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5일
정말 나는 미친 것 같았다
잠도 제대로 못 잔 채로 보안부인지 뭔지에 끌려가서 또 거기서 몇 시간 동안 억류되어있다가 간신히 풀려 나와서 한 일이 젠장, 선배를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오해했다가, 제기랄, 술을 퍼 마신, 정말 나는 미친 것 같았다. 아침.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아홉 시 출근이지만 지금 시간은 열 두 시였다.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속은 반쯤 뒤집힌 것 같았다. 아직도 술이 덜 깼는지 걸을 때 마다 땅이 울렁였다. 한 칸 짜리 냉장고 앞에 가만히 쪼그려 앉아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봤다. 먼저, 경비 아저씨가 맥주 캔을 왕창 들고 왔다. 선배는 담배를 피고 있었고. 맥주가 다 떨어지자 선배가 책장에서 술을 꺼냈다. 책장이던가? 아무튼 그 사람은 책장에 뭐든 다 집어넣었던 것 같다. 책장에서 도수가 높은 술을 꺼냈다. 위스키? 보드카? 꼬냑? 아무튼 그 술을 재미있다면서 나한테 집중적으로 먹였다. 그리고, 그리고……. 그대로 뻗었던 것 같았다. 나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냉기가 와닿았다. 잠시 그 속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귀 끝이 차가워졌다. 콧 속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나는 머리를 뺐고, 안에 있는 우유를 집어들었다. 앉아서 우유를 홀짝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한번에 들이키고 싶었지만, 속이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다시 생각을 해보았다. 그 다음의 내용은 꿈과 섞여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오늘마저도 빠지면 난 기록보관소에서 완전히 매장 될 것이다.
“일 하러 가자, 일!”
나는 내 뺨을 때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한 손에 우유를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방을 휘적거리면서 나왔다. 가방 속에는 화분 대신 리의 일기장이 들어있었다. 안경은 예전에 쓰던 안경을 꺼냈다. 도수가 안 맞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8.14.
맑음.
8.31
흐림. 회의.
9.20
빌어먹을.
9.21
회의. SCP는 사용이 불가하다. 예외조항 작성 중.
9.25
예외조항 관련 회의.
9.26
도킨스랑 그뤼네테가 싸웠다.
9.28
그 새끼가 풀렸다. 빌어먹을.
9.30
빌어먹을.
10.1
빌어처먹을.
10.3
빌어먹을.
10.4
오캐인 대령이 뭣하면 사격을 알려주겠다고 제안했고, 나는 나가서 식칼을 샀다.
나는 기록보관소에 들어가기 전에 헛기침을 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도저히 몰랐다. 나는 다 마신 우유팩을 근처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사람들이 일순 멈췄다. 정적. 나는 죽을 것 같았다. 정말 나는 미친 것이 분명하다.
“미……. 미안……. 합니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저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얌마, 의심 받을 짓 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들으니 선배였다.
“도대체 뭔 짓을 했기에 내부 보안부까지 끌려가서 고초를 겪고 오냐? 누가 밀고라도 했대? 여러분, 이제 혼돈의 반란이 쳐들어오면 저 녀석을 밀고하면 됩니다!”
군데군데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생했다. 욕봤네.”
선배는 책상을 넘어 나한테 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내부 보안부라니?”
“보안부라면 그런 데 아니에요, 그 첩자 감시하는…….”
“무슨 일이었던 거야?”
여기 저기서 묻기 시작했다. 나는 우물쭈물하며 선배를 바라봤다. 선배는 짓궂게 웃고 있었다. 아, 저 인간이 나를 골탕 먹이려고 위로하는 척 했구나.
“저……. 저, 그……. 그냥……. 혼자…… 둬도 괜찮은데 말입니다.”
나는 온 몸을 베베 틀었다. 죽을 것 같았다.
“그래, 거기 가서 고초 심하게 당했을 텐데 들어가.”
선배가 나를 잡아 끌고 작업실로 데려갔다. 뒤에서 내가 그 곳에서 무슨 짓을 당했을지 무성한 말들이 들렸다. 그들의 궁금증과 상상과는 반대로 나는 그 곳에서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다. 그냥 눈을 가린 채 몇 시간을 보냈고, 또 다시 수 시간 동안 질문에 답했을 뿐이다. 선배는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끌고 왔다. 하지만 작업실에 들어가자마자 선배는 폭소를 터뜨렸다.
