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 오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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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닐 리가 없다.

비인간들은 휠러를 땅바닥에 찍어 누르고는 팔을 내밀게 붙잡는다. 그러고는 쥐고 있던 손을 강제로 열어 왼손 검지를 내보인다. 끔찍한 생각이 성난 듯 그의 정신에 난 문을 두드리며, 들여보낼 것을 요구한다. 잘못된 생각이다. 그 생각의 모양은 끔찍하며 너무 큰 데다가 독이 잔뜩 발려 있어 들여보내면 휠러가 무엇인지에 대한 모든 걸 집어삼키고, 그의 집을 쓰레기와 부서진 유리 조각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그 생각은 그러한 것들에 휠러를 빠트리고 싶어 하며 말벌과 개미와 맞지 않는 과잉 비유로 그의 모든 것을 대체하리라는 걸 그도 알고, 이미 모든 세상과 그의 주변인을 집어삼켰다는 것을 그도 알기에 휠러는 저항한다. 그는 계속해서 저항하나 곧 그를 찍어 누르던 비인간 중 하나가 끌 하나를 가지고 와 █​█​█​█​█​█​█​█​█​█​█​█​██​█​█​█​█​█​█​█​█​█​█​█​██​█​█​█​█​█​█​█​█​█​█​█​██​█​█​█​█​█​█​█​█​█​█​█​██​█​█​█​█​█​█​█​█​█​█​█​██​█​█​█​█​█​█​█​█​█​█​█​██​█​█​█​█​█​█​█​█​█​█​█​██​█​█​█​██ 그의 존재에 있던 다른 모든 걸 뒤엎고, ​█​█​█​█​█​█​█​█​█​██​█​█​█​█​█​█​█​█​█​█​█​███ 그래, 휠러가 말한다. 그래, 그는 문을 활짝 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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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파괴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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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되어있다는 걸 알고 있는 상대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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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심부로부터 멀어져야 █​█​█​█​███​█​█​█​████​█​█​█​███​█​█​█​████​█​█​█​███​█​█​█​█████████​█​█​█​███​█​█​█​████​█​█​█​███​█​█​█​████​█​█​█​███​█​​ 그의 뒤로 일종의 실이 풀리며, 감염이 ████████████████████

휠러의 누관에서 검은 민달팽이 하나가 기어나와, 아스팔트 위로 떨어져서는 쪼그라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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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러는 넓고 차가운 복도의 딱딱하고 잘 닦인 바닥 위에서 의식을 되찾는다. 마치 내던져진 헝겊 인형처럼, 한쪽 벽에 등을 기대고 오른쪽 팔은 쭉 뻗은 채로 누워 있다. 오른손을 너무나도 꽉 쥐고 있어서 손가락 관절이 아파온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손을 편다. 머리는 어지러운데 몸 곳곳은 쑤셔오는 상태에서, 휠러는 몸을 뒤집고는 반대쪽 손으로 바닥을 짚는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왼손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한다.

휠러는 응당 할만할 반응을 보인다. 검지와 중지가 있던 부분을 꽉 움켜쥔 채로, 처절한 비명과 울음소리를 내지른다. 건물 안에 그 소리가 울려 퍼진다.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휠러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쇼스타코비치 곡을 연주하던 것이다. 막힘없이 완벽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그가 무엇을 연주하고 있었는지 들려온다. 음정 하나 틀리는 것 없이, 기억이 끊기기 바로 직전까지 말이다.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 대신, 가장 마지막에 연주한, 끝내지 못한 음악의 한 토막이 머릿속에서 빙빙 맴돈다. 연주곡은 갑작스럽게 중간에 끝나버렸다가, 거기서 몇 초 전 시점으로 천천히 다시 페이드인 하는 식으로 반복한다. 그게 계속해서 귓전에 맴돈다.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 마치 고장 난 레코드판 같다. 다시는 연주할 수 없으리라.

