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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가끔 배은망덕이란 말을 특히 떠올릴 때면 글럿(Glut) 박사는, 왜 이 자기보다 훨씬 젊은 빨간 머리 여자는 내 아내가 됐는지 궁금해지고, 아버지 콤플렉스 때문에 그랬는지 과거가 구린 건지 정신적 문제가 있는 건지 추측해 보고는 했다. 하지만 글럿은 오늘은 그냥 아내의 사랑스런 눈길을 누리고, 자존감의 문제는 떨쳐버리고 (아마도 진짜 문제는 여기라고 글럿은 생각했다. 자존감이 낮아서 이렇게 아름답고 총명한 사람이 자기 같은 게으름뱅이랑 같이 산다는 사실을 못 믿는 건 아닌가 하면서) 저녁만을 맛있게 먹고 싶었다. 앤투아네트Antoinette한테 뿜어져 나오는 다정함을, 검은 앞머리 사이로 자기를 쏘아보는 입양한 아시아계 어린 아들을 자꾸 달구는 뚱한 열기가 상쇄해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알람이 갑자기 삐삐 울렸을 때, 글럿은 그렇게 엄청 슬픈 기분은 아니었다.

"미안 앤투아네트, 저녁 정말 맛있지만 가봐야겠어. 일이 문제야 문제."

"괜찮아요, 그래도 최대한 일찍 오셔야 돼요." 아내가 수줍은 듯 말하며 윙크하자, 아들은 철없게도 우웩 하는 소리를 냈다. 지난 몇 년 동안 아무 생각나는 이유 없이 계속 화만 나는 이 아들을 보고 글럿은 열통이 터졌지만, 그래도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적어도 오늘밤은 내가 뭘 했길래 이런 아내가 생겼을까 하는 걱정은 안 할 수 있으니까.


"그래 여기선 무슨 일이 생겼지?"

"목격자들 말로는 '큰 뿔 달린 도마뱀 돼지' 뭐 그런 생명체가, 빌딩 안에서 날뛰면서 벽을 머리로 들이받고 뚫어버리면서 방들을 온통 싸돌아다녔습니다."

"알겠어." 별로 듣지는 않으면서 글럿 박사가 대답했다. 그런 사건이야 자기 분야는 아니었으니까.

두 사람은 빠르게 걸어가 모텔 안으로 들어갔다. 모텔은 대롱대롱 달린 플라스틱 판들로 군데군데로 나뉘어진 상태였다. 50줄에 접어든 글럿은 기름진 검은 머리에 회색 줄무늬가 생겨나고 똥배에 실험복이 걸쳐 있는 모습이었다. 이번에 처리할 남자에게 다가가면서 글럿은 검은색 가죽 장갑을 오른팔꿈치까지 오도록 잡아당겨 꼈다.

글럿은 커튼을 밀치고 방수포로 대충 나뉘어진 좁은 구역 하나로 발을 들였다. 스탠드 불빛이 의자에 묶인 남자를 환하게 비췄다. 글럿은 쭈그리고 앉아 남자의 눈을 바라봤다.

"뭘 보셨죠?"

"어떤 괴물이 보였어요. 아니 사람들 다리를 물어뜯었다니까요." 남자는 처량하게 속삭이며, 무서워하고 또 동정을 바라는 눈빛으로 글럿을 바라봤다. 글럿은 약간 떠는 듯이 고개를 아주 살짝 젓고, 다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방수포를 옆으로 젖혔다.

"이 뒤쪽엔 뭐가 있지?"

검은 유니폼에 방독면을 착용한 군인 하나가 대답했다. "음, 이곳이 피해를 입어서 건물이 무너질 때 방 사이의 벽들이 많이 붕괴했습니다. 이 구멍으로 가면 화장실이 나옵니다."

글럿은 남자를 꽉 틀어잡고 밧줄을 끊은 다음, 남자를 의자에서 끌어내 질질 끌고 갔다.

"박사님, 거기는 작업하시는 구역 밖입니다. 나가시면 안됩니다. 저희도 공간이 부족해서 난립니다."

그 말을 글럿은 무시하고, 옆으로 돌아 화장실로 걸어갔다. 남자를 무릎 꿇린 글럿은 가죽 장갑 낀 오른팔로 남자의 얼굴을 변기에다 처박았다. 남자가 버둥거렸지만 글럿은 머리를 계속 누르고 있었다. 몇 초 동안 남자는 꾸르륵거리고, 숨이 막히고, 또 버둥거리고, 미친 듯이 허우적거리고, 똥물을 마시고, 입이 수면에서 겨우 빠져나오자 비명을 질렀다. 글럿은 최대한의 힘으로 남자의 머리를 충분한 시간 느직하게 내리눌렀다가 다시 확 끌어올렸다. 젖은 머리가 벌벌 떠는 남자의 얼굴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못 보신 겁니다."


감각 차단실은 완전히 캄캄했다. 매우 큰 곳이었고, 예배당이나 탑처럼 좁지만 천장 높아 보이는 곳이었다. 문이 열리면 밝은 황금빛이 가늘고 길게 남자에게 드리우며 그런 느낌을 더했다. 의자를 긁는 소리가 나더니, 방 안이 완전히 환해졌다.

"안녕하세요, 제이슨." 글럿 박사가 자기 앞의 남자를 골똘히 바라보며 말했다.

희한하게도 남자는 바로 웃으며 활기 넘치게 지껄였다. "여러분들 무슨 맨인블랙 같은 사람들인가요? 그럼 이제 제 기억을 지우겠네요! 이런 사람도 이런 곳도 진짜 있을 줄 알았다니까요. 제가 하늘이 반짝반짝할 때마다 하늘 올려다보는 것도 다 그래서 그래요."

