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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테라스와 달빛 제2장Amaterasu to Tsukiakari Chapter 2
저자: ProfoundAbyss
이미지 출처: https://pxhere.com/en/photo/1325118 (C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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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인: 패스파인더YJH가 3일 전에 부산에서 목격되었음. PoI나 940KO의 흔적은 여전히 보이지 않음.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YJH는 사고 이후에도 PoI와 접촉했던 것으로 보임. 세부 사항은 첨부된 자료를 참고할 것.
요청한 대로, 현재 동행 중인 인물(PoI2)에 대한 정보를 수집함. 결과 부정적. 과거 뱀굴의 일원. 현재 프리랜서 기적사. 재단을 상대로 한 수 건의 적대 행위에 관여되어 있음. 극도로 위험함.
재단의 이익에 반하는 목적에 따라 행동할 가능성 높음. 신중을 기할 것.
제2장
시계와 덫
Clock and Trap
2019년 10월 6일 밤, 대한민국 부산
"얼굴은 본 적 있나?"
"누구 얘기야?"
"너가 찾고 있다는 그 아이. 신지연."
나루는 늘어져 있던 자기 몸을 추슬러 의자 위에 제대로 앉은 자세를 하고 커피가 놓인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사람을 노려보았다.
"뭐냐, 그건. 지금 못 찾았다고 도발하는 거야?"
"그냥 궁금해서." 파스칼은 나루의 건너편에 앉아, 자기 손톱을 쳐다보며 지나가듯 말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이 때문에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잖아."
"……그렇게 티가 나?"
"24시간 내내 눈에 다크서클이 가득한 사람 치고는 퍽 감정적이야, 넌."
나루는 헛웃음을 내뱉고는 머그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박사님 집에 초대받았을 때 본 적 있었어."
파스칼은 머그잔에 담긴 검은 빛깔 커피에, 반달이 뜬 밤하늘 풍경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어째서인지 강나루의 주변에서는 달이 평소보다 가깝게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말이 '초대'지, 사실상 그 집에 얹혀사는 신세였군. 밤이 되면 집 뒤에 있는 작지만 탁 트인 언덕 위에 올라가서, 아이들더러 밤하늘에 달이 떠 있으니 찾아보라고 말하고는 했지. 날씨가 안 좋으면 구름에 가려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난 구름 사이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그 녀석들한테 '바로 저기 있잖아'라고 말했고. 구름이 걷히면 내가 손으로 가리킨 바로 그 지점에 달이 있었지."
"박사님의 아이들은, 달을 좋아했던 모양이지?"
"그래, 아이러니하지만." 나루는 그렇게 말하더니 솔직히 잘 모르겠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 기억상으로는 그랬지. 지연이는 확실히 내 옆에 꼭 붙어 있었고, 나이를 먹는다고 성격이 바뀌는 애가 아니었으니까. 다른 둘은…… 글쎄, 나랑 같이 언덕에 올라오긴 했었지만 달을 좋아했던 건지는 잘 모르겠군. 어쩌면 그 두 녀석은 워낙 지금 모습과 그때와의 간극이 커서 더 그런 걸지도 몰라. 소연이는 달을 좋아할 수가 없고, 승연이는…… 뭐 소연이를 그렇게 만든 놈이 바로 그 놈이고."
"그 애들도 참 안 됐군."
"그래서 어른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거지. 야심한 밤에, 밖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잠복 근무."
나루는 그렇게 말하며 자기 품에서 황동색 회중시계를 꺼냈다. 파스칼은 참 고전적인 취향이라는 평가를 마음속으로 내리면서, 그의 시계 안쪽에 새겨진 문구를 슬쩍 엿보았다. CARPE HORAS(시간을 붙잡아라).
"이제 곧 자정이야." 나루가 시계를 다시 집어넣으며 말했다. "유지훈이 나타나는 게 더 빠를까, 아니면 종업원이 우리더러 이 카페에서 나가달라고 하는 게 더 빠를까?"