남은 손가락으로 올바른 손 모양을 만들고자 한다. 손이 따라주지 않는다. 휠러는 그의… 그의 멀쩡한 손으로 눈을 비빈다. 쓰레기 같은 기분이다. 숙취처럼, 탈수 증세도 좀 느껴진다. 셔츠는 사라졌고, 양팔과 가슴팍은 먼지투성이라 거의 회색빛이 되어있다.

다시는 연주할 수 없으리라.

휠러는 한동안 몸을 옹송그린 채로 앉아있다. 몸을 작게 웅크린 채로, 불행하고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을 느끼면서. 결국에는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려고 노력은 하고 있다.

휠러는 고개를 들어 복도를 바라본다. 시야가 점차 돌아오고 있다. 오래 읽을 필요만 없다면, 안경 없이도 주변을 잘 볼 수 있다. 여긴 학교다. 곳곳에 게시판과 쌓여 올려진 사물함들이 있고, 벽에는 무지개가 그려져 있다. 사람은 없고 조용하다. 복도 저쪽 끝에 있는 교실 문에 난 창문으로 흐릿하게 붉은 빛이 들어오고 있다. 다시 말해 건물 저쪽 방향으로 해가 낮게 떠 있다는 말이다. 뜨고 있건 지고 있건. 학교 한두 곳에서 단발성으로 음악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긴 하나, 여긴 처음 보는 곳이다.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며, 휠러는 다친 손을 살펴본다. 손가락 절단면은 덩어리지고 울퉁불퉁하며, 제대로 아물지 않았다. 반흔 조직과 딱지만 한가득이고, 실밥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손가락들이 아주 대충 제거된 것 같다. 끊어내졌거나, 아니면 물려버렸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애먹인다. 휠러의 기억은 보통 예리하면서 명료하다. 분명 명료하게 사고하고 있다 생각하지만, 정신을 집중하여 잃어버린 시간의 기억을 열람하려고만 하면, 그 틈에 있는 무언가가 그를 밀어낸다. 아주 맹렬한 붉은 열기가.

그러고 보니, 절단된 손가락 부위가 완전히는 아니어도, 어쨌든 아물기는 했다. 확실히 피는 나지 않는다. 지속적인 고통은 있지만 말이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잃은 걸까?

당최 무슨 일이 있던 것인가?

교실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복도 저 끝에는, 한 사무실 문이 살짝 열린 채로 있다. 그 안에서,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한다.

*

사무실은 비좁고 불빛은 어둑하며, 서류 더미가 높게 쌓여 있다. 두 개의 작은 책상과 낡아빠진 사무실 의자가 있다. 휠러는 울리고 있는 전화를 찾아 수화기를 든다.

"여보세요?"

합성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휠러 씨?"

"맞는데요. 누구시죠?"

침착한 어조로, 기계적인 음성이 답한다. "휠러 씨, 당신은 상당히 오랜 시간 아팠어요. 지금 가지고 있을 의문은 모두 기꺼이 답해드리죠. 조만간요. 하지만 당장은 안 돼요. W16호실에 여자가 한 명 있어요. 죽어가고 있죠."

"저— 저는 의사가 아닌데요."

"알아요. 당신이 그녀를 구할 방법은 없어요. 그래도, 그녀에게 가주셔야 해요. 당장요."

"제 생각에 전… 전 그런 일에 맞는 괜찮은 인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오늘 상태도 괜찮지 않고요."

"당신이어야 해요.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요."

"…그녀가 누구길래요?"

잠시 말이 멈춘다. 마치 전화기 반대편에 있는 이가 할 말을 고르지 못하는 것만 같다. "그녀는… 중요한 사람이에요. 이제 가세요, 제발요. 그녀에겐 시간이 많지 않아요."