남자의 땅딸막한 얼굴은 음모론 취급이나 받던 자기 믿음이 진짜임을 확인했다는 기쁨 때문에 오히려 웃음으로 차 있었다. "이제 전혀 기억 못하게 되겠지만 직접 체험하니까 진짜 멋지네요. 그러면 어떻게 지우는 건가요? 빛 번쩍해서예요, 뭐 주사해서예요?"

"둘 다 아닙니다, 제이슨."

제이슨 스트로빅스제크Jason Strobixzek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뼈가 살을 때리는 소리, 마구 후리는 소리, 누군기 소리지르다 땅바닥에 풀썩 쓰러지는 소리. 문이 열리고, 글럿 박사는 걸어나오며 손에 끼운 큰 반지를 매만졌다. 반지에 달린 뾰족하고 화려한 보석 원석에 방 안 남자의 피와 입술 살점이 묻어 있었다.

"윌리엄 건William Gun한테는 무슨 위장정보를 준비했지?"

"미끄러져서 호수에 빠지는 걸로 됐습니다." 가까이 서서 매질을 지켜봤던 전문가가 말했다. "그리고 익사할 뻔한 걸로요. 허우적거리면서 수면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기억만 남을 겁니다. 촉수나… 뭐… 진흙 속 생명체는 기억에서 사라지고요."

"아 그래, 그 이야기 조금 고쳐서 호수로 어쩌다 던져넣어지는 방향으로 바꿔놓는다고 생각하고 있겠어, 벤자민Benjamin. 무슨 패거리가… 집단 구타했다거나 그렇게…" 말소리가 차츰 줄어들며 손가락을 너절하게 꺾으며 글럿이 말했다.

경비원 하나가 말했다. "A급 기억소거제 투여합니까, 박사님?"

"아 그래, 그래야지." 유감스럽다는 듯이 글럿이 대답했다.


"그럼 뭐야, 전부 거짓말이라는 거야?" 각자 맡은 업무를 처리하러 복도를 같이 걸어가는 길에 칼렛Qalet 박사가 물었다.

"참나, 모든 걸 다 아는 사람은 없어. 재단의 면면 중에서 자네만 알고 나는 모르는 비밀도 있을 테고, 내가 아는데 자네가 알면 무서워서 발가락을 오그라뜨릴 비밀도 있겠지. 그러니까 한 사람이 너무 많은 정보를 알 수는 없다는 말이야. 안전을 생각해서. 그래서 좀 더 부드럽게, 인간적으로 어떤 일을 표현하는 반쪽짜리 사실들이 만들어지는 거지.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을 누구든 나무를 볼 순 있어도 숲은 절대 못 보는 거야. 손을 너무 더럽히거나 죄책감을 너무 느낄 필요도 없어지고. 왜냐면 우리가… 이 죄를… 나눠서 가지니까."

"그 주사 이야기도 방금 말한 '반쪽짜리 사실'이라는 소리 같은데."

"그럼, 정신은… 정신이란 건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구조야. 주사 한 방 놓는다고 전부 해결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물론 우리한테 있는 기억소거제들 대다수는 새 기억이 못 만들어지게 방해하고 최근 기억을 차단할 수 있는 게 맞아, 분명 이따금 유용할 수도 있지. 그런데 SCP 재단이 민간인과 한 번 접촉하면 90%는 오랫동안 계속 접촉하게 된단 말야. 사실이 그래. 그냥 얼굴 한 번 마주치고 원래 가던 길 룰루랄라 그냥 가지를 않는다고. 그래준다면야 쉽게 처리가 되지. 그런데 그 경험이 깊게 스며드는 경우가 있어. 인생이 바뀌고 커뮤니티가 생기고 믿음이 만들어져. 그 길다란 사슬을 이루는 기억 중에 뭘 차단할지, 고작 화학물질이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해? 너무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야. 그래서 이 방법을 쓰는 거지. 자리에 주저앉힌다. 이야기를 해 본다. 그리고 세뇌한다…

"굴라크 스타일…스럽지? 마법의 약 같은 건 없어. 과학자들 잠자리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동화일 뿐이야. 자기네 보고서에 그 길고 고된 절차를 약어 하나로 쓰고 치워버릴 수 있게 해주는. 민간인에게 고문과 신성모독을 내리면서 정말 자기 손으로 그러는 줄도 모르게 해주는. 그냥 또 다른 숨은 사실, 비밀일 뿐이지."

"A급 기억소거제는 정확히 어떤 효능이지, 그럼?"

"B급, C급은 최근 기억에다 쓰기 좋아. 귀찮은 일 없이 끝나기도 좋지. 하지만 A급은… A급은 아무 효능이 없어. 그냥 순한 진정제야, 무하마드. 그게 다라고. 순한 진정제를 과학자가 주면 사람들은 진정하게 되는 거야. 기억을 잊고 머리가 텅 비고 그래 보이겠지만, 그냥 몇 초 동안 취할 뿐이야. 하지만 과학자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그 민간인이 좀 있으면 평범한 원래 삶을 계속 살아가리라고 믿을 수 있지. 끝이라고 믿는 거야. 그리고 그 사람들 우리한테 보내면서, 자잘한 뒤처리, 앞으로 써야 할 서류, 검토하고 확정짓고 승인할 명령 몇 개 생각만 하지, 진짜 과정이 이제야 시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진짜는 그때부터야. 이제 시작이라고. 끝일 수가 없어. 하루아침에 끝마칠 수 있는 과정이 아니거든. 그 사람들 어떤 때는 몇 달, 몇 년을 있을 수도 있지… 연구원이나 4등급은 그 사람들을 나가는 문 바로 앞의 진단실에 데려다줬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전혀 다른 곳으로 데려가… 그것도 오랫동안."