"어떻게 할 셈이지?"
"뭐?"
"저번에 시즈오카에서 그랬었지. 신승연이랑 그 여동생을 붙잡게 되면 네가 직접 처리하겠다고."
"옥리들이랑은 다른 방식으로." 나루가 덧붙였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그러니까, 다른 쪽은 몰라도 직사광선을 제외한 모든 빛에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아이를 어떻게 도울 작정인 거야?"
"난 소연이가 걸린 저주를 풀 수 있어."
"저주라고?"
"하긴 저주라기보단 계약을 잘못 맺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군."
"혹시 더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나."
"왜, 나중에 나처럼 프리랜서로 전직이라도 하려고?" 나루는 그렇게 비꼬았지만, 그의 어조는 평탄했다. "전에 말했다시피 신정우 박사님의 전공 분야는 고전 태양기적학이고, 그 말은 태양이 하나의 인격체라는 전제 아래에 모든 술식과 주문을 설계한다는 뜻이지. 태양의 능력은 인간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사실상 무한하니까, 기적술의 주체인 인간과 그 매개가 되는 태양 간의 안정적인 경로만 확보할 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에너지와 힘을 손에 넣게 되는 거야. 그리고 태양이 인격체인 이상, 가장 가능성이 높은 방식은 바로 계약이 될 수밖에 없는 거지."
"하지만……?"
"하지만 같은 이유에서 태양과 계약을 맺는다는 건 참 어려워. 우리는 태양에게 제안할 만한 것이 없거든. 필연적으로 그 계약에서 태양이 갑이고 인간이 을인데 갑의 위치에 있는 인격이 을의 위치에 있는 인격보다, 말 그대로 천문학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으니까 부조리도 이런 부조리가 없지."
"그러면 그때 신승연이 자기 여동생들한테 한 짓은?"
"간단히 말해, 태양과 야매로 계약을 맺었다고 보면 되겠지. 그 두 여자애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니 아마 태양도 모르는 사이에 태양과 정말로 불리한 을의 입장에서 계약을 맺은 게 되는 거야. 소연이를 자주 봤으니 알겠지만, 조건이 일반적인 계약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지랄맞아. 말하자면 남자 쪽이 약혼녀의 손가락에 강제로 결혼반지를 끼우고 '앞으로 다른 남자를 쳐다보기만 해도 죽여버리겠어'라고 윽박지르는 그런 상황이지.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BE는 그렇게 계약을 맺은 아이들을 필요로 하고 있고."
"그래, 그건 그렇게 된 거라고 쳐. 넌 어떻게 계약을 없던 걸로 할 계획이지? 태양을 상대로."
"태양 같은 힘을 상대로 동등하게 협상을 진행하려면, 최소한 그를 협상장에서 견뎌낼 수 있을만한 힘이 필요하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힘이 없지만, 나한테는 있어."
"달? 하지만 달도 인격체로서는 인간에게 벅찰 텐데."
"사실이야. 하지만 밤하늘의 여신께서는 자비로우시니까." 나루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도 하늘에는 달이 떠 있지. 달과 계약을 맺은 내게는 늘 그 모습이 보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하늘에 떠 있는 다른 무언가도 볼 수 있어. 저기 있네."
나루는 그렇게 뜻 모를 말을 하고는 달과 정 반대편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저기에 달의 파편 중 하나가 흘러가고 있어. 달로부터 떨어져 나왔지만 동시에 그 성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달과 인간이 맺은 계약의 증표지."
"파편이라……" 파스칼은 그렇게 말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나루에게 언질을 주었다. "저길 봐."
나루는 밤하늘로부터 눈을 돌려 파스칼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앉아 있는 카페 건너편 건물들 사이에 난 골목길로, 검은 후드로 머리를 가린 한 남자가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를 마주칠까 두렵다는 듯이 골목길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재차 확인하느라 그의 머리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중이었다.
