르고 강하며 정확한 고통이다. 그놈처럼. 왜? 알기로는 상대가 윤성재 본인에게만 원한을 가졌거나, 그놈처럼 유령 전체를 증오하는 종자도 아닌데.

"잠시만."

윤성재는 다시 일어섰다가, 유리 조각이 잇따라 날아오는 그 순간 새카만 그림자를 터뜨리며 사라졌다. 조각들이 벽에 처절히 박혔다. 그리고 남자는, 목표를 놓치고 미친 듯이 주변 물건들을 휘둘러대는 여자의 바로 위에서 다시 한 번 검은 빛을 터뜨렸다. 짧은 순간 윤성재는 위, 상대는 아래였다. 그는 널브러진 쓰레기통과 파편들, 여자가 던졌던 모든 것들을 공중으로 들어올리고는,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잡동사니들을 내던졌다.

"조금 당황스러우실 겁니다."

꽤나 크게 쾅, 하는 소리가 건물을 울렸다. 독백했듯이 건물 전체가 텅 비어버린 동굴이였기 때문이다. 윤성재는 내려앉았다. 아주 오랜만에 힘을 꽤나 썼다. 그가 발을 디딘 곳에 서리가 시허옇게 지의류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쓰레기통과 식칼 따위가 내려꽂힌 곳에서, 그 간이 무덤 같은 물건들 아래로부터 여자는 천천히 일어났다.

"당신은 살아 있지 않네."

"예. 저도 죽었으니까요."

윤성재는 여자에게 눈을 맞추었다. 아까 전보다는 그나마 그 탁하고 차가운 기운이 덜했다. 아직도 사나운 힘이 맹렬하기는 했지만 그나마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자는 새까만 머리칼과 하얀 옷을 입은 형상이였다. 어떤 시절의 옷인지 감히 가늠할 수는 없어도 윤성재보다 오래된 것은 아니였다. 여자의 눈이 그를 바라보았다.

"……왜 여기까지 온 거야?"

"당신이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초면에 조금 민폐를 끼쳤네요."

"당신은 누구고?"

"저는 심야클럽 인사부장 윤성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여자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마저도 날카로운 삼각자처럼 날선 그림체로 데셍된 양 위압적인 면이 있었다. 하지만 윤성재는 딱히 당황하지 않고 도리어 미소를 지었다. 대부분의 원귀는 고작 몇 합 싸우다가 제압당했다고 이성적이 되지는 않는다. 일이 그나마 쉽게 풀린다는 것의 증명이다. 여자는 물질적이지도 않은 제 어깨를 툭툭 털더니 목을 꺾었다. 비현실적인 포즈였다.

"심야클럽?"

"예. 저희를 아십니까?"

"당연하지. 내 출신이….. 재단인데."

윤성재는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진정행다. 상대가 재단 출신이래도 결국 유령이고, 생전처럼 재단에 충성할 가능성을 상대에게 기대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 뻔함이 분명하지 않는가. 윤성재의 기대는 다행히 상당히 정확했다. 여자는 여전히 날카로운 입꼬리를 올리면서 이것저것 말해주었다. 적어도 윤성재를 기지로 끌고 가 방령 격리실에 집어넣을 의사도 능력도 없음은 명백해 보였다.

"난 여기서 죽었어. 여긴 원래 식인 괴물이 있었거든… 운이 나빴지."

"무서우셨겠군요."

"아니? 그냥 빡쳤어. 평생 인류를 위해 봉사했는데 찾아주는 이 하나 없었거든."

"아."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웃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이내 사색이 되었다. 윤성재는 창백함이 짓는 창백한 표정을 이해하는 데에 도가 튼지라 이를 즉각적으로 간파하고 몸을 웅크렸다. 그 순간 그는 무엇인가를 알아내고 여자에게 빠르게 손짓했다. 여기를 당장 벗어나야 할 것이 분명해졌다.

"재단, 그래."

여자는 탄식했다. 여기는 분명 여자를 죽인 변칙 개체가 있었던 곳이다. 재단이 방심할 리 없다. 윤성재가 꼼꼼히 확인했지만 비밀 기관들은 잠들지 않는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잘 살펴보아도 개인 따위가 재단의 눈동자에서 숨어드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할 것이 뻔했다. 애당초 여자까지도 재단의 계획이였나? 그렇다면 어째야 하는가? 윤성재는 입술을 악물었다. 차라리 피가 났다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뛰죠."