“아이고! 너 표정 진짜…….”
선배는 벽을 내리치면서 웃어댔다.
“그래요. 남 약 올리니까 재미있죠.”
나는 이미 포기했다. 선배가 저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재미있지. 남이어서 재미있는게 아니라, 너니까 재미있는거야.”
선배가 말했다.
“이런 데 라도 쓸모가 있어서 다행이네요.”
나는 가방에서 공책을 꺼냈다.
“아직도 그거 읽냐.”
“이것도 선배가 보낸 거에요?”
“그렇지.”
나는 선배를 찬찬히 훑어봤다.
“기분 나쁘게 어디서 눈을!”
선배가 위협처럼 주먹을 들었다.
“아니에요.”
“아직도 내가 뭔가 싶냐?”
“……. 아뇨.”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어젯밤 꿈이 생각났다. 아니, 꿈이 아니었던가?
“선배도 나가서 일 해요.”
“참나, 재미 없기는.”
선배가 툴툴거리면서 방문을 나섰다. 꿈 속에 오캐인과 리가 나왔다.
“아 맞다, 선배.”
나는 선배를 불러 세웠다.
“나 어제 많이……. 취했는데, 이상한 말 안 했어요?”
“음. ‘우웩’ 이라던가 ‘웩’ 이라던가 ‘웨에엑’ 이란 말은 많이 했지.”
선배가 구역질 난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 나갔다. 나는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정말이지 나는 미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식칼을 오캐인 대령에게 들켰다.
“왜 그러는 겁니까, 리!”
오캐인 대령이 식칼을 집어들었다.
“당신은 죽어도 이해 못해요, 대령님.”
리는 그 칼을 뺏으려고 했다. 나는 턱을 괴고 생각했다. 그들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있게 말해보시죠.”
오캐인 대령은 키가 컸고, 그의 손은 리의 손에 닿지 않았다. 부숴진 파이프 담배는 할아버지의 것이었다. 리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끔찍하게 좋아했다. 담배가 부숴졌다는 이유 만으로 리는 백과사전만큼 두꺼운 책을 들고 날뛰었다. 반면 리는 그 외의 가족에는 냉담했다. 남동생에게는 죽여버린다는 말을 서슴없이 꺼냈고, 할머니에게는 간혹 편지를 보내지만 철저하게 형식적인 것이었다. 부모님에 대한 언급은 일절 등장하지 않았다.
“건실한 가정에서 자란 당신은 죽어도 이해 못합니다.”
리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칼을 포기하고 자신의 지옥 같은 낙원인 기록보관소로 기어들어갔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그래서 나는 눈을 감았다. 부모님과 일가 친척을 생각해보았다.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이제 가물가물하고 일가 친척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뿐이었다. 꿈 속에서 오캐인 대령과 리는 말하고 있었다. 리가 먼저 말했다. 얘는 우리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어. 오캐인이 대꾸했다. 쓰레기 속에서 보물을 찾아내는 사람이군! 선배가 답했다. 이 녀석은 논리적 추론 엔진이야. 간혹 데이터 간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내기도 하지. 우리가 짐작조차 못 하는 정보를. 경비가 말했다. 완전 탐정이구먼. 나는 눈을 떴다. 문서 복원 작업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영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일가 친척에 대해 그런 극렬한 살인 욕구라던가 그런 것은 느끼지 않았다. 형제나 자매가 있었다면 쓸쓸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을 뿐. 지금은 형식적인 관계만 유지할 뿐이지, 영 왕래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죽이겠다던가 그런 느낌은 없었다.
“리가……. 1919년에 대학교 사서였다고?”
나는 중얼거렸다.
컴퓨터를 보았다. 첫 번째 일기장을 펴서 그 사이에 있는 사진을 꺼냈다. 그것을 스캔하고, 리가 나온 부분만 잘 편집했다. 특히 얼굴이 잘 보이도록 편집했다. 미 도서관 연합의 회원이었을까? 그 시대에 여자가 대학을 나올 수 있었을까? 1919년에 이미 사서로 일하고 있었으며, 제 1차 세계대전 때 전보와 관련된 일을 했었다. 할아버지는 대학 도서관 관장이었고. 아, 좋은 집안이었구나. 혹시나 해서 도서관 연합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1879년.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C.A. 카터라던가, 리가 욕 대신 쓰는 멜빌 듀이라던가.
“빌어먹을 듀이!”
리 대신 소리쳤다.