"저게 바로 그 사람인가?" 나루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음, 파일에서 본 얼굴이군. 유지훈이다. 뭔진 몰라도 잔뜩 경계하고 있어. 하긴 같이 일하던 사람이 일주일 전에 덜컥 죽어버렸으니 그럴 만도 하지."
"어떻게 할 거지?"
"치세는 지금 일어나는 일이랑 크게 관련 있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유지훈은 달라." 파스칼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일어섰다. "2013년 사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BE와 접촉하고 있는 놈이니까, 어디 조용한 곳에서 유익한 얘기를 좀 나눠 볼 생각이야. 이거 받아."
파스칼은 나루에게 이어피스를 건네주고 밤 거리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루는 왼쪽 귀에 이어피스를 끼우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유지훈이 골목길 사이로 사라지자 횡단보도를 건너고 그를 뒤따라 골목길로 들어갔다. 대략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나루는 유지훈의 뒤를 밟았다. 유지훈은 나루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듯, 두 손을 옷주머니에 찔러 넣고 가로등도 제대로 켜져 있지 않은 골목 사이를 걸었다.
나루에게는 별로 놀랍지 않았겠지만(비인간적으로 빨리 돌아왔다는 점에서 놀랄 수는 있어도), 유지훈의 입장에서는 놀랄 정도로 갑작스레 골목길의 반대편 끝에서, 키가 크고 어두운 옷을 입은 형체가 나타났다. 유지훈은 앞에 놓인 출구가 막힌 것을 보고 뒤로 돌았지만, 그의 뒤에서는 나루가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양옆에서 걸어오면서, 빠르게 추적 대상과의 거리를 좁혔다.
궁지에 몰린 지훈은 갑자기 주머니에 찔러넣고 있던 손을 뺐다. 파스칼은 그의 손에 들린 무언가가 달빛에 번쩍이는 것을 알아챘다.
"조심해!" 파스칼이 지훈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파스칼이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지훈이 몸을 돌려 나루의 목을 노리고 나이프를 날렸다. 나루는 황급히 몸을 숙여 피했다. 거의 동시에 지훈이 반대편으로 날린 또다른 나이프는 파스칼을 가까스로 지나쳐 골목 벽에 놓인 나무판자를 쪼갰다. 순간 섬뜩한 느낌을 받은 파스칼은 다시 눈을 앞으로 향했다.
지훈은 사라져 있었다. 당황스러운 기색을 한 파스칼에게 나루가 달려왔다.
"뭐 하고 있어?"
"뭐 하고 있냐니, 사라졌잖아." 파스칼이 짜증을 냈다.
"사라졌다고? 저기 있잖아. 아, 너한테는 안 보이나?" 나루가 그렇게 말하며 골목 한 쪽에 지어진 건물 윗층을 가리켰다. 파스칼은 나루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희미하게 건물 밖에 설치된 철계단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 어떻게 보는 거야?"
"설명할 시간 없어, 올라갈 테니까 좀 받쳐줘." 나루가 그렇게 대꾸하며 잠깐 물러선 다음에 도움닫기를 하며 뛰어올랐다. 파스칼은 건물 벽 앞에 서서 나루를 손으로 받쳐 밀어올렸다. 나루는 약간 불안하지만 빠르게 건물 위로 튀어 올라갔다. 덩그러니 남겨진 파스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골목에서 나와 서둘러 어딘가로 뛰어갔다.
한편 나루는 지훈과 마찬가지로 철계단을 올라 4층 건물의 지붕까지 닿았다. 지훈은 옥상 가장자리에서 방금 나루가 하던 것처럼 도움닫기를 하더니, 그대로 턱을 밟고 도약해서 척 봐도 5미터는 족히 되어보이는 간격을 뛰어넘어 다른 상가 옥상에 굴러 착지했다. 나루는 방금만 해도 지훈이 있던 자리로 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훈은 몰라도 자기한테는 확실히 무리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건너편을 보았다. 지훈이 나루에게 주먹감자를 먹이고 그대로 몸을 돌려 줄행랑을 쳤다.
