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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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밤, 나는 자정이 지나 소등된 복도에서 창문가로 새어드는 희미한 달빛을 받으며 창틀에 기대어 서 있었다. 복도의 차가운 벽과 바닥이 냉기를 뿜어낸 위로 시린 달빛이 서리었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건조했다. 뼛속을 파고드는 냉기를 몰아내고자 옷깃을 꼭꼭 여미었지만 내 얇은 외투로는 무리였다. 나는 저 아래 아무도 없이 텅 빈 뒤뜰을 비추는 허연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추위에 쑤시기까지 하는 팔뚝을 주무르며 나는 복도 끝에 드리운 음영이 미묘하게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계단 옆 코너에서 나지막한 발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이리 오고 있었다. 그는 그저 업무를 수행하거나, 직원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일 것이다. 쓸쓸하고 음울한 밤에 복도에서 누군가와 마주치는 건 어쩌면 반가운 일이겠지만 나는 오히려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늘어진 외투 자락이 앞서 벽에 그림자를 드리우자 나는 단지 오싹한 느낌만을 받았지만 그가 막상 모습을 드러내자 공포심이 사람에 대한 반가움과 묘하게 뒤섞였다. 코트를 걸친 남자는 나를 발견하고 몸을 틀었다. 밤중에 누군가 싸늘한 복도에 얼쩡대는 것이 의아했을 것이다. 남자는 급기야 내게 물음을 던졌다.
“밤이 깊고 추운데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그는 창가의 미약한 빛만으로 나를 언뜻 흩어보곤 약간 놀란 어조로 말했다. “이런, 당신은 이곳에 새로 배치된 신입 요원이로군요. 전 L이라고 합니다. 이 구역 하급연구원이죠-하, 낮까지만 해도 당신이 보이지 않던 걸 보아 갓 전속되어 오신 것 같은데, 아무튼 반갑습니다.”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들더니 내가 미처 살펴보기도 전에 도로 집어넣었다.
나는 추위에 옷깃을 애써 여미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가 이제 제 갈 길 가겠거니 했는데 그는 가려다 말고 내 곁에 나란히 기대섰다.
“아, 그런데 당신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오. 아니 됐습니다. 뭐 그런 건 지금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요. 어차피 내일부터 일터에서 보게 될 텐데, 조만간 서로 잘 알게 될 겁니다. 그런데 누군지는 모르겠는 형씨, 꽤 추워 보이시는데 가을 외투를 그대로 입고 계시군요. 적어도 외투는 따뜻하고 좋은 걸로 장만해야지, 독감이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요. 그리고 제대로 못 챙겨 먹은 듯 얼굴이 창백한 게 위에서 월급을 짜게 주는 것 같군요.” 그는 내 옷깃에 달린 직함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하급직원들끼린 너무 절실한 사실이죠. 그래요, 우리 직함이 낮은 걸 어쩝니까. 하지만 이렇게 수척하고 움푹 꺼진 얼굴을 하고 다닌다니! 사내식당에서 나오는 식사를 보세요. 영양 상태가 이렇게 나빠지는 게 당연한 일이죠. 피부도 꺼칠해지고 얼굴엔 뭐가 납니다. 봉급도 쥐꼬리만 한데 거기다 책상에 앉아 매일같이 필기하느라 치질에 걸리지 않나 손목이 얼마나 아픈지요. 날이 추워지면 아주 뼈마디까지 욱신욱신 쑤셔온답니다.”
나도 거기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호기롭고 즉흥적인 태도가 나쁘지만은 않아서 기댄 자세를 좀 더 편하게 바꾸며 응수했다.