복도를 마저 걸어가는 동안 무하마드 칼렛은 아무 말도 없었다. 두꺼운 철문 앞에서 두 사람은 멈춰섰다. "내 사무실 왔네…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지." 글럿은 눈을 한번 내리깔았다가 다시 확 치켜올렸다. "자네 너무 겁준 건 아닌지 모르겠어… 하지만 알고 싶어했잖아. 그리고 자네도 이해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 사실 우리는 아직 기술이 딸리는 상황이야. 이 문제를 따지고 보면 현실의 기술은 다 원시적이야. 생각하는 만큼 발전하지 않았다고. 로켓선을 생각해 봐. 이름만 들어도 느낌이 미래적이잖아? 하지만 사실은 금속 튜브가 수백 년 이어져 내려온 그 유치한 폭발반응을 사골까지 우려먹는 현장이라고. 특별한 거 없어. 우리 방식도 똑같은 거야. 인상 깊은 신기술 없어. 무지 독창적인 알약이나 액체 같은 거 없는… 있는 거라면 이마를 제대로 겨냥하는 망치 같은 게 있지."

그렇게 말하고 글럿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무실은 조그맣고 축축한 현대식 지하감옥이었다. 수척해진 남자 하나가 그 벽에 묶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키노시키Kynosiky 씨! 어제 제가 말씀드린 결론에는 다다르셨습니까? 당신이 미쳐서 그 모든 걸 상상해 냈다는 사실에요?"

쫄쫄 굶어 뼈만 앙상해진 남자가 겨우 내뱉었다. "알쏭달쏭해요."

"네, 출발이 좋군요! 이제 일어나 봅시다. 일어나요, 일어나! 한 번 연습을 해보자구요."

칼렛 박사는 오싹해진 채로 그저 지켜보며 꺄악 소리지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겨우겨우 참았다. 그리고 그 자리를 후딱 떠나며 자신이 본 광경을 머릿속에서 애써 물리쳐 봤다. 그리고 성공했다. 가끔은 기억을 지우는 데 이상하고 무서운 맨인블랙 요원들은, 불과 열기와 채찍과 심리전만 있다면 꼭 필요없을 수도 있으니까… 가끔은 편리한 거짓말과 압도적이라서 풀지 못할 죄의식만으로 충분할 수 있으니까.

가끔은 잊는다는 것은 굉장히 쉬우니까.


글럿 박사는 오래 쓴 손수건을 꺼내 여자의 얼굴을 닦았다. 오래 쓴 손수건인 것은 업무상 다른 사람의 턱에 흘러내리는 침을 닦을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일하다 보면 사람들은 대개 침을 줄줄 흘리곤 했다.

글럿은 가는 바늘을 여자에게 찔렀다. 아래쪽 전원 상자에서 나온 전류가 전선을 타고 바늘로 흘렀다.

"신디Cindy, 당신은 22살 때 이 도시로 이사했습니다. 그리고 막 도착했을 때 조그만 식품점에서 출납원 자리를 얻었죠."

혼미한 듯 여자가 동의하는 표시로 웅얼거렸다. "그렇죠, 그랬으니까요. 그리고 언젠가는 캘리포니아로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글럿이 다시 여자를 찔렀다. 몸이 살짝 경련했다. "사실 그게 당신의 목표였습니다. 배우가 되고 싶어서 저축하는 중이었죠! 좀 있으면 넉넉하게 모일 테고요." 글럿이 바늘을 또 하나 들어 두 개를 동시에 찔렀다. "아 젠장, 전압 좀 올려, 짐Jim." 다른 남자가 다이얼과 버튼을 몇 번 조작한 다음 매우 두꺼운 바늘이 달른 큰 주사기를 집어올렸다. "왼쪽 피질에 주사해." 뼈와 살을 파고들거나 조그만 구멍을 뚫거나 코, 목 뒤를 거쳐서 척추까지 갈 필요 없이 짐은 지시대로 주사했다. 신디의 정수리가 진작에 절개되어 있었으니까. 글럿은 전기 바늘을 다시 들고 살짝 탄 전두엽을 찔렀다.

"그럼 남은 게… 당신은 다시 가족을 찾아볼 생각이 없습니다, 신디. 전에 대판 싸웠으니까요, 그렇죠?"


글럿 박사는 산들바람을 즐거이 맞으면서 보도를 걸으며, 아래쪽에서 움직이는 부츠와 금간 블록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안 보이는 사이 빠르게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자전거 한 대가 글럿의 옆에 툭 부딪혔다. 자전거 탄 남자는 뭔가 정신이 팔린 듯이 움직이다 미끄러져 넘어져 구르면서 무릎이 살짝 까지고 발가죽이 벗겨졌다. "괜찮으세요?" 글럿이 물었다. 그러나 남자는 글럿이 뻗은 손을 잡지 않고, 천천히 일어났지만 글럿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멍한 것처럼. 그리고 자전거에 조용히 다시 올라타 그냥 다시 출발해버렸다.

라이언 글럿(Ryan Glut)은 그 남자가 이상하게 눈에 익었다.


글럿 박사는 방으로 들어와 제이슨이 진행 중인 과정이 어떻게 되어가나 살폈다. 눈은 눈구멍 안에서 미친 것처럼 빙빙 돌고, 허공에 보이는 유령들을 할퀴고, 뒤죽박죽한 색깔이 보인다고 비명을 질렀다. "좋아, LSD랑 다른 환각제들 섞여서 제대로 효과가 나타났군." 세뇌 전문가 글럿이 동료들에게 말했다. "아귀가 모두 맞군… 혼자 살다 미쳤고, 음모론에 빠졌고, 지하실에 대마초 키우고, 타이다이tie-dye 셔츠 입고… 그리고 어느 날, 마약을 너무 빤 나머지 동네 한복판으로 뛰쳐나와 하늘에 깃털로 뒤덮인 거대한 평면이 나타났다고 소리치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려나?"