휠러는 어쩔 줄을 모른다. 방금 들은 말을 따르지 않을 정도의 힘은 없다. 달리 갈 곳도 없고 말이다. 전화기가 유선만 아니었다면, 가지고 갔을 것이다. 전화기를 갖고 갈 수 없다는 점에서 휠러는 약간 초조해한다. "전화 안 끊을 거죠?"

"그러죠."

휠러는 수화기를 전화기 옆에 내려둔다. 그러고는 다시 조용한 복도로 나간다. 그는 W16이라고 써있는 문을 찾아서는 안전유리를 통해 안을 들여다본다. 내부는 주황색과 붉은색이 섞인 빛이 가득한 교실로, 저 멀리에 있는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실눈을 뜨고 봐야 할 정도다. 지금이 황혼인지 이른 아침인지는 모르겠다. 당장 교실 안에 누가 보이지는 않는다.

휠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정교하면서도 화려한 생물학 포스터와 수업 활동을 전시한 것, 아무렇게나 늘어놔 있는 책상과 흩어져 있는 책, 펠트펜, 밝은색의 배낭들이 있다. 그는 자신이 봐야 할 것을 아직 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가운데로 난 길을 통해 한두 걸음 나아간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리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펄쩍 뛴다. 칠판에는 분필로 그린 커다란 그림이 있다.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진 여성의 머리와 어깨 그림이다. 분명 들어올 때만 해도 텅 비어 있었다.

그림은 움직이고 있다. 마치 초당 다섯 번에서 열 번은 계속해서 그려졌다가 지워졌다가 다시 그려지고 있는 것 같다. 그림 속 여성은 그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인다. 얼굴 주변에는 많은 양의 머리카락이 그려져 있으나, 검은색 칠판에 흰색 분필로 그려져서 네거티브 사진처럼 보이는 것 때문에, 원래 머리카락이 어떤 색인지는 알기 어렵다. 한 방울의 색상이, 그녀의 밝은 파란색의 굵은 안경테에서 비춰 보인다.

그림 속 여성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마치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나오는 소리는 없지만, 그녀의 옆에 글자들이 써진다.

애덤?

휠러가 말한다. "네?"

그녀가 말한다.

모든 게 기억나

곧 단어들이 스스로 지워지더니 이렇게 바뀐다.

단 한 순간도 잊을 수가 없어

더 많은 문장이 써진다. 하나가 써질 때마다 그 이전 문장을 지워낸다.

그가 한 모든 것을 이제 알고 있어

난 눈먼 채였고, 그는 나보다 훨씬 나았지

난 실수에 실수를 거듭했어

그는 내가 사랑한 모두를 죽였어. 당신을 제외하고

그 직후, 그녀의 입술이 움직임을 멈춘다. 마지막 문장은 기존의 다른 문장들에 비해 오래 남아 있다가, 곧 다시 알아서 사라져 버린다.

휠러는 한동안 그 마지막 문장을 받아들이고자 시간을 보낸다. 이리저리 돌려가며, 도대체 그의 삶 어디에, 그 문장의 내용이 맞아들어가는지를 고민하며 말이다.

여태껏 한 번도 이 여성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게 사실일까? 휠러는 여성의 모습을 살펴보고 제 기억도 샅샅이 뜯어보아, 과거에 무언가 깊고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보지 않았던 아주 기이한 만남이 말이다. 그녀야! 그때 그 병원에서 만났던 여자 말이야, 기억나? 공연이 끝난 다음에, 무대 뒤에서 발에 큰 상처를 입었었잖아. 그날 밤의 반절을 응급실에서 보냈고, 그녀도 그곳에 있어서 넌 대화를 시작했지. 세상에. 그러고 보니, 그녀는 누구였지?

그녀는… 정부 요원, 아니면 적어도 그런 분야의 인물이었어. 비현실적인 여자였지. 나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는. 강인하고, 숙련되고, 아름답고, 사파이어처럼 날카로운 인물. 우린 음악 얘기를 했어. 영화 음악과, 요근래 TV 공상 과학물에 사용되는 쓰레기랑, 데이비드 린치 얘기를 했지. 상황은… 뭐, 그렇게 이른 단계에서는, 모르는 법이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보였어.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 병원에서 내 발을 꿰매주었고, 우린 함께 어디도 가지 않았지.

