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세계 그 사이

「Realm of Darkness」

남자는 손목에 찬 시계에서 흘러가는 시각을 슬쩍 훔쳐 보았다. 오후 여섯 시. 오늘 하루도 벌써 칠 할 오 푼이 흘러갔구나. 오늘은 평소보다도 더 바쁜 느낌이었다며 남자는 이내 한숨을 쉬었다. 그것도 그럴 법이 평소와는 달리 대낮부터 기지 내에 있는 심령체를 잡는다고 여간 바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 놈이 눈치를 챘는지 기지 전체를 돌아다니는 통에, 기지 전체에 액막이를 설치하느라 일이 늘어난 것도 있었다. 게다가 세율 팀장님은 최근에 포획한 변칙 개체 때문에 정읍, 그러니까 제145K기지까지 혼자 급하게 갔던지라, 그 지휘를 그의 손으로 해야 했던 것도 한 몫 했다. 대충 보았던 대로 따라는 했지만, 미숙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동안 팀장님은 무슨 일을 해오셨던 것일까. 나는 과연 제대로 한 것일까. 하지만 고민해봤자 늦은 일이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팀장님이 지금 당장 일을 끝내고 출발하신다 쳐도 여기 올 때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릴테니 말이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고개를 젓고 한숨을 쉬었다.

남자는 시선을, 자신의 옆에서 벽에 기댄 채 쪽잠을 자는 다른 요원들로 향했다. 밤에 심령체를 쫓고 낮에 자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어긋난 시간에서 사는 그들에게 있어 오늘 같은 주간 근무는 부담스러웠을테고, 어쩌면 낯선 느낌까지 들 수 있었을 것이다. 평소에는 눈을 붙일 시간에 긴장한 채 기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상황 수습을 했을테니 분명 피곤했으리라. 잠을 제대로 못 잔 것이야 그 역시 마찬가지건만 그는 마음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일단 지금의 휴식은 어디까지나 일시 대기에 불과했다. 무속학부에서 지금 상황이 여간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기지와 같이 현 상황을 연구해보겠다며 그 동안 숙식 시설에서 쉬고 있으라고 했을 뿐이었다. 상황 조사가 다 끝나면 분명 그들은 포획 작전을 재개할 것이고, 그러면 바로 그에게 연락을 할 것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심령체 포획의 전문가는 이쪽이니까. 지금 상황이 마음 놓고 쉬기에는 썩 좋지 않다는 것도 있었다. SCP-542-KO-1은 도통 보이지 않고, 그 반대 급부로 기지 전체에서 영적 포화도가 올랐다. 그들은 오차 범위 내라고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기지 전체가 그 심령체의 놀이터가 된 셈이다. SCP-542-KO의 변칙성은 물에 젖는 것인데, 지금은 해결되었다만 반대로 기지 내에서 건조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도 수상한 점 중 하나였다.

갑자기 건물이 울렸다. 아까 만났던 연구원들 일부가 건물이 흔들린다고 보고했는데, 이게 그것이었나? 다행히 다른 요원들은 아직 아무 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지만, 그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SCP-542-KO-1이 물을 뿌리고 사람을 조종할 수는 있다고 들었지만, 지진을 일으킬 능력도 있었나? 애초에 SCP-542-KO-1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지? 일단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게 강아지라는 것, SCP-542-KO에게 물을 뿌리려고 한다는 것, 단독범이라는 것. 이것이 다였다. 이게 동물령이니 이성과 지성이 있을 가능성은 적지만 당장 바다 한 번만 건너도 말 귀신이 야쿠자 두목이 되었다는 사례가 들리는 것이 심령체 사회의 현실이다. 저 강아지 뒤에 뭐가 더 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심령 클럽이나, 그 조요의 인도자라는 놈들과는 연관이 적다는 것 정도겠지. 전자면 낫지만 후자면 여러모로 상황이 심각했으리라. 그들은 잔뜩 숨기는 것이 많은 주제에 착한 연기는 도사니까.

사실, 남자는 심령체를 싫어했다. 귀신을 좋아하는 사람보다야 무서워 하는 사람이 당연히 많은 법이지만, 그에게 있어서 그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기분 나쁨에 더 가까웠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가 생전 처음 본 심령체는 그 남자 패거리였다. 그 때부터 심령체를 볼 때마다 자기 형을 학대하고 자신을 신이라며 사람들을 세뇌시키려던 무리의 모습이 겹쳐 보였으니, 오히려 기분 나빠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나마 심야클럽이야 장막을 깨려고 하는 것을 빼면 그나마 선한 모습을 보여주니 조금 나은데, 조요의 인도자 무리는 겉으로는 선량한 척하면서 뒤에서 신을 위해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모습이 딱 그들과 똑같았다. 믿고 있는 신이 같으니 이상할 것도 없겠지만… 그 신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그는 기분이 고까워지곤 했다. 그 때 그들이 속삭였던 말이 무의식에 남은 걸까? 아니, 어쩌면, 뭔가, 좀 더 본격적인 무언가가 있었을지도. …지진이 심해졌다. 이제 요원들도 놀란 눈으로 눈을 뜨고 주변을 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조금 건물이 흔들릴 뿐이에요. 애써 그들을 달래보았다. 그 스스로도 달래보았다. 저들은 심령체를 어떻게 생각할까. 일부는 인간이 아닌 그 부산물로만 볼 것이고, 일부는 적어도 변칙 능력이 있는 인간와 동등하게 생각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 적어도 그처럼, 심령체를 너무 미워하지는 않기를. 그들은 자신이나 형과 같은 상처를 입지 않기를. 그는 마음 속으로 빌었다.

지금 조사가 어디까지 된 것이지? 조용히 그는 연락을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무래도 건물 흔들리는 것이 심상치 않은데 이거 대피를 해야할지, 아니면 조금 더 대기해야 할지, 아니면 방향을 잡았으니 그쪽으로 가야 하는지. 괜히 엇갈리는 것보다는 그것이 낫지 않은가? 읽었다는 표시는 떴지만 답장은 없었다. 물론 간단하게 답할 상황은 아니었으니 이해는 되었지만. 그저 차분히 기다리는 것이 답이리라,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흘러가는 상황은 그리 차분해지지 않았다. 기지에 안전 지대는 없고 언제 요주의 단체 인물이 쳐들어 올지 모르는 것이 재단의 매일이건만, 스킵 하나 없는 숙식 시설에 이렇게 흔들림이 심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제 그들은 어느 새 잔뜩 긴장해진 채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요원으로서는 훌륭한 대처였지만 제대로 눈도 못 붙여서 안타깝다는 생각을 할 찰나였다. 파이프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물건들이 후두둑 떨어지고, 금이 쩍 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조심하십쇼- 의식이 끊어지기 전 마지막 기억은, 건물 벽이 터져 나오는 지하수로 무너지는 모습과 그 떨어지는 잔해 너머로 다른 요원들이 놀라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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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기 전 희미해지는 마지막 생각은, 다들 무사히 탈출했을까였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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