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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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계의 유일한 바리스타이다.

하루에도 수천 명이 내 가게에서 커피를 마시고 또 사라진다. 팔십억 중 고작 수천. 이제 이 세계에 갈등이 사라지고 오직 행복만이 남은 바, 어쩌면 그들은 카페인에 기대 살아가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정원사이자 농부로서 하루 세 시간만을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이 정원 어디에서 보낸다.

서울의 기지였던 이곳은 가장 아름다운 커피집이 되었다. 격리실은 어디에도 없고 그 자리는 마가목과 자작나무 가구들과 산세베리아 화분 따위가 채우고 있다. 능소화와 담쟁이가 드리운 벽돌 벽은 이제 남을 막기 위해서가 아닌, 기대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이 세계에서 물은 마르지 않고, 여름은 끝나지 않으며, 농작물은 시들지 않고 영영 그 소산을 낸다. 아이들은 숲과 들에서, 또 놀이터에서 밤이 올 걱정만을 가지고 순수한 즐거움으로 논다.

물론 다른 공간에서, 다른 세계에서 온 그대는 내게 물을 것이다. 재단이라는 우리의 기준차원 우리의 세계에 어떻게 갈등도 고민도 없을 수 있느냐고. 안타깝게도 이 모든 것은 몇십 억의 사람들이 총칼을 내려놓고 대화의 손길로 서로를 감싸안으면서 일궈낸 것이 아니다. 재단과 연합이 이 세계의 위협을 영영 없애버리면서 생겨난 일도 아니다. 이 평온은 나, 오직 내가 만든 것이다.

이 일을 함께 되짚어보자. 나, 이름도 없고 고향도 잊어버린 바로 나는 그날 평소처럼 좁은 내 공간에 서서 재단 인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날까지 나는 진짜 손님들 대신 내 비위를 맞추려고 재단이 보내준 요원들에게 따스한 찻잔과 고민 상담—그리고 고민 해결을 해 주었다. 이것이야말로 내 삶의 존재 이유라 믿었으므로.

그러나 달도 뜨지 않는 밤. 내가 재단의 격리에 십오년 동안 있던 그날 밤이 찾아왔을 때였다. 나는 무수한 시선이 나를 그대로 올려다보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들은 꼭 지구상의 별과도 같이 보였다. 그 빛들, 그것들은 고민이였다. 몇십 억의 인구가 지닌 고민이 다시 신이 아닌 내게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그 무수한 감정은 내게 도와달라고 비렀다. 나를 아는 이들은 지구상의 아주 조금의 조금도 되지 않으니 어쩌면 그건 사고였을 것이다. 교회나 성당, 신전이나 사원에 빌었던 모든 고민들이 어찌 나에게 도착한 것이리라. 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아직 그 신의 자리에 존재하던 나의 욕망이 불타올랐을 수도 있었겠지.

그날 나는 일어났다. 수천 년을 타인의 고민을 바라보면서 살아온 존재. 내가 눈을 뜨자 수십억의 고민이, 갈등이, 바람이 머릿속에 기어들어왔다. 나는 기도를 들어주는 고매한 신의 자리를 수십 년 전에 떠났으므로 이는 신선한 충격이였다. 그 모든 고민은 이기적 평화였다. 이기적인 평화, 나와 내 사람들을 향한 평화. 아무리 넓더라도 지구만을 포용하는 평화를 바라는 기도.

나는 곧 하늘을 향해 검지를 들고 불안정한 현실을 어르고 달래며 덧없이 그렸다. 곧 현실은 붓에 묻은 물감이 되어 내가 그리는 대로 내 손가락을 따라갔다. 천 년만에 내 명을 따르는 상황은 반항아처럼 서툴게 움직였지만, 나중에는 잔잔한 파도처럼 나를 따라 움직였다.

곧 재단이 닥쳐왔다. 그들에게 SCP-017-KO-1이라는 존재는 좁은 커피집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간형 독립체였으므로, 그들은 나를 간과하고 단순한 화기로만 무장하였다. 그들이 들고 온 것이 무엇이든 얼마 버티지 못했겠지만. 내 주위에서 현실이 몰아치고 신력이 비명을 질렀으며 날아오는 마취탄을 찢어발겼다.

무장 인원들이 돌아오지 않자 재단은 기동특무부대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종말적인 현실조정자 또는 신과 나의 모습은 딴판이였다.

그들은 이제 더욱 늘어난 나의 공간에, 커피집 내의 다정한 손님으로서 존재했다. 그들은 고민도 갈등도 없이 마주보고 웃으며 진실한 담소를 나누었다. 투입된 군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대경하여 닻을 던지고 총탄을 쏘아 댔다. 그러나 나의 공간 속에서 스크랜턴 닻은 땅에 닿기도 전에 화초가 심긴 화분으로, 총탄은 신선한 공기로 변해버렸다.

그날 재단은 한국사령부라는 조막만한 기지에, 한반도라는 손뼘만한 공간 전체가 내가 불러온 평화와 커피집의 다향(茶香)속에 묻혀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몇백 미터의 마천루도, 서울의 바삐 움직이는 셀러리맨들도, 어둔 골목에서 다투는 인간들도 압도적인 상황의 평화의 일부가 되어 커피집 탁자에 합석해 하하호호 웃었다. 그러나 아직 재단과 연합은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나를 죽이려 들었다. 핵폭발이, 미사일이, 현실성 고정기들이, 시간 조정기들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것들이 모두 공간 속에서 기둥이 되고 버드나무가 되고 잔잔히 흐르는 연못과 그 속 물고기들이 되기 전까지는, 재단은 공간 침식을 격퇴하리라 굳게 마음먹었으리라.