“그래요, 손목이 너무 아파요. 오늘같이 추운 날에는 뼛속을 에는 듯합니다. 안에서부터 쿡쿡 쑤시고 미칠 듯이 쓰라린 것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손목이 아픈 것에는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지만 이렇게 쑤시는 날에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하, 우리야 뭐 어쩔 수 있겠습니까. 아 그런데 당신이 앞으로 여기서 일하게 될 거라면 이 얘기를 들려줘야지. 하마터면 이걸 까먹을 뻔했군요. 신입 요원들의 안전은 제가 책임집니다. 아마 당신은 이를 듣지 못했을 거요.”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당신은 아직 자러 갈 생각이 없어 보이고 저는 야근 중에 슬쩍 빠져나왔지요. 우리 둘 다 따로 갈 데가 없군요. 당신이 뭘 몰라서 그런데-알고도 이러는 저 역시 경솔하기 짝이 없지만, 한밤중에 이 복도에 홀로 서 있는 건 가능한 피해야 할 일입니다.”
그는 여전히 나를 신입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했지만 나는 그의 장난기에 묘한 호기심이 동하여 모른 척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어째서죠?”
“그건 나중에 말하죠. 우린 지금 함께 있으니까 우선은 몰라도 안전해요. 좀 전엔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습니다. 우리 둘 다 말입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손가락으로 창문을 두들기며 휘파람을 불다가 멈칫해서는 문득 말을 던졌다. “혹시 사무구역에 있는 4번 사물함에 대해 아십니까?”
“아뇨, 4번 사물함이 어때서요?”
그는 목소리를 약간 낮췄다. 그의 음성에서는 여전히 장난기가 묻어났지만 묘한 신중함이 느껴졌다. “이 구역에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재단은 전면부인하고 있지만 그 말을 마냥 곧이곧대로 믿다간 큰코다칠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는 복도 끝을 주억댔다. “당신도 재단이 어떤 곳인지 알지 않습니까. 몇 달 전에 사건이 좀 있었답니다. 별건 아니고 공식보고 상으론 그냥 직원들 몇이서 히스테리 좀 부린 거지요. 아시다시피 재단에는 이런 일도 흔하오. 재단 직원들과 집단히스테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니까. 언제부턴가 직원들이 사무구역에 있는 수많은 사물함들 중에서 4번 사물함을 기피하기 시작했답니다. 처음에는 4번 사물함을 잘 사용하지 않다가 나중엔 그 앞을 지나가는 것도 꺼렸대요. 종국에는 그 사물함을 쳐다보는 것조차도 끔찍하다고 여기더군요. 심지어는 그것만 보면 미친 듯이 성호를 그어대는 사람도 있고… 완전히 금기시되었습니다. 아무리 4라는 숫자가 불길하다고 여겨지더라도 말입니다. 여기서 끝나더라도 재단 밖에서라면 그리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지요. 그래도 여기서 선을 그었다면 직원들끼리 자신들의 병적인 공포를 서로 공감하고 이해하는데서 그쳤을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과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길 마련이죠.”
나는 그의 말이 서서히 이해 가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월요일 아침에 밤새도록 야근한 연구원이 과로했는지 상태가 좀 안 좋더라고요. 그는 책상에 구부정하게 앉아 있다가 4번 사물함이 조금 열린 것을 보곤 갑자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선 그를 일으켜 세웠을 때 그는 거의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저주받을 4번 사물함 안에 뭔가가 있다고 비명을 지르고 울먹이더군요. 광적인 공포는 전염되지요. 그 곁에 있던 피로에 절고 생명의 위협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결국엔 보안요원들이 사물함 안에 피범벅이 되고 으깨진 것이 들어있다고 울부짖으며 장광설을 늘어놓는 연구원을 끌어내고 긴장하고 흥분된 직원들을 억지로 진정시켜야 했답니다. 뭐, 그 이후로 여기 직원들은 그 사물함을 더욱 흉하게 여기고 있어요. 이제는 사물함에서 말라붙은 피 냄새까지 난다는데 저도 맡아봤지만 솔직히 진짜 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어느 심술궂은 직원이 코피라도 묻혀났는지 모르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까진 없지 않습니까.”
“저는 그에 대해선 몰랐습니다. 그 구역에 갈 일도 없었고요. 하기야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죠. 저도 재단 사람이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제가 좀 전에 밤엔 이 복도에 혼자 있으면 안 된다고 한 거 기억하십니까?”