하지만 1910년대와 1920년대에는 사진이 아무것도 없었다. 연합의 회장조차도 사진이 없었다. 이런 유쾌한 단체에 사진이 없다니, 유감이었다. 방금 편집한 사진을 갖고 이미지 검색을 해보았다. 역시나 검색 결과는 없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 시대에 졸업 앨범을 찍긴 했지만, 너무 허황된 계획이었다. 인사파일은 기록보관소에서 보관하지 않는다. 인사부에서 보관하지. 그나마도 70년 주기로 삭제한다고 했던가?
“그래, 신상털이는 안 좋은 거니까!”
나는 애써 위안했다.
10.10
동생인 줄 알고 사서 한 명을 책으로 두들겼다. 케테르 앞으로 끌려갔다. 근신으로 끝날 것이 아니었기에, 케테르는 나를 쳐다보았다. 불안해.
나는 일기장을 빠르게 넘겼다. 11월부터 다시 일기 내용은 길어지고 있었다. 나는 잠시 시계를 봤다. 네 시에 기록보관소에 들어가야 한다.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알람을 맞췄다. 한번 숨을 들이쉬고, 그대로 이야기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남동생, 가족은 둘 뿐이에요?”
그뤼네테가 물었다.
케테르의 작은 배려였을 것이다만, 리는 그 배려가 달갑지 않았다. 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동생은 일단 젖혀두고, 할머니와는 연락 자주 하나요?”
“별로요.”
리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저, 리안 씨가 그러는데, 한번 댁에 다녀오는 건 어떻냐고…….”
“그냥 날 내쫓고 싶다고 말해요.”
“리 씨, 벌써 몇 달 째인 줄 알아요?”
그뤼네테가 차트를 덮었다. 리는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어요. 내 주소만 다른 곳으로 바꾸고, 직장 주소만 바꾸면 이 일은 해결이 된다고요.”
“재단을 그만 두시겠단 소리밖에 더 되나요?”
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들은 몰라요. 그 인간이 잡혀 들어가면, 할머니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걸 빼온단 말이에요.”
“보석금 같은 건가요?”
“게다가 가족 집이니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런게 어딨어요.”
“없을 것 같죠? 언제나 말하는 거지만, 나는 그게 내 눈에 다시 한 번 더 보인다면, 난 그걸 죽여버릴겁니다.”
“도대체 가족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거에요?”
“젠장, 날 그냥 두라고요.”
리가 책상을 내리쳤다.
“기억 소거제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번엔 데미안 박사였다.
“정말 실험 기록을 작성하다 보면 당신이 불쌍하다니까요.”
리가 가볍게 웃었다.
“뭐, 어쩔 수 없죠. 내가 멍청해서 일이 이렇게 늘어지는 거니.”
“당신은 뛰어난 박사입니다, 스킹크 씨.”
“스킹크라 부르지 말라니까요.”
“그럼 미켈란젤로 씨.”
“데미안입니다, 데미안.”
데미안 박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리는 이미 그의 이름을 갖고 놀리는데 재미를 붙인 것 같았다.
“그러죠, 에밀 싱클레어 씨.”
“데미안, 데미안.”
“데미안이 그렇게도 좋아요?”
“설마.”
데미안 박사가 웃었다.
“이름을 왜 그렇게 싫어하는거에요?”
리가 물었다.
“당신은 성이 스킹크(skink; 도마뱀)인데 좋아할 리가 있겠습니까.”
“뭐 특징도 없는 리보단 낫지 않겠어요?”
“리 씨 역시 자기 이름을 싫어하는 것 아니었나요?”
리는 무슨 말이냐는 듯 데미안 박사를 쳐다보았다. 데미안은 의미를 모를 미소를 띄웠다.
“L. 도대체 이름에 해당하는 그 ‘L’이 뭐냐, 이 말입니다.”
“뭐긴 뭐에요. 이름 앞 자죠.”
리는 너무 쉽게 대답하였다.
데미안은 잠깐 눈을 굴렸다.
“도대체 뭐의 줄인 말인가요? 릴리스?”
“그건 악마잖아요.”
“악마라.”
데미안은 크게 웃었다.
리는 그가 웃는 모습을 처음 봤다.
“그건 의외군요!”
데미안 박사는 리의 어깨를 쳤다. 리는 어리둥절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설마 종교라도 있는겁니까?”