여자는 재단 전직 요원답게 지나칠 정도로 상황 판단이 빨랐다. 윤성재는 그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벽면을 통과했다. 그래도 재단은 살아 있고, 윤성재 일행은 유령이다. 도주라면 그나마 희망은 있다. 막 벽을 통과하여 다시 아스팔트에 발을 내딛는 그 순간 윤성재는 본능적인 서늘함을 느낀다. 하나 혹은 둘. 그 정도의 무엇이 이쪽을 겨누고 있다. 다행히 먼저 발견했기에 어느 정도의 계책은 세울 수 있다. 다만 그 정도가 장난감 수준일 가능성이 무척 농후하다는 점만 제외해 두자면.

퍽, 하는 공기가 산산조각나는 그 소음과 함께 총알 한 발이 가속했다. 그 철탄이 윤성재의 코앞에서 정지했다. 미리 염력으로 장을 두르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온갖 은비학적 기술이 더해진 총알이 윤성재의 심령질을 갈갈히 찢었을 것이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총을 다시 맞는 것은 역시 사절이다. 윤성재는 여자 쪽을 가리면서 살모사처럼 몸을 숙였다. 귀신을 잡으러 왔다. 기동특무부대 을호-2다.

그 순간 다시 사격은 시작되었다. 윤성재가 이번에는 벽돌을 들어 총알을 막아내려 했지만, 총탄이 더 빠르게 가속했다. 아차 하던 그 짧은 순간에 여자는 윤성재를 당겨 다시 건물 안으로 집어넣었다. 윤성재는 맥없이 끌려들어갔고 파열음과 함께 총알은 애먼 건물 벽면에다가 구멍을 남겨버렸다. 윤성재는 윙윙대는 머리를 짚으며 다시 일어났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윤성재는 다시 일어나려다가 여자를 보고 멈춰 섰다. 여자의 몸에서부터 뻗어 나온 붉은 실이 건물 안팎에 연결되어 여자를 고정하고 있었다. 방금까지는 없었는데 언제 생겼던 것인지 가늠조차도 할 수 없었지만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여자는 지박령이다. 먼 거리로 이동할 수는 없다. 방금 윤성재를 건물 안으로 빨아들이듯 했던 그 현상도 분명 여자가 건물과 연결되었던 편린일 것이다.

"…..그쪽 설마."

"기껏 정신 차렸는데 이러네."

여자는 어지럽다는 표정으로 실소했다. 절망적이다. 윤성재는 지박령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한 곳을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존재들. 윤성재는 여자를 데리고 이곳을 나갈 수 없다. 그 사실을 윤성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윤성재는 심야클럽의 인사부장이다. 그래, 후배의 말마따나 최고의 유령 윤성재의 귀환을 한 번 만들어보자. 윤성재는 웅크렸다. 재단이 건물 문을 따고 돌아오기까지 아마 2분.

"들어봐요."

윤성재는 속삭였다. 이런 속삭임이 얼마만인지 몰랐다. 소년의 목소리가 건물을 울리는 바람에 윤성재는 자신이 이렇게 젊었나, 하고 놀랐다. 그는 여자를 빤히 보며 손바닥을 펼쳤다. 기회는 단 한 번이다. 여기서 여자와 윤성재가 공동 실패하면 정말 다음은 없다. 아니 있을지라도 지금 같지는 않을 것이 뻔하다.

"그쪽 이름이 뭐죠?"

"우희영."

"네, 고마워요. 이 건물이 마음에 드나요?"

"그럴 리가 없지."

"그럼 가고 싶은 곳이 있나요?"

"……그러게. 고향에 가고 싶은걸."

그때, 여자를 묶어두었던 실이 빠르게 풀리기 시작했다. 윤성재의 도박이 신속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유령이 한 곳에 평생 쳐박히면 좋아할 재단보다는 몇십 년을 심야클럽에서 여러 인간군상의 귀신들을 상대해온 윤성재가 훨씬 유리하기는 했다. 지박령의 분류는 두 가지다. 하나는 진정한 지박령으로, 평생 묶여서 탈출하고 싶어하지만 그 욕구가 되감아지는 부류. 하나는 자가 속박되는 부류로 오랫동안 홀로 지내다 보니 의욕을 잃고 비어버려 현실에 얽힌 부류.

