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 이후

이번 스킵은 예상보다 훨씬 처리하기 어려웠던 걸로 증명이 되려 하고 있었다.

뭐 증거를 대자면, 지금 내 얼굴을 저며서 이쁜 종이가루로 만들고 그 면상가루를 공중에다 흩뿌리고 싶어서 나를 막 쫓아오는 점이 있겠다.

"헷. '면상가루'라니. 다음을 생각해서 기억해둬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막 닫히려고 하는 격리 구역 문 사이로 뛰어들었다. 꽝, 문이 닫히며 틈새로 삐져나온 촉수들을 잘라내고, 안에 든 스킵이 꾸에엑 하는 비명소리를 냈다.

천천히 일어나서 주머니 속 공책을 꺼냈다. 그리고 펜을 집어서 메모를 후딱 써내려갔다.

변칙개체 엄청 적대적, 접근 금지. '면상가루 우려됨.'


두 달 전이었다. 개같은 일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평소의 재단보다 훨씬 더하게, 보통 말하는 이 세상이 피에 목마른 괴물이랑 말도 못 하겠는 공포가 드글거리고 가끔 산딸기 레모네이드 면도날 맛 나고 하는 것보다 더 엄청나게.

그때 나는 대체 무슨 일인지 도통 몰랐다. 경비원들이 나를 감금실로 끌고 가서 학살당하러 가는 송아지처럼 처넣었다. 뭐랄까 대강 송아지 된 기분이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나는 오늘 재수가 드럽게 없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인간 총알받이로 살면 인생이 그렇고 그런다. D계급으로 사는 인생이라면.

처음 한 시간은 또 무슨 격리 실패가 일어났구나, 그래서 늘상 그랬듯이 또 별도 격리당했구나 싶었다. 한 4시간 지났을 때, 평소보다 더 심각한 일인가 싶어졌다. 6시간이 지났을 때, 바깥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살짝 걱정되기 시작했다. 8시간이 지나고, 불이 확 나가고 예비 발전기가 돌아가자, 그때서야 이건 역대급 상황이구나 싶어졌다.

잠시 뭘 어떡할지 생각이 안 났다. 마음 한켠으로는 이 방에서 가만히 죽치고 앉아서 누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 나갔다간 총 맞을 가능성이 농후했으니까. 마음 다른켠으로는 진짜 엄청 큰일이 났다면 아무래도 진작에들 찾아와서 나한테 총 쏘지 않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싹수를 지른다"라고 할까나. 뭐 잘됐네, 그렇게까지 유구한 살인을 추구해서 남긴 얼룩이 효율적인 관료주의에는 확실히 도움 되겠어.

결국 어차피 죽을 바에는 한번 도망쳐라도 보는 게 낫겠다고 결심했다.

환기구 속으로 몸을 구겨넣어 들어가서 복도로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바로 주위를 훑어보며, 기다리던 경비팀이 쏟아붓는 총알을 상대할 각오를 했다. 하지만 정작 보인 건… 살육의 현장이었다.

주위가 온통 천천히 깜빡이는 빨간 경고등 불빛에 물들어 있었다. 나를 잡아가뒀던 경비팀이었던 것들이 복도에 잘잘 흩뿌려져 있었다. 평소에 재단 기지가 일하느라 바쁜 흔적은 모습도 소리도 없고, 복도에 살아 있는 거라곤 온 천지에 흩어져서 꿈틀거리는 직원들 시체뿐이었다. 죽음의 냄새가 더렵게 두텁고 역겨워서 정신이 아뜩하고 골이 아프고, 숨이 막혀서 토가 나오려고 그랬다.

땅바닥에 잘려나간 손 하나가 사후경직으로 권총 하나를 꼭 붙잡고 있길래, 총을 집어들어서 혹시 필요할까봐 챙겼다. 아니 진짜 대체 무슨 좋같은 일이 생겨난 거지?

복도를 계속 따라가면서 폭행의 흔적은 계속 쏟아져나왔고, 대답이나 생명의 흔적은 눈꼽만치도 안 나왔다. 변칙적인 것도. 박사들도 없고 맨날 있었던 경비원도 없고 다른 D계급조차도 없었다. 가는 길에 중요해 보이는 시체한테 ID 카드를 챙겼고, 나중에 마침내 찾고 있던 곳에 도착했다. 기지 이사관 사무실.


"오케이, 나한테 메시지, 앞으로는 그 촉수괴물 스킵하고 지랄하지 말 것. 고맙다 나야."

땅바닥에 털썩 누워 두 손으로 얼굴을 싸매쥐었다. 이토록 오랫동안 혼자 있다 보니 미쳐가는 건가 싶어졌다.

옛날 옛적이지만 다른 D계급들 있을 때, 우리끼리는 교수대 앞의 사람이 빈정거리듯이 하는 블랙유머 감각이 늘어갔다. 물론 여기 있는 그 어떤 것도 교수대보다는 못했다. 적어도 교수대는 품위 있게 목 꺾고 빨리 죽여주지. 친구 D계급들이 처리하는 스킵들이 그렇게나 친절한 놈들이었다면.