"이 자식 봐라? 어디 한 번 해보자 이거지, 잘 알겠어."
나루는 품에서 앞서 파스칼이 보았던 시계를 꺼내, 시계줄을 잡고 머리 위로 빙빙 돌렸다가 지훈이 도망친 상가 옥상 쪽 허공으로 높이 날렸다. 그러고 나서는 투덜거리며 다시 철계단을 되짚어 내려가, 조심스럽게 골목으로 떨어져 착지한 다음 회중시계를 던진 방향의 상가를 찾아 들어가 비상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시계를 잡았다.
지훈은 추격자를 충분히 따돌렸다고 생각해서 뒤를 돌아보았더니, 그 자가 건너편 건물 지붕에서 시계를 던지고 나서, 자신이 서 있는 건너편 상가 옥상까지 희미한 잔상을 남기며 3초만에 올라와서는, 아직 땅에 닿지 않은 시계를 허공에서 잡는 묘기를 부리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그러나 놀란 것도 잠시, 지훈은 온 몸의 근육을 긴장시키며 상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루는 지훈이 다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린 채 두 손을 폈다. 나루의 양 손바닥에서 은빛 광원이 나타났다.
지훈이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하나 더 꺼내 나루를 상대로 던졌다. 나루가 두 손을 앞으로 모으자 은빛 광원이 순식간에 커지며 마법진의 형태를 취했다. 지훈이 던진 나이프는 마치 화살이 나뭇가지들 사이에 걸려 떨어지듯이 마법진을 통과하자마자 운동 에너지를 잃고 나루의 발밑에 떨어졌다.
"도움이 좀 필요한데." 나루가 소리를 죽여 말했다.
"지금 거기서는 어려워." 나루의 왼쪽 귀에서 약간의 노이즈와 함께 파스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어떻게든 놈이 거기서 내려오게 만들어 봐."
지훈이 이번에는 나이프 두개를 각각 사타구니와 머리를 향해 던졌다. 나루는 두 손을 잠깐 맞잡은 다음 힘 있는 동작으로 양 팔을 바깥으로 벌렸다. 나루 앞에 생성된 은빛 마법진이 두 개로 분리되더니 각각 위아래로 움직여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아오는 나이프 둘을 붙잡아 땅에 떨어뜨렸다.
나루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상대로 유지훈은 으르렁거리며 마지막 남은 나이프를 꺼냈다. 자기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변칙적인 궤도로 나이프를 날리기 위해 손목을 비트는 순간, 나루가 생성한 마법진이 갑자기 큰 소리와 함께 번쩍이며 사라졌다. 섬광과 소리에 놀란 지훈은 엉겁결에 나이프를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나루가 그 틈을 타서 지훈을 붙잡으려고 달려들자 지훈은 옥상 난간을 넘어 그대로 사라졌다. 나루가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자, 건물 옆 빗물통을 타고 내려가는 지훈의 모습이 보였다.
유지훈은 높은 건물에서 굴러 떨어지듯이 내려와 다시 길가를 따라 도주했다. 그는 잠시 뒤를 돌아봤다가 나루가 아까처럼 계단에 잔상을 남기며 옥상에서부터 건물 정문 앞까지 2초만에 주파한 다음, 떨어지는 시계를 잡아 다시 품 속에 넣는 것을 보고 그냥 앞만 보고 달릴 걸 하고 후회했다.
두 사람의 추격전은 계속 이어졌다. 체격이나 체력 상 지훈이 나루 상대로 우세했지만, 지훈이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할 때마다 나루는 '시간을 붙잡'으며 그를 어느 정도 따라잡았다. 얼마 뒤 쫓기는 쪽도 쫓는 쪽도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거의 걷다시피 할 즈음, 갑자기 유지훈의 발밑에서 무언가 큰 금속음이 나더니, 그의 오른 발목에서 시작된 격통이 척수를 타고 올라가 그로 하여금 비명을 지르며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예상치 못한 고통에 신음하며 지훈은 자기 오른 다리를 내려다 보았다. 어째서인지 인도에 깔린 보도블록 위에 커다란 강철 덫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훈은 그 덫을 오른발로 밟고 만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나루는 숨이 차 헉헉대면서도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이어피스에 대고 말했다.