몇 년 전 후자의 경우로 홍주미를 데려가려다 그때 실패하고 나서, 윤성재는 이 경우에는 무엇보다 지박령의 탈주 의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전자의 경우라면 의지가 원한으로 영원히 피드백되었겠지만 후자는 유령의 동력을 새로 채우는 강렬한 의지가 되었다. 다행히도 여자는 후자였고 윤성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도박이였다. 전자였다면 여자가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온다."

여자가 속삭이듯 경고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세 명의 남녀가 들이닥쳤다. 윤성재는 쓰레기통을 들어올렸고, 몇 킬로그람 짜리의 그 시퍼런 플라스틱이 앞장선 자의 안면을 가격했다. 빠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빠르게 실을 풀어낸 후 자신 또한 식칼을 들어올려 그 뒤의 사람에게 집어던졌다. 바람을 찢는 날붙이의 속력에 뒤이어 컥, 하는 공허한 단말마가 울려퍼졌지만 윤성재는 듣지 못했다. 두 망자는 이미 벽을 넘어 건물을 뛰쳐나갔기 때문이다.

"이런 씨."

그럼에도 여자가 욕을 내뱉을 상황에 걸맞게, 주변 환경은 잔혹성을 띄고 있음이 명백해졌다. 사방에서 요원들이 나타났다. 윤성재가 다시금 무엇을 집어들어 날리려던 그때 한 대의 용달 트럭이 그들 사이를 갈라놓으며 질주했다. 낡았고, 이 동네에서 여자보다도 오래 존재했던, 말 그대로 이 동네의 것이였다. 털털대는 그 기계는 엄연히 재단의 것은 아님이 분명했다.

"손 잡아요."

윤성재의 단호한 말투에 여자는 끄덕였다. 그는 순간 칠흑 같은 빛을 터뜨리며 사라졌다가 다시 트럭 위에서 나타났다. 요원들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 존재를 찾느라 아까운 몇 초를 소모했으나, 그 중 가장 날선 남자가 "트럭 위다! PoI-004-KO다!" 하고 새된 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그들의 위치가 들통나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리어 그 웅성댐에도 재단다운 결속과 냉정한 규율이 느껴졌다.

"우희영 씨."

"응?"

"지금부터 총탄이 제법 날아올 겁니다."

"막으라고?"

"아뇨. 나쁜 짓을 좀 해야겠습니다. 운전할 줄 아시죠?"

우희영은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단숨에 하찮은 철골을 투과하여 운전석으로 내려앉았다. 운전하던 노인은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했음이 분명했는데, 윤성재도 우희영도 보지 못할 만큼 감각이 미약한 인간이기 때문이였다. 거기다가 운전석이나 보넷 등지엔 어떠한 종교적 상징도 하다못해 개가 찍힌 사진도 없다. 우희영에게는 운이 좋았다. 그는 눈을 감고 남자에게 뛰어들었다.

"됐어, 윤성재."

노인— 아니, 빙의한 우희영은 몸이 어떻든 간에 기묘하게 웃으면서 뒤쪽을 힐끗거렸다. 우희영은 기본적으로 아직 육체를 조작하는 방법을 기억하고 있었다. 노인의 몸으로 운전하려다 팔을 꺾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윤성재는 추격해 오는 인간들을 노려보았다. 재단이건 중앙정보부 10국이던 다른 무엇이던 이런 조직적인 사람들에게 쫓기는 것은 이번이 다섯 번째다. 비록 지금 상황이 최악이긴 하지만.

슉, 하며 소리 없는 폭발을 힘입은 사인철의 총알이 그에게 날아들었다. 겨우겨우 날아온 세 개를 공중에서 붙잡아냈지만 윤성재는 그 순간 느꼈다. 애초에 더 끌면 승산이란 없다. 벌집이 되어 소멸하거나 재단 기지 진공 탱크에 전시당하거나 택일해야 하는 운명이 될 것이 뻔하다. 그는 공중에서 멈춘 쇳덩이들을 반대쪽으로 집어던졌다. 당연히 맥없이 추락해버렸지만, 이게 노리는 바다.