그러지 않았나?

"매리언." 휠러는 숨을 들이쉰다. 거의 다 왔다. 그는 두려움에 찬 채로 한 손을 들어, 마치 그녀에게 멈추라는 듯한 손짓을 한다. "아냐. 그럴 리가—"

난 당신을 떠나보냈어, 네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말이야

기억이 난다. 전부 한 번에 연결된다. 둘이 공유한 불가분한 수년간의 시간이 말이다. 그 안에는 너무나도 많은 에너지가 담겨있다. 그 모든 것이 격렬하게 그에게 쏟아져 들어와 부딪힌다. 마치 해어진 전선을 붙잡는 것 같은, 총에 맞는 것 같은 기분이다. 휠러는 불신감에 찬 채로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세월을 잊고 있던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안돼. 안돼, 안돼. 매리언."

그것도 소용은 없었어

"너한테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어!"

그리고 그는 세상을 파괴했어

이제 당신은 지옥 속에 살아야 하고 말이야

"어디 있는 거야? 누가 당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난 이미 죽었어. 그저 기억일 뿐이야

하지만 그 기억마저도 이젠 죽어가고 있지

그는 천국으로 가는 길을 찾아냈고, 그마저도 파괴하고 있어

지구를 그러했듯

"필요한 게 뭐야? 내가 그를 막을게. 내가 도울게. 할 수 있는 건 뭐든 할게. 사랑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잠시 뒤, 휠러는 여성의 그림이 멈추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 분필 그림을 찬찬히 살펴본다. 그러고는 머뭇거리며, 오른손을 분필이 두텁게 칠해진 머리카락 명암 쪽으로 뻗어, 한 손가락으로 만져본다. 칠판에는 검은 점이 남겨진다. 분필 가루는 진짜다. 칠판에 남은 것과 그의 손가락에 남은 것 양쪽 모두가 말이다. 그녀는 그저 그림에 불과하다.

그녀는 사라졌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휠러는 의식을 잃는다.

*

휠러는 학교 교실 앞의 딱딱하고 잘 닦인 바닥 위에서 의식을 되찾는다. 마치 칠판 아래로 내던져진 헝겊 인형처럼, 벽에 등을 기대고 오른쪽 팔은 쭉 뻗은 채로 누워 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몸을 뒤집고는, 반대쪽 손으로 바닥을 짚는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왼손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한다.

"세상에." 그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손가락이 있었으나 이제는 짓이겨진 상처만이 남은 곳을 바라보며 말한다. 기이하면서도 추상적인 방식으로, 검지와 중지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뭔가 와닿지 않는다. 마치 이미 그 사실을 받아들인 채로 정신을 차린 것만 같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휠러는 왼손을 제 오른손과 비교한다. 자비롭게도, 오른손은 멀쩡하다. 그는 양손을 함께 움직이며, 최대한 같은 동작을 취해보려 한다. 왼손에는 약간의 신경 손상이 있을 수도 있다. 그 부분은 전문의와 상담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바이올린 활 정도는 움직일 수 있으리라.

"아마 이제부터는 왼손잡이처럼 연주해야겠네." 휠러는 혼잣말을 한다. 세상에나. 예전과 같은 수준으로 능숙히 연주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분명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휠러는 기억을 더듬어본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쇼스타코비치 곡을 연주하던 것이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완벽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연주하던 것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음정 하나 틀리는 것 없이, 기억이 끊기기 바로 직전까지 말이다. 하지만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 대신, 그 마지막 토막이 몇 초 전으로 다시 페이드인 했다가, 끊기는 부분까지로 돌아갔다가, 다시 멈추길 반복한다. 멈출 때에는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그게 계속해서 귓전에 맴돈다. 마치 고장 난 레코드판이 된 기분이다.