"이 정도면, 됐냐?"
"방금 봤다. 수고했어."
고통 때문에 힘이 빠진 팔로 굳게 닫힌 덫을 다시 벌려 보려고 낑낑대고 있던 지훈의 목에 마취제가 담긴 다트 탄환이 날아와 꽂혔다. 지훈은 잠깐 동안 기묘한 가래 끓는 소리를 내더니 도로 한복판에 엎어져 버렸다.
강나루는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달의 축복을 받은 그의 예민한 눈에, 3시 방향 건물 위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여섯시간 뒤, 파스칼과 나루 두 사람은 교외 산골의 한 은신처 바깥에서 날이 밝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쯤 일어났을 거야." 파스칼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그 녀석이 입을 열까?" 나루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웬만하면 안 열겠지." 파스칼은 나루의 물음에 답하며 은신처의 약간 부실해 보이는 철문을 걱정스레 살폈다. "방음이 잘 되어있으면 좋겠는데. 비명이라도 새어나가면 난처하겠어."
"……비명을 지르게 만들 생각이야?"
파스칼은 나루를 바라보며 아주 섬뜩한 윙크를 한 다음, 철문을 열었다. 경첩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자 은신처 안 의자에 묶여있던 사람이 마대 자루로 덮인 머리를 홱 들었다.
"좋은 아침이야, 유지훈." 파스칼은 옆에 놓여 있던 다른 의자를 끌고 와 묶여있는 유지훈 앞에 앉았다. 나루는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기다렸다. "안심해, 아직 여섯 시간 밖에 안 지났으니까. 내가 비변칙 인간용 마취제 중에서도 약한 걸 쐈으니 망정이지, 잘못하면 48시간을 혼수상태로 보낼 수도 있었다고."
지훈은 자루가 뒤집어씌워진 채로도 무언가 말했지만, 우물거리는 소리 밖에는 자루에서 새어나간 것이 없었다.
"뭐 지금쯤 감을 잡았을 테니 말해두자면, 나는 SCP 재단의 파스칼 클라인이라는 사람이고, 내 목적에 대해서는, 일단 '엔트로피를 넘어서'라는 이름의 단체에 관심이 있다고만 해 두지. 그쪽은 유지훈, 전직 솔러스 사이언스 소속 보안 전문가, 2013년 사고 때 BE에게 모종의 대가를 받고 사실상 연구 시설의 모든 걸 팔아넘겨서 회사가 박살이 나게 만든 장본인이지."
유지훈이 앉은 의자가 격렬하게 앞뒤로 흔들렸다.
"왜, 내가 틀린 말 했냐? 아무튼 그건 됐고, 우리가 궁금한 점은…… 아, 일단 자루를 계속 씌워두면 답답할 테니까 이건 벗겨주지."
파스칼이 자루를 벗기자 옥상 바닥에 얼굴부터 엎어진 흔적이 가감없이 드러나 있는 지훈의 멍든 얼굴이 그 아래서 나타났다. 그의 입에는 물에 흠뻑 젖은 수건이 쑤셔넣어져, 일종의 재갈 역할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다시 무척 화난 표정으로 우물거리는 소리를 냈다.