"그럼 정화 시작합니까?"

"아냐… 물론 다른 사람들이 안 믿어주겠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이대로 끝마쳐 버리면 자신조차 스스로 못 믿겠지."

"박사님?"

"그럴 수 없으니까, 그러지 못할 테니까. 정신까지 파괴해야 할 거야. 정화가 끝나면. 작업이 모두 끝나면, 약이 없더라도 헛소리만 해대는 상태가 되어야 해. 끝없는 환각 속에 사는 거지…"

"투여량 높여."

"진심이십니까?"

"그래… 진심이야. 눈에다 안약처럼 바로 흘려넣어. 그리고 구속장치 제대로 됐는지 꼭 확인하고. 제시카Jessica가 뺨에 아직도 할퀸 자국이 남아 있더라고. 그리고 끝나면…"

글럿이 문밖을 살짝 내다본 다음 말했다. "발가벗겨서 동네 근체 숲속에 버려둬."


"더 필요하신 것 있으세요?" 계산대를 맡은 여자가 마지막 상품인 계란 한 통을 찍고 그렇게 물으며 밝은 분홍색 풍선껌을 불었다. "아니요 다 됐어요, 감사합니다." 글럿은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여자에게 건넸다. 이 썰렁한 동네는 군 기지 언저리에 일부 걸쳐 있는지라 재단 신용카드가 쏠쏠한 할인 혜택이 있었다. "잠깐만… 뭔가 익숙한 얼굴인데. 저희 만난 적 없나요?" 글럿이 그렇게 물으며 평소처럼 웃었다. 그런데 여자의 반응이 이상했다. 눈길을 피하고 딴 데를 쳐다보며, 울먹이듯 하는 소리로 "아니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말이요…? 사실 저한테 굉장히 강력한 데자뷰 현상이 온 것 같아서…" 글럿이 말을 흐렸다. 여전히 여자는 이상한 몸짓이었다. "아니에요." 글럿이 말하며 갈색 종이가방 두 개를 집어들었다. "그냥… 동생분이라든가 그런 사람이 제가 아는 사람일지도요?" 하고 어색하게 말하며, 여자가 대답할 새도 없이 글럿은 부리나케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날 하루 글럿은 그 일만을 신경쓰며 보냈다.


"왜 제가 이런 일을 당하는 거죠?"

"저도 모릅니다. 착한 사람한테도 나쁜 일은 닥치기 마련이죠. 세상이 아무 이유 없이 맛이 갈 때도 있고요. 사람은 가끔… 현실이나 사회 속 갈라진 곳에 빠져버리고, 또 이유 없이 이상한 일을 당하기 마련이고… 어쩔 수가 없어요."

글럿은 마음이 잠깐 흔들렸는지 남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손 좀… 잡아주세요…" 남자가 눈물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이라도 하시는 동안에. 아님 말씀이라도 해주세요. 대화를."

글럿이 눈을 끔벅였다. "무서워요." 남자가 말했다.

"아니… 죄송하지만… 대화는 할 수 없어요."

"왜요?"

"혀 깨무실 수도 있어서요." 그렇게 말하고 글럿은 앞으로 몸을 굽혀 남자의 입속으로 나무토막을 밀어넣었다.


모두 흐릿한 얼굴들. 똑같은 데자뷰가 느껴지는 얼굴들. 머릿속 잠재기억 딱 한 발짝 뒤에서 뛰노는 기억들. 그리고 그 텅 빈 죽은 눈들 모두에게 자신도 잘 아는 그림자가 드리워졌음을 글럿은 확신했다. 그건 그렇고… 사람들이 요즘 왜 다 좀비같이 행동하지? 내가 뭔가 놓쳐버린 걸까? 주위 모든 사람들이 허공만을 멍하니 쳐다보며 자동인형처럼 걷고 움직이고, 무감정하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 행동만 계속하고. 살아 있지 않은 듯… 혹시 너무 예민한 걸까? 경제가 무슨 문제가 있어서 사람들이 스트레스나 걱정에 빠진 걸까? 자신은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으니… 민간인의 문화 흐름에서 얼마나 동떨어진 곳에 있었는지 글럿은 알았다. 최근에 이 사람들한테 닥치기 시작한 문제였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알 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자기한테 오진 않겠지. 조그만 동네 길을 둘러보며 글럿은 공허하니 무표정한 얼굴만이 보였다. 여전히 머릿속을 마구 헤집어놓게 되는 얼굴이었다.


한 남자가 길을 걷던 라이언에게 부딪혔다. 두 사람은 잠깐 허둥지둥거렸다. 남자가 이쪽으로 가면 글럿도 그쪽으로 가고. 이리로 저리로, 서로 지나가려는 모습에 글럿은 얼굴에 웃음을 배시시 터뜨렸다. 겨우 두 사람이 방향이 엇갈린 (글럿은 남자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그때, 이 웃긴 짓 때문에 피어나온 글럿의 웃음이 싹 가셨다… 남자는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레가스키Regaski의 담임 선생이 글럿을 불렀다. 아들이 수업 시간에 행실이 나쁘고, 말을 안 듣고, 싸움질하고, 숙제를 제대로 안 한다고. 똑똑하고 갸름한 인상의 이 흑인 남성 선생은, 그러나 면담 내내 대화 주제에 무심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글럿을 갑자기 사무실 바깥으로 내보냈다.