그렇기에 그는 항상 하던 행동을 한다. 대체할 다른 음악을 흥얼거리는 것이다.

기분이 이상하다. 숙취처럼, 탈수 증세도 좀 느껴진다. 셔츠는 사라졌고, 양팔과 가슴팍은 먼지투성이라 거의 회색빛이 되어있다. 또한 죽을 것만 같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담배 한 대가 피고 싶어 죽을 것만 같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할 정도로 낙관적인 기분이다. 마치 오랫동안 달고 살던 병이 나은 것만 같다. 마치 최악의 상황이 끝난 것처럼 말이다.

휠러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시야가 점차 돌아오고 있다. 오래 읽을 필요만 없다면, 안경 없이도 주변을 잘 볼 수 있다. 교실은 조용하고, 뜨고 있는지 저물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햇빛으로 인해 붉은색과 주황색이 섞인 빛으로 밝혀져 있다. 주변에는 정교하면서도 화려한 생물학 포스터와 수업 활동을 전시한 것, 아무렇게나 늘어놔 있는 책상과 흩어져 있는 책, 펠트펜, 밝은색의 배낭들이 있다. 칠판은 텅 비어있다.

휠러는 학교 한두 곳에서 단발성으로 음악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긴 하나, 여긴 봐도 어딘지 모르겠다.

교실로부터 멀리 떨어진, 복도 저 끝에는, 한 사무실 문이 살짝 열린 채로 있다. 그 안에서,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한다.

*

사무실은 비좁고 불빛은 어둑하며, 서류 더미가 높게 쌓여 있다. 두 개의 작은 책상과 낡아빠진 사무실 의자가 있다. 각 책상에는 전화기가 올려져 있고, 그중 하나에는 수화기가 옆에 내려놓아져 있다. 휠러는 몸에 내재된, 정돈하고자 하는 본능에 굴복하여 수화기를 다시 돌려놓는다. 그렇지만 당연하게도, 울리고 있는 건 다른 쪽 전화기다.

"여보세요?"

합성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휠러 씨?"

"맞는데요. 누구시죠?"

침착한 어조로, 기계적인 음성이 답한다. "더 나아가기 전에, 간단한 질문 하나 해도 괜찮을까요? 혹시 '매리언 허친슨'이라는 이름이 당신에게 뭔가 의미가 있나요?"

"딱히 그런 것 같지 않은데요. 그래야 하나요?"

합성된 목소리인 탓에 발신자가 그 대답에 실망한 건지, 무관심한 건지 아니면 안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뇨. …제 이름은 울리히에요. 재단이라고 불리는 조직에 속해 있죠. 재단의 목적은 현재 일어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는 걸 방지하는 것이에요."

휠러는 갑자기 두려워져, 몸을 돌린다. 하지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어떤 일이." 그는 약간의 공포를 느끼며 묻는다. "일어났죠?"

"세상이 지옥이 되었어요, 휠러 씨."

"저런. 그것참 안타깝네요."

긴 침묵이 흐른다. 도대체 자신이 얼마나 미친 듯이 상황을 과소평가했길래 이러나 하고 휠러가 생각할 정도로 긴 침묵이다. "…네. 아주 안타깝죠. 휠러 씨, 우린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리고 '우리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라는 건, 다시 말해 제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이제 재단에는 저밖에 안 남았거든요. 그리고 절 도와줄 만한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요. 제가 죽어가고 있기도 하고요."

"정말 유감이에요, 울리히 씨." 휠러가 말한다. 진심을 담아 말한 것이다. 그는 살짝 조심스럽게 다음 할 말을 고른다. "뭘 도와드리면 되는 거죠?"

"바솔로뮤 휴즈라는 이름의 남자를 찾아주셔야겠어요. 앉으시죠. 모든 걸 설명해 드릴 테니까 말이에요."

다음: 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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