“그건 또 왜지요? 전 이곳에 서서 생각에 잠겨있는 날이 많지만 지금까지 딱히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 여기에 대해선 또 무슨 소문이 돌고 있는데요?” 나는 강한 호기심을 느꼈고, 내가 지금까지 이 복도에서 홀로 공상하던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여기서 누가 죽었습니다.” 그는 내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하기야,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지을 거라 예상했소. 그래, 기지에서 사람 죽은 곳이 한둘이겠습니까. 그게 뭘 별일이라고. 하지만 그 사람 죽음은 재단사람 치고도 정말 독특하고 이상했습니다.”
“재단에서 누가 죽은 것만으로 소문이 돌았다면 그 죽음은 보통 이상한 게 아니었겠죠. 그가 대체 어떻게 죽었기에-?”
“이야기 먼저 들어보시오. 따로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죽기 전부터 이상한 사람이었다는군요. 다른 기지에서 일하다가 전근 온 요원이라는데 주변 얘기를 들어보면 한때 현장에서 뛰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장에 나갔을 때 죽은 동료를 업고 구사일생으로 홀로 살아 돌아왔다는 얘기도 있고. 거의 죽을 뻔했다는군요. 그런데 그런 일을 겪은 사람치고는 상당히 쾌활하게 행동했다는 모양입니다. 여기 와서 사람도 많이 사귀고 직원들과도 잘해나갔으니까요. 원래의 소심하고 내성적이던 성격과는 달리 붙임성 있고 대범한 태도를 많이 보여줬답니다. 익살도 잘 떨고 유쾌한 태도 덕에 직원들과 제법 친밀했죠. 지금 생각하면 실은 속사정이 말이 아니었겠지만 말입니다.”
“…”
“어느 따스한 초가을 날에 그는 자신의 마지막 생일을 맞았습니다. 직원들은 그의 생일을 성대하게 준비했지요. 휴게실에서 케이크에 와인까지 가득 준비해선 그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이 그를 축하하며 먹고 마시는 동안 그는 취했는지 정신없이 지껄이고 실없는 농담을 해댔습니다. 광적으로 흥분해서는 자신이 당장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거라고 여겼는지 유쾌한 한편으론 매우 불안해 보였대요. 대화의 열기도 식고 다들 지쳐 늘어질 쯤에 그는 어디 갔다 오겠다며 방을 나갔답니다. 나가면서 책상에 놓여있던 접이식 커터를 들고 갔는데 사람들은 취해서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는군요. 그런데 그가 나가서는 한참이고 돌아오지 않자, 사람들은 그가 취중에 어디 복도에 늘어져 있거니 하고 찾으러 갔습니다.” 그는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찾아낸 건 그의 시체였지요. 그는 바로 이 복도에 쓰러져 죽어있었습니다. 바닥이 피로 낭자했어요. 근처에 그가 들고 갔던 접이식 커터가 떨어져 있었고요. 급소 여기저기에 칼로 그은 자국이 남아있었습니다. 손목은 거의 반 이상 파여 나가 갈가리 찢겨있었지요. 이런 치명적인 상처를 낸 것은 다름 아닌 그가 들고 간 커터가 분명했습니다. 상처를 보고도 사람들은 그가 살해당했다고 믿었지요. 그를 시기하던 누군가가 잔뜩 취해있는 걸 보곤 이 틈을 타 그를 죽인 뒤 자살로 위장했다고 말입니다. 물론 CCTV 확인으로 사인이 분명해졌지만… 그건 모두에게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늘 유쾌해 보이던 그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을 다들 전혀 몰랐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죽은 그의 영혼이 거기에 앙심을 품었는지 밤이 되면 복도를 나다니며 커터로 홀로 다니는 사람을 하나씩-”
“이봐요, 보자 보자 해도 당신 말은 더는 참을 수가 없군요.” 나는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아무에게도 앙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밤에 커터로 누굴… 하, 단지 여기 있을 뿐이라고.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로군. 이봐-”
“그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그리고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그가 내 소맷자락이 손목에서 흐르는 피로 흥건한 것을 본 것은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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