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가 찾아와

그는 조심스레 폐허 사이를 나아갔다. 그에게도 이름이 있었지만, 잊어버린 지 벌써 오래였다. 그에게 이제 이름이란 갖고 있는지도 몰랐던 일기장 여백에 그린 그림 밑에 적어둔 단어일 따름이었다. 한때 그는 재단에서 근무했던 적 있었다. 이제 재단은 없었고, 그는 이제 막 인생 최대의 실패 현장으로 다시 돌아온 참이었다.

이 요원의 최대의 실패가 뭐였을까, 그도 이제는 확실치 않았다. 모두들 내 지시를 잘 이해했나 확인도 없이 기지를 떠나버린 것이었을까. 로봇의 가동부들을 모두 보호하지 못한 채로 남겨둔 것이었을까. 편집증이 도진 끝에 359의 격리 절차가 불충분하다고 여겨서 직접 봐야겠다, 이 기분 참을 수가 없다 생각했던 것이었을까. 어쨌든 기지를 떠난 건 그 이유 때문이니까. 그러나 그 실패가 뭐였든 간에, 그가 기지를 나간 그날 돌아갈 기지는 영영 사라져버렸다.

소식은 359의 횃대까지 올라왔던 1등급 인원한테 맨 처음 나왔다. 왜인지 덩굴이 로봇 하나를 타고 다니면서 사람이 보이는 족족 죽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사람들이 화염방사기를 가지고 실험실로 들어가 부수적 피해 없이 대상을 격리하려고 시도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사람이 죽어나갈수록 대상은 더 빨리 퍼지기만 했다. 기지 내 핵탄두를 폭발시키는 방법이 실행가능한 선택지로 격상되는 수준까지 왔을 때는, 그 방법을 실행할 보안 인가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버렸다.

이 요원은 이 기지에다 공습을 요청할 순 있었지만, 그래서 기지를 싹 날렸을 때 덩굴은 벌써 기지를 넘어 쫙 퍼진 상황이었다. 일주일도 안 되어서 미 중서부가 온통 덩굴로 뒤덮였다.

그는 남은 생존자들과 같이 피난처를 세웠다. 거대한 철돔에 채광용 유리 지붕이 달린 곳이었다. 이 식물이 금속과 유리에는 뿌리를 붙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았고, 유리는 지탱해줄 뿌리 없이 덩굴이 못 닿을 만큼이나 높은 곳에 있었다. 여기서라면 안전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 식물놈의 창의력을 까먹은 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생존자들이 돔에서 지낸 지 한참 됐을 때 공격이 시작됐다. 덩굴들이 유리창까지 기어올라와 뿌리에 쥔 바위로 창을 와장창 깨뜨렸다. 그리고 창으로 쥐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쥐 시체들이 깨진 채광창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땅바닥에 닿자마자 바로 그 속에서 덩굴들을 틔워냈다. 생존자들은 손쓸 새도 없이 당해버렸다. 몇 시간도 안 지나서 돔 안은 싸그리 궤멸되었다.

그리고 지금, 열 흔적을 식물에게 노출하지 않게 특수 제작된 단열복을 입은 그는 모든 사건의 시발점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지 그는 알고 싶었다. 그 식물놈들이 투과성 물질들을 돔 위에다 덕지덕지 쌓아올려 채광창까지 올라간 모습을 그는 벌써 목격한 바 있었다.

덩굴에 친친 휘감긴 해골들을 인간이건 아니건 간에 숱하게 넘어다닌 끝에 그는, 어떤 방 한가운데 놓여 있는 무언가를 보았다. 사건 307 때 D계급 인원 하나가 죽고 나서 식물을 돌보는 일을 맡았던 로봇들 중에 하나였다. 팔 하나가 녹슬어서 떨어져나간 지 오래였다. 다가가 보니, 그 안에서 식물이 하나 자라나고 있었다. 수압튜브 하나의 고무 케이싱 안에서 뿌리를 내린 식물이었다.

그가 발걸음을 되돌리려 했으나, 그때 방 저쪽에서 또 무언가가 보였다. 햇빛인 것 같았다. 해는 진 지 몇 시간 지났는데. 가면 안되는데 싶으면서도 그는 덩굴 수북한 문을 통과해 그쪽으로 갔다. 여기가 어떤 방인지 바로 그는 알아차렸다. 그 식물의 격리실, 그리고 아직도 켜진 전등, 맨 처음 식물을 격리하던 바로 그 수경재배실이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 달라진 점이 있었다.

재배장은 어디 가고 탁자가 하나, 탁자 위에 유리 테라리움들이 여러 개 있었다. 각 테라리움 안에는 쥐들이 꽤 많이 들어 있었다. 그가 지켜보던 가운데, 덩굴 하나가 꿈틀거려 테라리움 하나로 기어와 뚜껑을 열고 쥐 한 마리를 만졌다. 즉각 쥐는 움직임을 멈췄다. 덩굴은 쥐를 감싸 테라리움 바깥으로 꺼내 갔다. 그렇게 계속 살아 있었던 거구나. 당신이 생각했다. 저 자식이 숙주를 직접 길러서!

그는 이제 그만 떠나려 뒤로 돌았다. 그런데 무언가 그의 다리를 잡아당겼다. 슈트의 솔기가 가시 하나에 걸려 있었다. 이걸 어떻게 떼내야 하지, 하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가시 붙은 덩굴은 쥐 쪽으로 움직여 솔기를 완전히 뜯어냈다.

곧바로 덩굴들이 그의 체열을 느끼고 가시로 슈트를 구석구석 잡아챘다.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그한테 들려오고, 매우 큰 덩굴 하나가 팔다리를 감싸더니 그를 바닥에 무릎 꿇렸다. 그가 올려다보니 덩굴 한 줄기가 천천히 얼굴까지 올라와 있었다.

식물일 뿐이었다. 입도 없었다. 얼굴도 없었다. 머리 같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주 잠깐 동안, 그에게는 느껴졌다. 덩굴이 그를 보고 씩 웃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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