주위 많은 사람들이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글럿은 눈치챘다. 살짝 잘못된 문법이나 구문들… 뭔가 불안해하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악센트나 말 자체를 실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길을 따라 조깅하는 저 예쁜 여자하고 분명히 오랫동안 함께한 적 있었다고 글럿은 생각했다. 글럿이 여자를 멈춰세웠다. 금방이라도 도망갈 듯이, 몸이 온통 뻣뻣하고 꼿꼿했다. 혹시 같은 고등학교 나오지 않았는지, 같은 동네에서 자랐는지, 아님 무슨 기지에서 정비사로 일한 적 있는지… 그렇게 글럿은 물었다. 여자는 상냥하게 대답했지만 태도는 무심한데다 자주 멈칫거렸고… 대화를 오래 나눴지만 아무것도 돌아온 것은 없었고… 여자가 떠나자 글럿은 땅바닥에 떨어진 핏방울 몇 자국을 발견했다. 말하는 동안 여자는 글럿의 손을 꽉 누르면서, 피부 속으로 화장품 칠한 긴 손톱을 파묻고 있었다.


25년 전

훨씬 젊은 글럿 박사는 긴 검정색 생머리에 살짝 기름지고 여드름이 약간 난 얼굴로, 한 손으로 예쁜 소녀의 턱을 부드럽게 만지면서 그 부드럽고 창백한 피부를 느끼며, 소녀의 고개를 자기 쪽으로 고정해두고 있었다. 소녀의 눈은 초록색, 머릿결은 붉은빛 금발 직모, 생김새는 겁 많은 아기 동물 같았다. 글럿의 눈이 소녀의 어리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야릇한 몸으로 옮겨갔다. 뭔가 끔찍하게 왜곡된 감정이 그 자리에 감돌았다.

소녀의 눈이 숙연했다.

"아저씨가 하는 말을 따라 말해. 다 괜찮아질 거야."


기계 속으로 크리스Christ의 머리가 들어갔다. 소형 휴대용 MRI였다. 기계는 머리 주위에서 빙빙 돌아가다 삐삐삐 소리를 냈다. 글럿 박사는 스크린에 뜬, 여러 가지 색으로 빛나는 두뇌를 바라봤다.

"자, 크리스, 이제 전화를 받으세요." 그렇게 글럿이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크리스가 천천히 전화기를 집어들고, 약에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미쳤다고 느껴지리만치 행복한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 "블랙Black 씨, 합격 축하드립니다. 바로 짐 싸셔서 이사 오시면 되겠습니다. 앞으로 찬란한 미래가 펼쳐지기를 기원합니다."

"네."

뇌 한 부분이 밝게 빛났다. 글럿이 버튼을 누르자, 기계가 더 빨리 올라갔고, 이내 빨간 부분은 지워졌다.


흑색 작전 정신 훈련 안내 2판(1992) 발췌문: 글럿 박사, 싱클레어Synclaire 박사, 스미스크리스트Smithchirst 박사 공저

심리학과 마찬가지로, 내담자에게 상담자와 동떨어졌다는 느낌을 강력하게 유도할 수 있다면 거꾸로 강력한 유대 관계를 훨씬 더 짧은 시간 안에 형성할 수도 있다. 이는 우리가 민간인의 음식물 및 상호작용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기가 어머니에게 의존하든 내담자는 우리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에고가 흩어지고 필요를 한쪽에게 완전히 장악당하면 이따금 세뇌자에 의해서 새로운 인격이 만들어질 수 있게 된다. 이런 경우 통제되는 자는 통제하는 이를 경외시하게 되며, 그를 무의식적으로 신과 같은 대상으로 생각한다. 이런 반응은 극도의 성적 매력의 형태로 발현할 수도 있고, 마지못한 존경이 완연한 숭배로 발전하는 형태일 수도 있으며, 강아지처럼 움찔거리고 주인을 기쁘게 하려는 충동 또한 처음에 가짜 행동이었다가 시간이 흐르며 진짜로 바뀌도록 조절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자극은 정반대 방향으로도 가능하다…


"신문 고마워요, 제이스Jase."

"별 말씀을요, 글럿 씨!" 머리가 덜떨어진 남자가 그 칭찬을 듣고 개 한 마리처럼 멍청하게 웃었다. 몇 년 동안 쭉 신문을 배달해 온 제이슨은, 날씨 화창한 오늘 라이언이 앞마당 잔디를 깎고, 옆집의 항상 초췌한 키노시키 씨가 꽃에다가 호스로 물을 주며 친철하지만 산만하게 수다를 떠는 중에 신문을 가져온 참이었다. 라이언은 그 정도 칭찬은 해 줄 만했다고 느꼈다. 그렇게 충실한 사람한테 그런 말쯤은 해줄 수 있지.

그런데 갑자기, 싸늘한 느낌이 글럿의 등을 타고 올라왔다. 키노시키 씨가 호스로 실수로 자신한테 뿌린 가는 물방울 때문도 아니고 (원래 조준을 잘 못했다. 머리를 똑바로 세워본 적 없었으니), 갑자기 돌풍이 불어와 제이슨의 가방 속 신문들을 부스럭부스럭 훑어대서도 아니고 (쫓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너무 단순한 청년이라 한 부 쫓아가기도 어려워했고, 까딱하면 트럭에 치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냥 냅두는 걸로), 그 생각이 갑자기 불현듯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설마, 저 사람까지."

라이언은 아찔해진 기분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 밤 리볼버를 장전했다. 이유는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지만.