"훨씬 낫지?" 파스칼이 부드럽고 유쾌해서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 격렬하게 우물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무튼, 우리가 궁금한 점은, 이미 직장은 망할 대로 망했고 BE나 당신이나 자기 원하는 걸 손에 넣은 이 시점에, 왜 당신이 여전히 우리 정보망에 자꾸 얼굴을 들이미냐는 거야." 파스칼은 옆 책상에 놓여 있던 보고서를 집어들었다. "우리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당신은 사고 이후에도 BE와 깊은 연관이 있는 위험 인물과 최소 네번 이상 접촉했어. 그리고 나는 '위험 인물'이라는 표현을 함부로 쓰지 않아. 당신의 친구로 보이는 그 젊은 녀석은 여러 리스트에 이미 자기 이름을 올린 상태고, 그런 놈이랑 단순히 술이나 같이 마시는 사람들까지도 전부 우리 감시 대상에 해당되어 있거든. 그래서 묻겠는데, 너랑 BE는 지금 무슨 관계인 거지?"
"으으으읍!"
"젠장, 뭐라고 하는지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자, 아까 뭐라고 한 거야?"
"나가 뒤지라고!"
파스칼은 유감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게, 나는 지금 붙잡힌 요주의 인물을 심문하는 재단 요원 치고는 아주 신사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거야.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내 자리에 있었으면 지금쯤 의자 째로 땅바닥에 누워서 물고문을 당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어."
유지훈은 미친듯이 화를 냈다.
"해 봐, 이 새끼야! 물고문이든 전기고문이든 씨발 해 보라고!"
파스칼이 손을 내저었다. "일단 좀 진정해."
유지훈이 침을 뱉자, 파스칼은 상체를 슬쩍 틀어 우아하게 피가 약간 섞인 가래침을 피했다.
"고문 생각은 없으니까 일단 그 부분은 안심하고, 그러면 일단 서로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걸로 한번 시작을 해 보자고."
파스칼은 자기 주머니에서 앞서 지훈이 던졌던 나이프들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까 봤는데 날붙이 다루는 솜씨가 수준급이더라고. 잘못하면 사람 한 명 골로 갈 뻔했어. 이런 걸 주머니에 잔뜩 집어넣고 다니다가 경찰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낭패를 봤겠는걸."
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파스칼은 나이프들 중 하나를 집어들어 찬찬히 살펴보았다.
"민간 경찰에게 영 좋지 않은 꼴을 보면서 이걸 들고 다니는 이유가 뭘까 참 궁금하더라고. 근데 우리 쪽에서 부산에 오기 전에 조사를 좀 해 봤거든? 그래서 그 답을 알아내는 데 당신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아. 아, 물론 우리가 추측한 게 틀릴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은 낮을 것 같더라. 지금 말해볼 테니까, 한번 네가 듣고 맞는지 틀린지 답해주면 고맙겠어."
자신이 가진 패가 이미 극도로 위협적인 상황에서는, 굳이 상대를 위협하려고 시도할 필요도 없다. 파스칼은 여전히 시선을 손에 들린 나이프에 고정시킨 채로 담담하게, 그러나 잔인하리만치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GOC가 당신을 위험 인물로 보고 있는 거 같아."
지훈이 뭔가 항변하려는 듯 입을 벌렸지만, 방금만 해도 그렇게 기세 좋던 욕설마저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못했다.
"대체 어쩌다가 그쪽이랑 엮이게 됐는지 나야 알 수 없긴 하지만, 일단 연합에서 널 찾아오면 나이프 가지고는 안 될걸. 있다가 직접 확인해봐도 좋아. 그쪽 사람들한테 아까 언질을 좀 줬어."
"뭐라고? 아니, 잠깐만, 안 돼!"
"아까 내가 고문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잖아. 그건 사실이야. 근데 재단은 차도살인을 꺼리는 조직이 아니거든? 내가 당신을 멍석에 싸서 꽁꽁 묶어놓은 채로 어디 야산에 던져버리면, 나머지는 세계 오컬트 연합이 알아서 하겠지."
"아니, 어, 원하는 게 뭐야? 뭐가 궁금해서 이래?"
"이제 협조하고 싶은 마음이 좀 생겨? 솔직히 난 당신 말을 잘 못 믿겠어서."
"제발, 뭐든 말할게. 연합만은 안 돼."
