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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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을 잃은 칼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임한영.

임한영은 끝까지 나를 괴롭힌다. 나는 무엇을 바라며 지난 세월을 살아왔던가?

임한영을 죽이기 위해서.

임한영을 이기기 위해서.

아니, 어쩌면 그저.

임한영을 위해서.

지난 세월을 살아온 것이다.

나는 무엇을 바라고 부사장직은 수십년간 의지하고, 몸을 규격화하고, 또 다른 복수자들을 양산하며 살아왔는가? 내가 살인 말고 무엇을 바꾸었는가?

적어도 임한영이 그 순간에 사과하는 걸 바라지는 않았다.

정철민의 전화가 울렸다.

[여민지]

전화를 받자마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저씨! 아저씨가 그렇게 사라지면 어떡해?"

"…여민지."

"아, 진짜. 아저씨 원래 이런 사람 아니잖아. 일처리 깔끔한 사람이잖아요. 간만에 해외여행 가려구 했는데 아저씨 때문에 다 꼬였어. 짜증나 진짜."

이 아이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내 칼날이 어디로 향했는지, 왜 향했는지. 그 순수한 투정에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

"…아저씨, 왜 말이 없어? 괜찮아?"

"여민지."

"뭐, 왜, 또 뭐 시키려고 목소리를 멋있게 깔아?"

"삼대천 스포츠 사장 자리. 시켜주면 할 꺼냐?"

"아-니. 미쳤어? 난 워라벨을 중시한다고. 지금도 이리저리 귀찮아 죽겠는데 냄새나는 아저씨들 관리하는 것까지 하라고? 차라리 사표내고 말지."

이런 점이 여민지를 신뢰하는 이유다. 향상심의 부재가 예전엔 못마땅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믿음직스럽다.

"그럼…대회 하나 열지."

"대회?"

"내가 실종되면…사장직을 걸고 팀장급들에서 내전이 일어날 건 명백하다. 설령 내가 누군가를 지명한다 해도 이는 변하지 않겠지."

"아…그래서 지하격투기로 승부를 걸겠다? 너무 단순한 거 아니야? 으음…지금 챔피언은 곽해걸인데 그 아저씨가 사장 되면 우리 망할 것 같은데?"

"그 자가 우승할 리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텐데. 단순함의 문제라면 대리참가도 허용해야지."

"뭐어? 그럼 방만덕이 사장이 될 수도 있는거야?"

"그 걱정부터 하는게냐."

"그 사람 생활건강 마스터 쪽 사람이잖아."

"이제 그런 건 의미 없다. 방만덕이던, 마스터던, 설령 백태양이던…참가에 제한은 없게 하자."

"백태양? 아저씨 그 사람 되게 무시했잖아. 뭐, 아저씨 생각이 그렇다면야. 구체적인 룰은?"

"살해 허용. 룰 무제한, 날붙이 허용."

"히엑…흥행 하나는 끝장나겠네. 우승 상품은 정확히 어떤 거야?"

"우승자는 공식적으로 삼대천 스포츠의 사장 대행이 된다. 모든 권한은 삼대천 스포츠의 사장과 동일하고, 기한은 무제한이다. 설령 내가 돌아오더라도, 공동 사장으로 대우한다."

"…아저씨."

"룰에 문제가 있나?"

"…그런 건 아냐. 알겠어. 끝내주는 쇼 한번 만들어 볼게. 푹 쉬고, 나쁜 생각은 하지 말고."

나쁜 생각이라. 제 고모 닮아서 눈치는 빠른 애다.

"알았다. 믿고 있겠다."

"혹시 아저씨 지금 어디…"

전화를 끊었다. 이걸로 나의 책임은 끝이다.

나는 내 품 속에서 무수히 많은 날붙이들을 하나하나 꺼냈다. 아주 오랜기간동안 품어온 칼들도 있고, 사투 끝에 쟁취한 전리품도 있다. 규격화 때문에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 날붙이도 있었다.

우스운 생각이 든다. 이것이야말로 무협지에 흔히 나오는 신검합일의 경지가 아닌가!

"하하."

소리내서 웃어본다. 얼마만인가.

그렇게 하나 하나 날붙이들을 꺼내자 어느새 칼날이 바닥을 가득 채웠다. 이것도 나름의 장관이었다.

나는 눈에 띄는 칼들을 둘러본다.

이 칼날은, 스스로 머금은 피를 기억한다. 한번이라도 이 칼날에 피를 흘린 자는 칼날의 추적을 결코 피할 수 없다.

이 검도 재미있다. 생명을 죽일 때마다, 그들의 남은 수명에 비례에 강해지는 검이다.

이 검도, 저 칼날도. 저마다의 독특한 능력이 있다.

이윽고 내 눈길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바로…역시 이 칼이다.

수신도의 검.

다른 칼날처럼 화려한 변칙은 없다. 그저 잘 베는 기능에 충실한다.

…그것이 검이다.

허나 주인을 잘못 만나 제대로 쓰이질 못했다. 칼을 주인이 움직이는 데로 벨 뿐,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주인의 탓이다.