새벽 4:00, 아래층에서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나자 글럿은 곧바로 벌떡 일어나 베개 밑에 파묻어둔 총을 꺼내들었다. 준비하던 일이었다. 무언가라도 일어나기를. 분노를 쏟아부을,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싸움을. 서서히 다가오듯 말든 하는 이 막연한 불안감과 다른 것을. 글럿은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가 문고리를 확 돌리고, 딸깍 불을 켜고 복수심 가득한 마음으로 이슬에 젖은 잔디밭으로 뛰쳐나왔다. 그냥 아이들이었다. 실망한 글럿은 총을 내렸다. 소리지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세 명은 곧장 도망갔다. 얄밉게 웃는 애도 있고, 화들짝 놀라서 창문에 돌 던졌다고 감옥 가는 거 아니냐고 무서워하는 애도 있었다. 그러나 한 명만이, 글럿이 보는 앞에서 땅바닥에 쓰러져, 현관문 불빛을 받으며 부들거리며 발작했다. 글럿은 권총을 파자마 바지 허리춤에 꽂아넣고 그 소년에게 달려갔다. 소년은 입에 게거품을 물고 팔다리를 마구 떨었다. 글럿은 소년을 들쳐올려 안으로 들어가 조리대에 누였다. 조그만 몸이 위험하게 위아래로 마구 튀어댔다. 글럿이 앰뷸런스를 부르려던 바로 그때, 그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9월 15일 일어났던 일을 다시 생각하게 되면 너는 땅바닥에 쓰러질 거야. 몸이 마구 떨리고 부들거릴 거야. 죽을 수도 있고. 너무 아플 거야. 기억하면 고통스러울 거야."

병원에 연락할 생각이 글럿에게 사라졌다. 대신 글럿은 5번으로 전화를 걸었다.


조그만 쇼핑몰 한가운데를 글럿은 정처없이 거닐었다. 따분한 채로, 휴가 끝날 때까지 뭐 할 게 없을까 생각하면서. 일벌레가 평범한 원래 일에서만 목적과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 일 때문에 정서불안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 더구나 평범하지 않은 원래 일에서 일벌레인, 육체를 고문하고 정신을 망가뜨리는 데서 성취감을 느끼던 글럿은. 사디스트가 되는 걸까? 다른 사람하고 견주면 완전 괴물처럼 보일까? 아니면 그저 똑같은 삶일지도. 몰린 사람은 어딜 가도 몰린 사람이다. 하는 일이 달라져도 그런 점에서는, 글럿의 최종 관점과 판단에 영향을 미칠 건 없었다. 누구나 뭔가 일을 해야 하기 마련이고. 그런 철학적 질문을 고심하면서 글럿은 건성건성 아내에게 줄 선물을 찾아봤다. 딱히 생각할 만한 다른 거리가 없다… 그리고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격류나 잊혀지지 않는 고민이 없어서 그랬는지, 주변 환경이 상대적으로 무미건조해서 그랬는지, 그냥 알아채기까지 시간이 충분히 많이 흘러서 그랬는지 몰라도, 글럿에게 그것이 보였다. 모든 퍼즐이 한순간에 맞춰졌다. 그리고 글럿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안돼." 그 끔찍하고 불가해한 패턴을 깨달으며, 글럿이 나직이 내뱉었다.

저기 코트를 입어보는 남자. 음식을 끊고 독방에 격리해서 스톡홀름 증후군을 유발시켜 고분고분하게 만들었던 그 남자. 낡은 미니골프 코스를 체험하는 나이든 여자. 거의 모든 뼈를 골절시켰던 그 여자. 아주 쇠고집이라 믿음을 포기하기를 한사코 거부하던 바로 그 여자. 푸드코트의 저 녀석. 글럿이 들어와 자기가 본 게 사실이라는 보고서를 읽고 동의한 다음에 불구멍에 던져 태워버렸을 때 흔들리던 그 녀석.
그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글럿에게도 그 작업은 괴로웠다. 조지 오웰의 1984 소설에서 읽고 그 다음날 시험해 본 기법이었다. 그리고 가장 효과적인 기법이었다. 등 구부정하고 노쇠하고 머릿결 지저분한 저 여자… 세상에… 나이는 있었지만 도도하고 관능적이었던, 글럿이 욕설과 속임수와 가짜 칭찬으로 천천히 파괴해 들어간 그 여자였다. 쇼핑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언젠가 세뇌한 사람들이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설마 마을 사람들도 전부?! 설마 정말 그럴까? 글럿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자신은 자기 분야 최고의 전문가였으니까… 몇천 명을 그렇게 작업했겠지. 인적 없는 작은 마을 꽉꽉 채우고 남을 만큼은. 날이면 날마다 끝없이 일하면서. 곧바로 알아채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그렇게 작업을 잘 하면서 얼굴까지 기억하고 있었으려고? 그 사람들은 하나씩 천천히 이곳으로 흘러들어와 마을에 섞여들었다… 절대로 단번에 짠 하고 나타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미친 사람처럼, 가게 나가는 문 쪽으로 글럿은 달렸다. 문을 뛰쳐나와가 달리다가, 갓돌에 걸려 땅바닥에 데굴데굴 나동그라져 신음했다. 사람들이 그 주위로 모여들었지만,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았다. 이제야 글럿은 왜 자기가 아무하고도 연락을 하지 않는지, 왜 자기가 친구가 없는지 깨달았다. 그 주위에 모인 사람들, 그 자리에는 아무 사람도 없었으니까. 다 자기가 부숴버렸으니까. 각자 안에서 뭔가 조금씩 잃어버리고, 그걸 훔친 사람은 자신이니까.

