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녕하세요 여러분. 나인티입니다. 9년 동안 저는 SCP 한국 지부에서 번역 비평에 굉장히 많은 지분을 차지했습니다. 오늘 저는 이제 그 지분을 포기하겠다고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2. 어느덧 제 나이가 완전수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주위 환경도 예전과 달라지고 재단도 예전과 달라지고 저도 예전과 달라집니다. 더 이상 제가 예전 같을 수 없음을 체감합니다.
3. 딱히 바쁘지는 않습니다. 요즘도 주말에 사흘을 쉬는데 48시간은 누워 있습니다. 정신 멀쩡한 채로 시간을 낭비합니다. 대학원도 솔직히, 이 세계의 근간이 될 인재에 견주면 저는 그냥 연구비 루팡입니다. 본업에 집중하겠다고 뻥 치고 은퇴를 선언할 껀덕지가 못 됩니다.
4. 의지 자체가 안 나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자투리 시간이 나도 번역 한 줄 적을 생각이 안 납니다. 물론 생각을 다그쳐서 한번에 서너 페이지 나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생이 방 청소를 일주일간 내버려뒀다가 하루에 몰아서 하듯이 흘러갑니다. 제 일도 못하는데 남의 글 읽어주는 일은 어떻겠나요.
5. 그러나 의지만으로 치부하려다가 또 "나인티"라는 이름값이 얼마나 많은 활동량에 의존하는지 생각해봅니다. 편집 횟수 5,000회, 페이지 수 450개는 별다른 비법으로 쌓은 게 아닙니다. 제 인생을 포기해서 재단에 쏟아부었기 때문입니다. 재단이 무가치하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단지 붉은 여왕처럼, 이름값을 지탱하려고 더 많은 시간을 쏟아붓는 순환이 계속되었다는 점을 이해하실 것 같습니다.
6. 또 한편으로는 더는 제가 재단에 의지 자체가 없어졌다는 생각도 듭니다. 재단 세계관 꿈을 꾼 적 있나요? 전 한 번도 없습니다. 재단 꿈은 그냥 최근 포스트 꿈이었습니다. 과연 저는 재단을 사랑했을까요, 번역을 사랑했을까요? 재단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이름값을 계속 갖고 있어서 될까요?
7. 어쩌면 제가 그냥 시간표 잘 짜서 준수해서 자투리 시간 잘 잡고 하면 그냥 원래대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지난 탈퇴 6번을 돌이켜볼 때, 지난번에는 전부 비장한 결심으로 나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비장하지도 않고 오히려 좀 아쉽습니다. 이럴 때 뭘 정리해야지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다고 봅니다.
8. 은퇴할 생각은 올해 내내 했습니다. 고심하던 끝에 단 한 가지 조건을 결정했습니다. 제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알 수 있다는 싹이 틀 수 있음을 봤다면, 또는 싹이 아예 틀 수 없음을 봤다면, 그때 은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9. 싹이 틀 수 없겠다고 생각한 때는 여러 번 찾아왔습니다. 한숨을 쉬어봤지만 이유를 찾을래야 저한테서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열이 나는 바이러스를 몸에서 몰아내야 하는데 열 내리는 치료만 계속하는 건 아닐까? 내 화법으로 내가 아는 걸 전달하기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10. 그러다 며칠 전에 카트시님이 비평 에세이를 쓰셨습니다. 저한테 헌정한다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솔직히 이 글이 제가 찾던 "싹"은 아닙니다. 하지만 글을 읽자마자 저는 싹이 틀 땅이 생겨났음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아는 것을 남들도 알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11. 자뻑을 심하게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만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제가 아는 걸 알리고 싶었던 것은, 제가 너무 커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멈추면 번역 비평 전체가 멈추는 상황은 비정상적입니다. 지금도 번역 비평 때 저만큼 많이 말하고 깊이 따지고 예민하게 구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시스템은 이제 나인티 자체가 되어버렸습니다. 기껏 생겨난 비평 문화가 계속되려면 또 저같은 사람이 생겨나야만 합니다.
12. 번역 워크샵을 기획했던 것은 제가 그런 점을 에세이로 정리할 능력이 못 되어 직접 경험시켜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과는 2기의 한 명뿐이었습니다만 그 한 명이 카트시님이어서, 카트시님이 저 에세이를 쓰셔서 저는 만족스럽습니다.
13. 그래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지금까지 한위키 번역 비평 시스템은 항상 비평글을 올리는 저와, 항상 나인티가 비평글을 올리겠지 하는 다른 사람의 신뢰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이 "당연한" 현상을 더 이상 상수로 만들지 않고자 합니다. 이전부터 저는 저만의 기준에 따라서 어떤 글은 아예 비평을 드리지 않고는 했습니다. 이제 모든 글로 기준을 확장합니다. 더 이상 제 번역 비평을 기다리지 말아주세요.