'정철민. 자네는 조선에 태어났다면 조선제일검이었을 것이고, 청에서 태어났다면 중원제일검이었을 것이오. 자네의 검술은 가히 고금제일이라 할 만하오.'

이 칼을 만든 장인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한참 자격미달이다. 어쩌면 그 장인 보다, 그 교주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내 손에 죽어가던 사르킥 교주의 마지막 발악이자 비웃음은 한동안 내 마음에 깊게 남았었다.

'그래, 크큭. 정철민 그대는 확실히 천하제일검이군 그래. 헌데 하늘이 너무 높은것 아닌가?'

하늘 아래 가장 뛰어난 검사지만, 임한영이란 하늘이 너무나 높다는 말이었다.

그날 난 사르킥의 혈술이 가진 의외성을 핑계 삼아 교주를 8시간에 걸쳐 토막내고 아주 얇게 하나 하나 포를 떠서 한점 한점 씹어먹었다. 고통의 신음소리로 그가 낸 경솔한 발언을 뒤엎도록.

나는 오랜 기간 방치해 두었음에도 여전히 서슬퍼런 수신도의 칼날을 바라보았다. 언뜻 내 얼굴이 비친다.

"고금제일의 검술도, 영감의 역작도, 임한영의 피륙을 가르기엔 역부족이었소."

하지만 살덩이도 기계도 아닌 이 비루한 몸뚱이는 충분히 가르고도 남겠지.

임한영에게 피를 흘리게 한 날. 그를 신에서 인간으로 격하시킨 날 거기서 복수를 끝맺었어야 했다.

내 삶의 목적과 이유가 그곳에서 완성되었어야 했다. 나는, 정철민은 임한영에게 죽었어야 했다. 그렇게 그에게 상처를 남긴 남자로 영원히 남았어야 했다.

'미안하다.'

그러나 그는 내게 사과했다. 죽일 수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았다.

…그로서 목적은 길을 잃었다. 분노, 열등감, 모멸감, 실망이 다시 속으로 천착했다.

새는 장차 죽을 때가 되면 그 울음소리가 슬퍼고, 사람은 장차 죽을때가 되면 그 말이 선하게 되기 마련이다.

어쩌면 업보다. 임한영이 한참 행했던 꼴같잖은 위선과 고뇌를 나 역시 똑같이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오늘 자살한다.

수많은 날붙이들 위에서, 야쿠자들을 학살해온 내가 야쿠자들의 방식으로 내장을 쏟아내 죽는다.

죽음에 있어 어떠한 명분도 실리도 챙길 수 없으니 멋이라도 남기고 가겠다는 마지막 발악인 셈이다.

칼날을 치켜들었을 때, 나는 빤한 인기척을 느꼈다.

이곳은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이성재인가?

나는 찌르려고 각오한 손아귀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헛웃음이 나왔다.

수천명의 목숨을 손쉽게 앗아갔으면서 자신의 목숨을 끊는 데에는 고작 인기척 하나에 이리도 민감한가?

나는 결국 그 정도밖에 안되는 사내다.

그렇게 자조하고 고개를 들자, 한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나를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잠시간의 적막 끝에, 소녀가 입을 열었다.

"찾았다. 내 주인. 하밀타."


"나라시라고 했나? 난 가야의 왕인지 뭔지가 아니다."

"기억을 잃고 환생했나 보군. 불쌍한 주인."

"허. 뭘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

"얼굴이랑 목소리. 똑 닮았다."

"1600년이나 지난 사람이라 했지 않나? 얼굴이 닮은 것 정도는 우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게 있다. 환생이던 기억을 잃은 거던, 넌 내 주인이다."

소녀는 막무가내였다. 내 자살을 방해한 것도 모자라, 자기 할말만 쏟아낸다. 심지어, 날 주인으로 착각하고 있다면서 싸가지도 더럽게 없다.

이 소녀가 검인건 진작에 알았다. 치장용, 예식용인 쓸데없이 화려하기만 한 검. 검으로서 가져야 할 진짜 목적-살을 가르고 숨을 거두는-목적과는 영 딴판인 검이다. 동물의 피륙 정도는 가를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너무 화려하다.

게다가 천년 동안이나 주인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능력도 어디선가 다 잃은 것 같고.

결정적으로 내 죽음을 그 누구보다 바라고 있을, 심야클럽의 강렬한 원념이 소녀의 옆에 강하게 붙어 있다.

도저히 정신이 이상한 변칙 개체 하나와 같이 다닐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

그래도 목적을 잃은 칼이라는 점에서는 나와 같은가. 조금은 맞장구를 쳐 줘도 괜찮을 것 같다.

"주인.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뭔데."

"주인은 기억을 잃어서 모르고 있는 거 같은데, 사실 주인은 벌레다."

"……"

마음먹은지 1초 만에 회의감이 드는 순간이다.

"주인의 기억을 되찾으려면 제비꽃으로 가야 한다. 제비꽃으로 가자."

나라시. 칼날의 옛말로 알고 있다. 그녀가 칼이란 걸 직감하지만 않았더라도 따라가지 않았겠지만…애초에 오늘 버리기로 한 목숨이었다. 따라가도 죽기보다 더 하겠나?

"그래, 가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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