뛰어오던 놈들 중 몇이 거꾸러졌다. 윤성재는 다시금 몇 개의 잡동사니를 마구 내던져 상대들을 저격했지만 더 이상 요행이 따라주지는 않았다. 그는 다시 사라졌다 조수석에서 나타났다. 다행인지 아닌지 우희영은 제법 운전을 잘 하는 편이였고, 윤성재가 굳이 더 개입하지 않아도 순조로웠다.

"어디로 가?"

"저쪽 맞은편 골목이 길Way입니다. 해원읍으로 통하고 아마 곧 닫힐 거예요. 올 때도 거길 경유했습니다."

"알았어!"

우희영은 가속하면서 엑셀을 다시 밟았다. 그 충격에 윤성재는 튕겨나갈 뻔 했다가 다시 문을 붙잡았다. 왜인지 지금 우스갯소리가 하나 생각나고야 말았다. 귀신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데 어떻게 서 있는 것이며 지정좌표계를 설정하였는가? 우스운 말이다. 유령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맥락이고 메시지이지 인력이 아닌데.

총알이 빗발치면서 트럭을 계속해서 스쳤다. 다행히 이곳은 거주지이고 재단이 트럭째로 터뜨려버리지 않는 것도 소란을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 분명한 일이다. 그리고 길의 위치도 가까웠다. 곧 트럭 정면에서 골목이 보였다. 그 골목 또한 지극히 좁아서 트럭이 들어가기는 커녕 아이들도 움직이기 버거워 보였다. 가속해야 한다. 우희영은 엑셀을 밟다가 그 즉시 브레이크를 밟아 신속히 정지했다.

끼기기기긱, 하는 불온한 소리가 동네를 진동시킨다. 인력이 역전하고, 이제는 중력이 문제가 아니라 원심과 구심의 영역이라는 듯 작용하는 힘의 방향이 앞이 되었다. 그 순간 윤성재는 몸을 공중으로 띄우고 지구의 의지에 따라 앞으로 튕겨져 나온다. 우희영은 비록 노인의 몸에서 나와야 하므로 한 발 늦었지만, 윤성재가 손을 붙잡는 바람에 역시나 공중으로 돌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윤성재는 공중에서 일갈했다.

"길을….. 열었다."

그리고 공간이 부드럽게 휘면서, 두 망령을 차원의 저편으로 튕겨내 버렸다. 유령이 사라졌다. 겨울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그리고 기준차원에는 정적만이 다시금 찾아왔다. 한발 늦은 기동특무부대 을호-2 요원들은 트럭을 수색했으나 기절한 노인 이외에는 그 무엇도 발견할 수 없었고, 이 사건은 대표적인 심야클럽의 격리 파기 사건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다녀오셨어요, 부장님."

후배 서라원은 어두운 회실의 책꽂이 아래에서 인사를 건넸다. 윤성재는 다치거나 소멸한 부위는 없었지만 무척이나 정신이 지친 상태였다. 힘을 너무 많이 사용했고 그래서인지 영 정신이 좋지 않았다. 냉기가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있었다. 우희영 역시 마찬가지로 지치기는 뻔했다. 건물을 나오고 빙의 때의 충격도 받아 영 상태는 좋지 않았다.

윤성재는 가장 어두운 곳에 앉았다. 우희영도 당당히 그 어디 어두운 자리에 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윤성재는 너무나도 지쳤기에, 탄식하듯이 말을 겨우 꺼낼 수 있었다.

"그… 클럽 안내는 내일 밤에 해 드릴게요."

"그러던지."

"라원 회원님…. 영화 좀 틀어봐요."

"뭐로요?"

"그냥, 이분 원하시는 걸로."

윤성재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읽고 감상하기에 오늘 밤은 지독하게 짧았고 지치는 시간이였다. 물론 유령에게 잠은 없다. 그러나 윤성재는 최소한 눈을 감기 위해 노력했다. 잡념 속으로 빠져들어 내일 할 일조차 아주 잠시만 잊고 싶었다. 그리고 곧 우희영이 손수 당당히 요청한 영화가 총성을 뿜자 소리 때문에 다시 몸서리쳐야 했다.

심야클럽의 밤이 언제나처럼 끝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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