또 이러고 있네, 나는.

하지만 이 짓거리도 의미는 있었다. 스킵들을 보고 지랄이라도 해보는 쪽이, 여긴 어디지 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싶을 때까지 되어서야 바지를 축축하게 물들이는 쪽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했다. 적어도 우리끼리 나눴던 말은 그랬다.

다시 바닥을 딛고 일어서 먼지를 털어냈다. 지금 해야 될 일을 생각하면서. 아직 촉수 조각이 어디 묻어서 피부 밑으로 파고들어가서 꿈틀거리거나 하진 않을지 다시 살펴봤다. 충분히 깔끔한 걸 확인하고 나서, 기지 차고로 향했다. 또 다른 뭔가가 지 방에서 튀어나와서 내 얼굴 먹어치우지 않게 조심하면서.

기지 차고는 손길도 닿은 적 없는 것 같은 차들로 그득했다. 하지만 딱 하나, 재단 규격 트럭이 물자랑 갖가지 장비를 꽉 채운 채로 준비만전이었다. 가방에서 체크리스트를 꺼내 하나씩 살펴봤다.

'SCP-3234 밥 주기.' 체크. 항목 바로 옆에다가 "면상가루"라고 썼다.

'일주일치 물자.' 체크. 군용 간이식량 1주일치, 물 많이, 비상시를 대비해서 구급용품 키트.

'캠핑 장비.' 체크. 텐트, 칼, 갖가지 도구, 모두 꾸려서 넣었다.

'무기.' 체크. 무기창에서 권총 하나, 소총 하나, 탄약은 많이 챙겨왔다. 물론 진짜로 스킵을 마주쳤을 때 아무것도 도움이 안될 확률이 더 높겠지만, 적어도 인간 표적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니까. 게다가 스스로도 안심이 좀 더 됐다.

트럭에 타서 기지 이사관 사무실에서 가져온 지도를 살펴보고, 시동을 걸고 차고를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오메가 기지.


기지 이사관 사무실은 실험할 때 불려가면서 수십 번을 지나가 봤는데, 뭐가 어떻게 됐는지 파악하기 제일 좋은 장소겠구나 싶었다. 지나다닐 때마다 이 문 앞에는 무장경비 2명이 있었다.

"뭐 한때는 2명이 있었다 그 말이지." 그렇게 혼잣말하면서 문 양쪽에 튀겨진 피들을 바라봤다. 문은 없어졌는데, 경첩이 뜯어져서 날아가버린 모양이었다. 강철로 된 문이 찌그러지고 뜯어지다니, 뭔지는 몰라도 절대 마주치고 싶지는 않은 놈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도 어떤 놈이 기지를 아작냈는지 모르고 있었다. 분명히 나랑 전번에 같이 실험한 놈은 아니긴 했다. 실험했다면야 여기 계신 피웅덩이 씨 아님 인간 모양 얼룩 씨처럼 되었겠지. 갑자기 이 탁 트인 복도에 나 혼자 덩그러니 무방비로 섰다는 기분이 확 와서 빨리 휙 안으로 들어갔다.

기지 이사관의 시체는 책상에 엎어져 있었다. 기지의 다른 사람들이랑 비하면 놀랍도록 평온한 표정이었다. 무슨 약통이 책상에 열린 채로 놓이고, 그 옆에 어떤 뭉툭한 손글씨가 그 와중에 멋부린 문체로 적혀 있었다.

재단의 그 어느 누구라도 이 글을 찾아서 읽었다면, 이 상황이 하인리히 박사가 작년에 논문에서 가정했던 "XK급 시나리오"일 수 있음을 상기하길 바람. 안타깝지만 불사조 프로토콜이 발동되었음. 신이여 우리 영혼을 거두소서. 당신이 누구이든 행운을 빈다.

이 아저씨가 뭔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감이 안 잡혔다. 머리를 긁적긁적하다 보니 책상 위의 컴퓨터가 아직 켜져 있었다. 이사관의 시체를 옆에 고이 모셔두고 컴퓨터 앞에 앉아보니 희미한 화면이 맨 먼저 눈앞에 보였다.

"패드에 손가락을 대시오"

그러고 보니 컴퓨터 앞에 작은 금속판이 있었다. 판 위에다 손가락을 댔다가 바로 다시 뗐다. 왜 그런지 몰라도 살짝 손을 베여서 얼굴이 찡그려졌다.

피 한 방울이 판 위로 떨어지는 사이, 컴퓨터 화면이 깜빡이다 바뀌었다.

"DNA 및 지문 샘플 확인: D-1573."

"인가 처리 중…"

"불사조 프로토콜에 의거 접근 허가됨."

곧 화면이 바뀌고, 재단 로고 바탕화면 위에 폴더들이 한가득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화면이 내용 비슷한 팝업창으로 뒤덮였다.

브라보 기지 경보: 케테르 등급 SCP 여러 개체 동시 탈주, 즉각 지원 요함.

탱고 기지 경보: 적대적 변칙개체 상당수 탈주로 극도의 인명 손실, 즉각 지원 요함.