"안돼!" 글럿이 뇌까리고 벌떡 일어나, 어딘지도 모를 것으로 달렸다. 마음속 깊은 곳이 진실임을 아는 그 생각들을 떨쳐내고 싶어서. 하지만 왜? 글럿이 악을 쓰면서 물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이건 음모일 거야. 어느새 글럿의 생각 안에는 피해망상이 자리했다. 재단이 나를 쫓아내려고, 몇 년 전에 내 손으로 만든 이 부서에서 나를 날려버리려고. 이건 권력 싸움이야, 도박이야. 하지만,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불가능해. 너무 무모한 짓이야. 파일을 일일이 조작해서 위장정보를 전부 이곳으로 이사 오는 내용으로 만들었다고? 그렇게 규모 큰 장난질이었으면 누가 벌써 알아채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리고 너무 위험해. 훈련한 내용들이 사라질 수 있어. 확실히, 훈련은 벌써 실패하는 중이었다. 갈수록 이상해지는 얼굴. 머릿속에서 영화처럼 스쳐가는 그때의 광경들. 그 소년, 세상에, 그 소년을 생각하면. 아니야, 그런 비밀이 있다 해도 재단이 고작 나 하나 쫓아내려고 그런 비밀들을 함부로 풀어헤칠 리가 없어.

이건 일종의 우주적 코미디야. 정신 나가기 일보직전인 글럿이 그렇게 결론지었다. 이해할 수 없는 동시에 완전히 이해가 되고, 기저의 이 모든 불가해함을 깨우치면서 동시에 이에 굴복하다니. 간혹 어쩌다 임의로 발생하는 일이야. 나도 참 운 없지. 어쩌면 내가 업보를 많이 쌓아서 돌아온 형벌일지도, 어두운 곳에서 종사한 응징일지도, 반어적 지옥일지도, 거기까지 생각하던 글럿에게, 갑자기 그런 생각이 엄습해 왔다. 지금 이 일은 이 진짜 세상이 스며들어갔던, 까닭과 원인과 결과와 혼돈에서 우러나온 결과물이라는, 그리고 그것이 별 이유도 없이 자신의 삶을 망치러 왔다는. 그 말이 돌아온 셈이다. "사람은 가끔 현실이나 사회 속 갈라진 곳에 빠져버리고…" 자신이 한 말이.

그러므로 글럿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멀쩡한 세상이 아무 논리적 이유 없이 자신을 저버렸을 뿐임을.

끼이이익, 차가 미끄러져 오다가 글럿을 쳤다. 글럿이 붕 공중에 떴다. 그때 글럿에게 운전자의 눈이 보였다. 몸속은 아직 핏속으로 쏟아져나온 막대한 호르몬들을 처리하는 데 바쁘고, 팔은 구부러지고 망울져 언제 골절이라도 되었나 애써 기억해보던 와중에… 눈이 보였다. 아는 남자였다. 충격받아 얼어붙은 그 청소년의 핼쓱한 얼굴.

아는 남자였다.

"날 봤어!" 글럿이 머릿속으로 두서없는 비명을 지르며 기어갔다. 다리는 비틀어져 질질 끌리고, 눈물 콧물 피가 온통 줄줄 얼굴을 뒤덮었다. 그때서야 글럿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깨달았다. 집으로. 멋지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조그만 집, 아내랑 같이 글 읽고 게임하고 하는 부엌, 어둡고 낭창낭창하고 달콤한 향 나는 가죽이 가득하고 먼지 한 톨도 빛의 화신처럼 변신하는 조용한 서재, 계속 미심쩍어하는 아이한테 신뢰를 얻어보겠다고 자기 좋다고 계속 공 던지고 또 던졌던 농구대, 그리고 침실에서 흥분한 아내가 자신을 적셔줄 때 자신의 몸에게 느꼈던 자부심, 창피와 수치의 나날들을 단숨에 지워버린 영광스런 한순간, 그렇게 어느 구석 하나 안락함과 안전함과 부드러움이 모자람이 없었던 그곳으로.

그저 집에 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두운 곳에 다른 목적이 또한 있었다. 마지막 피난처, 그 성스러운 곳마저 자기 인생을 잠식해 온 그 광증에 뚫리고 집어삼켜졌는지, 글럿은 보고 싶었다. 간신히 문을 밀어젖히고 집으로 들어간 글럿은 그대로 방바닥에 푹 쓰러졌다. 아내가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글럿에게 바로 달려와 무릎을 꿇고 경황 없이 글럿을 껴안고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라이언?! 세상에! 라이언!" 높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글럿은 고개를 들려 아내의 빨갛고 풍성한 머리카락 속에 자기 머리를 파묻고, 어린이처럼 흐느꼈다. 그리고 그 달콤한 내음을 풍기는 머리카락에다 얼굴을 더 깊이 내밀고, 아내의 몸을 편안하게 꼭 붙잡았다.

"이것만큼은 순수하게 남겨주세요. 이것만이라도 진짜라 해주세요. 진정한 사랑. 더 이상… 더 이상은 아무것도 없어요. 이것조차 환상이라면 이 결혼도, 이 관계도, 더는 나한테 존재하지 않아요."

아무 불안한 느낌도 찾아오지 않았고, 글럿은 겨우 안도의 한숨의 내쉬려 했다. 그런데 그때, 그 느낌이 별안간 다시 엄습했다. 더 오래 걸려서 엄습하는 게 당연했다… 아내가 맨 처음 대상이었으니까. 결국 다시 떠올라 버렸다.