"뭔진 몰라도 그 녀석들을 정말 화나게 만든 모양이지." 파스칼은 다시 앞을 보고 지훈에게 물었다. "좋아, 그쪽이 전적으로 협조해준다면 너가 화난 연합 요원들에게 험한 꼴 보지 않게 해주지, 어때?"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아!" 파스칼이 손뼉을 쳤다. "드디어 긍정적인 협력 관계를 기대할 수가 있겠군. 그럼 첫 번째 질문. 아까도 물어본 거지만, 지금 너랑 BE는 무슨 관계지?"
"연결고리."
"너무 추상적이군. 더 자세히 설명해 봐."
"내가 아는 사람이 있어." 지훈은 긴장 탓에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침착하게 설명했다. "놈들 계획을 실현시키는 데 필수적인 인물이지만, 나 말고는 아무도 접촉할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이 누구지? 이름을 말해봐."
"고다 스에히로."
"솔러스 사이언스의 고다 박사란 말이지. 좋아. BE는 왜 박사를 필요로 하지?"
"그래야 아마테라스 프로젝트를 완료할 수가 있으니까."
"아마테라스 프로젝트?" 파스칼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반문했다. "그건 BE가 직접 개입해서 엎어버린 솔러스 사이언스의 마지막 연구잖아. 아마테라스 프로젝트가 정확히 어떤 내용이길래 그놈들이 연구를 진행하던 인원들을 거의 전멸시켜놓고, 정작 자기들 스스로는 번거로운 과정까지 감수하면서 고다 박사의 도움을 받아 프로젝트를 끝마치려고 하는 거지?"
"그건 모르겠어."
"잘 생각해서 대답해."
"정말 몰라. 내가 관련 문건을 취급하긴 했지만 그리 주의깊게 보지는 않았어. 어차피 내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인 것도 아니고."
"……하긴 그렇겠군. 알겠어."
"그러면 이제……?"
"한 가지만 더. 고다 스에히로는 지금 어디 있지?"
잠시 후 파스칼은 삐걱거리는 철문을 열고 나왔다. 벽에 기대고 있던 나루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됐어?"
"비명 소리 못 들었나?"
나루는 어깨를 으쓱했다. "방음이 잘 되는 곳인가 봐."
"방금 건 농담이었어. 알고 보니 우리끼리 서로 잘 맞는 부분이 있더라고. 결과적으로는 유용한 정보를 얻었지."
"예를 들자면?"
"가면서 설명해줄게." 파스칼은 은신처 옆에 난 비포장도로를 따라 산을 내려가며 말했다. "이번에는 차를 준비해 놨으니, 네 이동수단은 정중히 사양하겠어."
"잠깐, 유지훈은? 그냥 저렇게 내버려 둘 건가?"
"감독관한테 연락했어. 곧 재단에서 사람을 보내서 그를 데려갈거야. 그 이후에는 내 알 바 아니고."
나루는 잠깐 동안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파스칼의 뒤를 따라 산에서 내려갔다.
"그런데 그 덫은 어디서 난 거야?" 파스칼이 내려가는 동안에 나루에게 물었다.
"내가 만들었지."
"만들다니?"
"얼마 전에 머리맡에서 갑자기 덫이 하나 튀어나와서는 내 머리를 깨끗하게 잘라낼 뻔 했거든. 일단 피하고 나서 보니까 퍽 흥미로우면서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현상 같아서, 연구를 좀 했지."
"그랬군."
두 사람이 있는 곳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능선의 한 지점, 나무들 사이로 가려진 어두침침한 공간 사이에서 누군가가 그 둘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이 관찰자는 두 사람의 모습을 면밀히 주시하다가,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몸을 일으켰다.
산들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이 위장무늬가 그려진 우의로 몸을 감싼 SCP-940-KO, 신소연을 비추었다. 그녀는 잠시 태양 빛을 받으며 가만히 서 있다가, 이윽고 물러나 나무들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