엡실론 기지 경보: 적대적 개체들 갑자기 탈주하여 격리 불가능, 즉각 지원 요함.

상급감시사령부 자동 경보: 불사조 프로토콜 발동됨.

경고창이 끝도 없이 뜨고, 너무 많이 클릭하다 보니 몇 개나 떴는지도 까먹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기지가 몇 개야?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난 거고? 아직 누가 남아 있지?

그러다가 화면 오른쪽 아래에서 깜짝이는, 마지막 경고창이 눈에 띄었다. 클릭해서 읽어보니, 심장이 더 쿵쾅대기 시작했다.

불사조 프로토콜 발동

비고: 자동 조치입니다. 불사조 프로토콜은 다음의 이유로 자동 발동되었습니다:

그 어떤 기지에서도 불사조 경보가 울리고 아무 응답도 없는 채로 5시간이 지나, 본 경보가 전송되는 현재 재단 기지 >90%와 연락이 두절된 것으로 판단됨.

또한 상급감시사령부와도 연락이 두절됨.

불사조 프로토콜 설명:

재단의 운용력이 전반 붕괴하여 주요 기지들이 그 어떤 SCP 개체도 제대로 격리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고 상급감시사령부까지 능력을 상실하는 경우, 재단의 핵심 데이터 자산과 중심 목적을 존속시키고자 불사조 프로토콜이 발동됩니다.

불사조 프로토콜이 발동된다면, 재단의 생존 인원은 기존 보안 인가 및 지위에 무관하게 임시로 SCP 개체 관련 5등급 정보보안 인가를 부여받으며, 잔존하는 재단 정보 및 생존자를 규합하여 지체없이 격리해야 할 최중요 변칙개체를 확보하는 임무가 주어집니다.

현재 발동된 불사조 프로토콜 때문에 이 글을 보셨다면, 재단의 의무와 나아가 인류의 역사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다음의 절차를 따라 주십시오:


오메가 기지까지 가는 길은 길었다. 원래 있던 데랑 제일 가까운 재단 기지도 몇 시간 거리였다. 다행히 민간 세계는 딱히 평범하지 않은 일이 생겨난 줄은 모르는 것 같았는데, 그래도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확신은 못하는 법이다.

혹시 오래 있어야 할까봐 싶어서 오메가 기지 걸어서 30분 거리에 캠프를 설치했다. 설마 무슨 일이 생겨날지 완전히 확신도 못하겠고, 또 역대급 사고가 닥쳐오거나 하면 후퇴할 지리도 있으면 좋으니까.

시간을 따져보니까 날 저물 때까지 오메가 기지 주변을 후딱 훑어볼 정도는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총을 집어들고 (지금 상황에선 꺽해야 라이너스의 담요보다 조금 낫고 말겠지만), 의약품이랑 각종 도구, 있는 대로 그러모은 오메가 기지 및 격리 변칙개체 정보를 담은 공책 등이 든 가방을 챙겼다. 진짜로 이제 "세계를 구하고" 어쩌고 할 작정이면 뭘 하기도 전에 띨빡하게 뒤지지는 말도록 준비해야지.

소총을 겨누면서 기지로 조심조심 걸어갔다. 가까이 가 보니 기지는 군사연구 실험실로 위장한 채로 숲속에 숨어 있었다. 기지 전체가 숲으로 둘러싸이고, 아니 그 전에 지하로 들어가서 감추어져 있었다. 기지 진짜 입구는 좀 더 잘 숨어 있어서, 결국 나는 소총을 내려놓고 지도를 들여다보며 입구를 찾아보려고 그랬다.

"손 들어. 움직이면 쏜다."

멈칫, 하면서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싸늘한 호통소리에 맞춰 두 손을 위로 쳐들었다.

"뒤로 돌아. 천천히, 새끼야."

뒤로 돌았다. 혹시 모르니까 가능한 한 최대한 천천히.

목소리가 누군지 보니까 웃음이 터질 뻔했다. 아무래도 12명, 나랑 같은 D계급들이었다. 나는 벌써 일주일 전에 버렸던 점프수트를 아직 입고 있었다. 다들 나무 저편에서, 보호막 뒤에서, 수풀 속에서, 오만 데서 땀을 줄줄 흘렸다. 딱 한 명만 총을 들었는데, 이 여자가 바로 나한테 소리 지른 사람인 것 같았다.

인생은 참 이상하게시리 아이러니하지? 원조 재단 직원은 모두 죽어버리고, D계급 13명만 남아서 나머지 시체를 지키고 있으니.

"넌 대체 누구야?" 호통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총구가 내 머리를 똑바로 겨눴다.

"진정해, 진정. 나도 너네 친구야." 최대한 내 안에 있는 침착함과 친근감을 목소리에 담아서 내가 말했다.

"정체를 밝혀, 자식아. 무단 침입죄로 쏴버리기 전에."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 채로 여자가 말했다.

문득, 싱긋 웃음이 나왔다. 기지 이사관 컴퓨터에서 파일들을 뒤지다가 봤던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앞에 모인 사람들한테 웃어 보이면서 내가 대답했다.

"나를… '관리자'라 불러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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