그 느낌이 엄습하자, 글럿은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다. 당연히 아내가 날 사랑할 수밖에! 어떻게 안 그럴 수 있을까? 아내의 마음속에 내가 웅장한 형상으로 남아서, 모든 생각 하나하나 속에서 나를 권위 넘치는 하나님 아버지처럼 모시는데. 항상 끔찍하고 웅대한 모습으로 눈앞에 비치는데. 아내가 항상 자신에게 색을 밝히고 흥분하는 게 당연했다. 언제나 자기 말에 동의하고 법처럼 따르는 게 당연했다. 아내한테 자신은 남편이 아니라 원형(原型)archetype이었으니까! 아내를 글럿은 아이처럼 조련하고… 복종시키고… 이 세상에 도움이 될 수도 있었던 총명하고 아름다운 이 사람을 위축시켰다. 아내를 파괴했다. 만나자마자 아내는 글럿의 한마디에 변호사를 꿈꾸며 다니던 대학을 그만뒀다. 글럿만을 평생 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고 아내는… 글럿이 어린 소녀였던 아내에게 먼저 다가갔고, 30년이 지나 드디어 뿌린 대로 거뒀을 뿐.

그 와중에 혀가 살짝 깨물리자, 글럿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혐오감이 치밀어올라 아내를 밀쳐냈지만, 혐오의 대상이 아내인지 자신인지 알 수 없었다. 술 취한 듯 글럿은 휘청거리고,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광견병 걸린 개처럼 게거품을 얼굴에 덕지덕지 묻히고, 웅얼거리고 괴성을 내뱉으면서, 구원받을지 모를 마지막 한 곳을 찾아 더듬거렸다. 아니면 스스로의 정신을 가능한 한 더 일찍 파괴하고 싶어서 마지막 비밀을 벗기려고 하는 걸까? 어느 쪽이었든, 자신을 압도하는 이 공허하고 차가운 의문의 답을 글럿은 꼭 알고 싶었다. 금고 문을 열어제낀 글럿은 아들의 입양 기록을 꺼내 살펴봤다. 자식마저 자신이 유린했는지 알아보고자.


목 훤히 내놓은 셔츠를 부드럽게 펄럭이고 모자를 쓴 글럿이 논바닥을 내다보는 가운데, 조각배는 강 위를 스르륵 떠갔다. 이 길다란 나무배가 진흙바닥 가까이 닿아 멈추자, 글럿은 배에서 내려 갈대를 헤치고 이국적인 사건 현장으로 나아갔다. 미리 나온 요원이 정중하게 목례하고 말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마침 가까이 살아서 말야. 사건은 어떤 상황이지?"

"따라오십시오."

두 사람이 얼마 동안 걸어가 조그만 마을에 다다랐을 때, 요원이 말했다. "학생들 몇 명입니다. 저기 저 학교에들 다니죠. 세상에 있을 법하지 않은 걸 봤다더군요. 몇 주 동안 선생님이 이상한 경험을 시켜줬는데… 흠… 그걸 보고 마법이라 불렀죠."

고글 쓰고 소매 새카매진 실험복 입은 연구원 하나가 마을 광장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냥 A급 기억소거제를 쓸 수는 없습니까? 우리야 진작에 없어서 못 쓰고 있었다지만, 한 박스만 여기로 가져와 달라는 요청은 왜 취소했지, 크라마르Kramar?"

"기억소거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으니까요." 크라마르 요원이 그렇게 말하며, 글럿을 보고 몰래 빙긋 웃었다.

글럿은 좀 더 외교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기로 마음먹고, 연구원의 팔에다 한 손을 얹었다. "A급 기억소거제를 어린이한테 처방하는 건 위험합니다. 효과를 볼 양이면 벌써 너무 과다해요. 치명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제 대체 어떡하시려는 겁니까?"

"걱정 마십쇼 한스Hans, 글럿 박사님은 전문가입니다."

연구원은 당황했다. "어떤 쪽으로? 무슨 인간형 개체로 일하는 분이야? 특별한 능력이 있다거나… 최면 거는 눈이 있다거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두 사람이 연구원을 덩그러니 남겨두고 떠나면서.

"비윤리적인 행동은 안됩니다!" 두 사람 뒤에 대고 한스가 마지막으로 외쳤다.

"아 제길." 심기 뒤틀린 목소리로 요원이 속삭였다. "저 사람 때문에 방음 되는 방을 찾아야 하게 생겼네요."


"선생님은 마녀였어요. 파이어볼도 만들어냈어요. 그걸로 저글링도 했고요. 진짜 멋있었어요." 머리를 말끔히 깎아서 승복 입은 동자승처럼 생긴 이 요망한 소년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르는 채 말했다.

"자, 이 꼬맹… 우리 친구… 친구가 상상력이 풍부하구나. 친구는 공상을 너무 많이 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만 하고. 친구는 자기가 하는 말도 못 믿을 거야, 알겠지. 친구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만 믿어야 해."

"진짜 봤다니까요, 저는 그때-"

짝, 글럿이 소년의 뺨을 때렸다. "누가 어른이야? 애들은 이렇게 멍청해! 이렇게 유치하다고. 너는 그냥 애새끼야. 머릿속에 이상한 것만 집어넣다가 조금씩 현실인 줄 착각하고 나중에는 진짜로 믿어버리는. 넌 그냥 혼자 놀다가 과몰입한 거야. 너 자신을 믿지 마. 네 정신 자체를 믿지 마. 네 생각을 의심해, 네 생각은 전부 다 틀렸으니까! 넌 항상 틀렸어!"

그렇게 시작했다.


글럿이 의식을 다시 찾았을 때, 아내가 걱정하고 무서워하는 표정으로 글럿의 몸통을 꽉 감싸안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방바닥 타일 위에 뻗은 채로, 글럿은 계속 웃고 있었다. 몇 초 뒤 그는, 더는 멈출 수 없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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