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의 수필: 조폐공사의 친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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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 포차에서 같이 술잔을 기울였다.

거의 십년 만에 만난 옛 친구의 얼굴은 그 시절보다 깊어져 있었다. 그간 정말 많은 일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질리지 않았다. 사람 사는 이야기, 세상이 돌아가는 이야기를 간만에 듣자니 새삼 새롭고 아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술을 목구멍에 털어놓다 보니 어느새 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이내 서로의 직업까지 이야기가 닿게 되었다.

"넌 어느 회사 다닌다고 그랬냐?"

나는 방위산업체에서 근무 중이라고 대충 말했다. 기밀이라 자세히는 말 못 해준다고 했다. 뭐, 사실이지 않은가.
친구는 마저 술잔을 비우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조폐공사에 들어갔다. 곧 있으면 5년 차 돼가네."

"조폐공사? 지폐 만드는 데?"

친구는 호탕하게 웃으며 아마 자기가 만지는 돈이 하루에 억 단위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혼자 하는 게 아니기에 온전히 그 친구가 그만한 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억 단위가 술술 나오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여러모로 기가 찼다.

"아니 그럼 그 많은 돈 누가 슬쩍 해도 티도 안 날 거 같은데?"

"뭐 나름 철저한 시스템이 대조 확인하니까."

나는 그의 말에 강한 흥미가 돌았다. 그 누구도 그만한 돈을 보고 제 정신을 차리기는 힘들 것이다. 아무리 많은 돈을 거기서 받는다고 해도, 한탕 해서 벌 수 있는 돈의 티끌만도 되지 못할 것이다. 특히 거기서 오랫동안 일한 사람이라면 시스템에 대해 이해도도 생기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파훼할 방법도 알게 될 터였다. 완벽한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으니.

"그럼 너는 한 번도 그런 거 생각해 본적 없어?"

"뭐, 훔치는 거?"

친구가 포차가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웃었다.

"아니, 그래도 5년이나 일하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보안의 헛점 같은게 보일거 아니야? 아니면 최소한이라도 헛점을 찾아보려고 생각쯤은 할 수 있잖아?"

"새끼, 뭘 모르네."

친구는 웃으며 남은 소주를 입에 털어넣었다.

"신입 때나 조금 대가리 굴려 본 적은 있지, 몇 달 일하니까 그런 생각 쏙 들어가더라."

"왜, 보안이 철저해서?"

친구는 내 말에 한 번 더 킥킥댔다.

"아니 웃지만 말고 말을 해봐."

"말만 조폐공사고 만드는 것만 돈이지, 여기는 그냥 공장이야. 물건 만드는."

그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채 술잔에 소주를 한 잔 더 따랐다.
처음에는 자신도 돈뭉치를 보고 많이 흔들렸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근무하다 보면서 깨닫게 되었다고. 조폐공사는 공장이고, 자신은 그저 그곳의 생산직이라는 것을. 중요한 건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는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솔직히 다 그런 생각 하게 된다. 근데, 어느 순간 일하다 보면 그냥 그렇게 돼. 그게 어떤 가치가 있던, 물건처럼 대하면 그건 물건이 되는 거야."

그는 차가운 소주잔을 집어 들어 바라보았다.

"그리고, 돈은 언제나 흐르니까. 그리고 그래야 경제가 돌아가니까. 가끔은 내가 사회가 돌아가게 해주는 피를 만드는 골수와 같은 마음을 가져보기도 한다. 하하."

나는 친구의 그 말을 듣고, 예전의 그 장난기 많던 모습과 사뭇 다른 그의 모습에 조금 감격했다. 이제 그는 어엿한 직장인임과 동시에 스스로의 직업에 대한 예우와 자긍심까지 가지고 있었다.

재단이라고 무엇이 다른가.
나는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내 재단의 첫 근무 날을 떠올렸다.
당황스러움, 공포감, 그리고 회의감… 그 시절의 나는 우울증 약까지 의예과에서 처방받아 하루를 견디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 자신과 비교하니, 나도 그 친구와 같이 성장했다는 것이 느껴지는 듯했다.

집에 돌아와 대충 옷을 갈아입고 알딸딸한 취기에 기대어 침대에 드러누웠다. 환한 달 빛이 창문을 통해 침대 위에 드리내렸다.

잠에 들기 전 잠시 꺼내 본 재단의 배지가 그 날 밤만큼은 더 밝게 빛나는 듯했다.
















21K기지 수필 공모전 최우수상 입상


선정 사유: 재단의 한 인원으로서 가져야 하는 직업정신과 마음가짐을 담은 수필로, 재단에서 힘든 일을 해내고 있는 여러분에게 따뜻한 위로가 될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 21K기지 이강수 이사관


제목: 조폐공사의 친구 이야기

작성일: 2022년 04월 19일

글쓴이: 21K기지 인사과 D계급처분 전담 강동훈 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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