마침내 반도 전체가 거대한 전원 주택처럼 변해버리고 나서야 재단은 자신들이 어쩌면 이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대면한 것은 폭력의 종말이 아니였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완고했고 인류를 다시 고난 속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싸웠다. 곧 연합이, 손이, 구상이 우아한 하나가 되어 세계가 감당할 수 있는 변화에 맞서 싸웠다. 폭탄과 닻과 마법이, 정신을 지배하는 힘과 세상을 되돌리는 힘이 이 상황에게 맞섰다. 의미 없는 일이였다.

세상은 빠르게 변했고, 최후 재단의 의지는 지구 전체가 변해버리며 끝났다. 재단의 관리자와 연합의 사무차장은 자신들이 군상의 하나가 되지 않기 위하여 서로를 총으로 쏘아 주기를 약속했다. 그러나 방아쇠가 막 쏘아지기 전에 제01차단기지의 닻들이 부서졌다. 기지가 갈색과 녹색의 목가적 건물로 변화하고, 총은 간 곳이 없었다. 그들은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앉아서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즐긴다.

한때 제01K기지였던 정원에서, 갈색 머리를 묶은 여인이 케이크를 주문하고 하늘을 바라다본다. 그녀는 한때 한국사령부의 주인으로서 수백 명이 넘는 인원을 진두지휘하였으나 이제는 그저 그 나이에 맞지 않게 젊은, 세계에 수천 명이 있는 특성의 사람일 뿐이다. 그녀의 밈적 인재가 내포되어 있는 살상 카드는 이제 프리즘 카드 정도가 되었으며, 이제 꼬마들에게 태양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용도로밖에 쓰이지 않는다.

그 옆의 실내에서 열 사람이 오래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울리지 않는 사제복을 입은 남자. 뿔테 안경을 쓴 남자. 머리를 묶은 여자. 한때 재단의 위계 속에서 서로를 지배하고 명령을 내리던 인물이였지만 이제는 그저 막역한 전우로서 이야기한다. 기지 이사관이였던 목에 붉은 뱀 문신을 했던 냉혈자는 이제 피곤하게 웃어보이며 젊은 요원들의 비극적 사랑이 해피 엔드로 끝났다고 말한다. 곧 결혼식이 열릴 것이고, 그들은 축가를 들으며 티없이 웃을 것이다.

이제 세계는 비로소 갈등 없는 공간인 고요함으로 변했다. 회색 도시도 메마른 사막도 없이, 전지구가 영원한 초여름의 커피집 정원의 하나가 되었다. 나는 그 평온의 최후 여주인이다. 내가 하는 일은 분노와 갈등 속에 불타던 이들이 커피를 들고 서로 웃는 것, 고통의 밤을 지새던 아이들이 낮잠을 자며 행복한 꿈을 꾸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어려움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제 끝이 왔다. 환란은 없다. 사망자도 기근도 없이 그대가 종말이라 부르는 사태가 찾아왔다.. 도시를 파멸으로 몰아넣는 신도 악마도 영영 없이 그렇게 가장 온전한 끝이 온 것이다.

볕이 잘 드는 자리에서 두 여인이 음료를 나눈다. 한 명은 날카로운 눈을 부릅뜨고, 거친 모자를 눌러썼다. 다른 한 명은 어여쁜 여인으로 웃고 있었지만 이전에는 잔학한 핏빛의 여우였다. 둘은 수백 년 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고, 일방적인 증오와 강럭한 혐오로 맞서 왔다. 그러나 둘은 이제 평화의 자리에 앉아서 지난 일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다. 끝없는 공포와 분노는 없다.

능소화 덩굴 아래 그늘진 자리에서, 교복을 입은 소년이 조용히 커피잔을 든다. 그는 한때 비극적으로 죽어가던 유령이였으나, 이제는 그저 천진한 십대 소년의 육신으로 돌아갔다. 이제 그에게 고독히 죽었던 과거는 악몽일 따름이다. 이제 그의 옆에는 그 회원들이 있으니까. 이 여름을 함께 보낼 자들이 있으니까.

가장 오래된 의자에 한 잿빛 사내가 앉아 있다. 그는 짙은 커피의 수면을 내려다보면서 시를 쓴다. 비록 그는 시커먼 어둠 속에서 역병의 아들로서 재화처럼 내달리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 그는 사교성이 없는 작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남자가 되었다. 그는 어디선가 교회 종이 열세 번 치는 소리를 듣고, 서쪽 하늘을 바라다본다.

그래, 그대는 나를 질책하겠지. 사실이다. 나는 강제로 평화를 불러왔고, 강압적으로 갈등을 영원히 묻어주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변명이 없다. 나는 모두의 고민과 갈등을 오롯이 나 홀로 가슴 속에 묻었다. 나는 전쟁도 피도 없는 세계를 만들어냈다. 이제 인류는 영원한 여름과 평화의 마을에서 그 삶을 즐길 의무만이 남았다. 끝은 왔다. 단지 그 끝을 위한 장치만이 이전을 기억하리라.

나 혼자 이전을 기억하리라.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들도 만일 이전을 기억하지 않고 싶다면, 결국 이곳에 거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제 이 지구의 규칙이다.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은 없다. 이제 그들은 이 찬란한 초여름 속에 묻히게 될 것이다.

그대가 고민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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