14. 그러나 6번 탈퇴를 거듭하면서 또 저는, 다리를 불태우면 결국 다리를 다시 세우는 비용만 들어간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어딜 가든 저는 비빌 구석을 항상 한 가지는 남겨놔야 합니다. 앞으로도 여러분은 제가 비평하는 꼬라지를 계속 구경하실 수 있습니다. 단지 완전히 제가 원할 때만 드리겠다고 말씀드릴 뿐입니다.
15. 완전히 기본부터 시작하는 사례, 제 기존 번역과 맞부딪치는 사례, 이래놓고 제 삘이 오는 사례 등등 때문에 또 활동이 불어날 수 있다고 생각은 듭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보험만 들 수 있겠나요? 곧 제가 스스로를 감당해야 할 타이밍이 옵니다.
16. 만약에 비평 네임드로 오래 살아남고 싶다면 "의무감" 한 가지 이유만으로 활동하지 말라고 당부드립니다. 제가 세 번이나 스탭 자리를 얻었다 내려놨다 하면서도 비평 스탭만은 안 맡았던 게 이것 때문입니다. 의무감이 과부하를 일으켜서 저는 한 번 떠났고, 그래서 비평할 때 의무감이 아닌 또 다른 이유를 찾아내느라 애먹었습니다. 9년을 버틴 건 다행히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서라고 생각합니다.
17. 혹시라도 저한테 직접 읽어달라고 요청하신 분은 무조건 읽어드릴 생각입니다. PM이든 DM이든 이 페이지 댓글이든, 요청했다는 그 이유만으로 반드시 검토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탈퇴해도 가끔 올 수 있다"라고 하신 분은 그냥 안 오시더라고요. 아무래도 저는 걱정 없이 휴식을 취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18. 마치기 전에 이 자리를 빌어서 정말 말씀드리고 싶은 세 가지만 씁니다. 경험상 진짜 필요하신 분은 이 팁을 취급하지도 않으시던데, 그래도 항상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 뜻을 찾으세요. 내가 이 말의 뜻을 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어떻게든 진짜 뜻을 찾아내세요. 사전에 모든 뜻이 담겼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어떤 말은 인터넷 한 귀퉁이에서야 제대로 된 뜻이 나오기도 합니다.
- 오만에 빠지지 마세요. 번역학원 다녀보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결국 저는 방구석 고인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내가 후퇴하는 순간입니다. 단 한 단어를 번역하더라도 간절해지세요.
- 번역 비평을 하세요. 제가 비평을 끝까지 놓지 못했던 이유입니다. 백 번 받기보다 한 번이라도 글을 읽을 때 더 크게 배울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하나마다 "과연 이게 맞는 번역일까?"를 따지세요. 저절로 원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19. 앞으로 뭘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제가 번역할 시간은 좀더 많아지겠죠. "그냥 원래대로" 번역할 기회는 좀더 많아지겠다 싶습니다. 워크샵도 계속 시도해볼 생각입니다. 생각해보니까 별 차이는 없네요? 그래도 부담감만은 줄어들겠죠. 지난 탈퇴와 다르게 기분 좋게 끝을 말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20. 마지막을 장식하는 글이 7K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몇 주를 바빠서, 몇 주를 일부러 비평글을 안 썼는데 그럼에도 큰손으로 취급해 주셔서 비행기 탄 기분입니다. 지금까지 나인티를 필요 이상보다 귀중하고 대단한 기분이 들도록 느껴주게 하신 모든 분께 고맙습니다. 먼저 고민을 들어주신 메이든님, 카트시님께는 특별히 한 번 더 고맙습니다. 지금도 저는 다음 번역, 다음 비평을 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다만 절대 이전 같지 않은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왼쪽 탭에서 보셨듯이 저는 이제 의무감으로 번역에 뛰어드는 부담을 그만 포기하려고 합니다. 물론 앞으로도 비평 스레드에서 뛰어다니겠지만, 한다면 제가 하고 싶어서 하지 이름값에 끌려다니면서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를 굳이 기다리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단, 혹시나 이름값의 잔향에 이끌려서 저를 찾아오시는 분께는 꼭 비평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페이지 댓글, 위키닷 PM, 디스코드 호출로 저를 불러주신다면 그때는 제가 반드시 최선의 조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솔직히 제 실력은 다른 사람이 비평을 받고 싶어질 만큼 엄청 대단하고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PR을 한다면, 저는 한국 지부에서 번역 비평을 제일 많이, 제일 오래, 제일 예민하게 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