“에이, 꿈에라도 그런 말은 마시죠. 저는 악마도, 천사도, 신도 아무것도 안 믿어요.”
“SCP 재단의 관장님답군요.”
“재단의 입장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격리해야 할 SCP겠죠?”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몇 개의 SCP를 보셨죠?”
“아시다시피 제 위치는 SCP를 딱히 보지 않아도 괜찮아요.”
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악마는 몇 개 격리해 놓았습니다. 아니, 우리가 그냥 그 SCP에 ‘악마’ 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죠.”
“’천사’ 라는 이름을 가진 SCP는 없나요?”
“있습니다.”
“그럼 ‘신’ 은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언젠간 그것도 가두겠죠.”
리는 유쾌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웃으시는군요.”
데미안이 말했다.
리는 눈가를 훔쳤다.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뭐. 웃었으니 된거죠.”
“그나저나 릴리스보고 악마라 하다니, 그건 좀 의외였어요.”
“그건 아마…….”
리는 입을 다물었다.
“가정 교육인 겁니까?”
“할머니는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를 믿는 사람이에요.”
“어머니 쪽, 아니면 아버지 쪽?”
“어머니.”
“할머니께서 교육을 하셨나 보군요.”
“뭐……. 할아버지가 하셨죠.”
리는 어깨를 다시 으쓱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그 다음은 그뤼네테였다.
“이 정도로 오랫동안 안 오면 이제 신경을 그만 써도 될 것 같은데요.”
그뤼네테는 한 손에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안 오면 더 불안하다고요.”
리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더 큰 것이 올 것 같다고요.”
또 다시 데미안 박사였다.
“실패했어! 실패!”
데미안 박사는 소리쳤다.
다행이 피실험자는 데미안이 아니었다.
“난 멍청이다! 천하에 쓸모도 없는 병신새끼!”
데미안은 벽에 제 머리를 찧었다.
“어떻게 계속 실패할 수 있는거지?”
“힘 내요.”
리가 종이를 정리하며 말했다.
“원래 위대한 발명은 수천 번의 실패를 통해 이뤄지는 거니까요.”
“하……. 설계를 다시 해야겠어, 아마 뭔가 처음부터 잘못 된 느낌입니다.”
“사람의 기억이 그렇게 쉽게 움직이나요. 그나저나 당신 물리학 박사라고 하지 않았어요?”
리가 의뭉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
“학위가 두 개라면 안 믿을 거잖습니까.”
“지금 학위 하나도 없는 사람 앞에서 학위 자랑하는 건가요. 나빴네.”
리가 투덜거렸다.
“그래도 당신은 당신 자리에서 많은 것을 해냈잖습니까. 하지만 나는…….”
“하, 당신은 남자에요. 남자에 학위가 두 개. 뭐가 그렇게 두려워요? 나보단 훨씬 좋은 환경에 있는데 뭘 그렇게 풀이 죽어 있어요?”
데미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말로 설명하죠. 아무리 말해도 당신은 모를 겁니다.”
리는 멍하게 데미안을 쳐다보았다.
“왜요. 틀린 말 했습니까?”
리는 오캐인 대령을 만났다. 대령은 그 휘하의 요원들과 함께 있었다. 그는 목청껏 이것 저것을 지시하고 있었고, 동시에 이것 저것을 보고받고 있었다. 기지에 왔으니 이제 다 마무리 된 것인지, 그는 농담을 섞으며 웃고 있었다.
“대령님.”
리가 먼저 인사했다.
“오, 그 동안 잘 지냈습니까!”
오캐인이 리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역시 리는 오캐인의 손을 잡지 않았다.
“문제가 되던 일은 잘 해결 되었고?”
“뭐, 아직까지는…….”
리는 자기의 손을 빼냈다.
“이번엔 뭔가요?”
오캐인은 자신의 부하들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차 한 대가 들어와 멈췄다.
“최근에 찾은 SCP……. 랄까요. 정확한 실험을 해봐야겠지만.”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 그 사람은 여러 요원들에 둘러싸여있었다.
“저 사람인가요?”
“인간형 SCP죠. 식물에 큰 해를 입히는 것 같아 최대한 맨 땅에 닿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만.”
오캐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는 옮기는 것까지 입니다. 나머지는 박사님들이 알아서 할겁니다. 아 맞다, 기지 안에 리안 있소?”
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 대화 상대는 도킨스였다.
“웬 일이래요. 기록보관소에는 영 안 오시더니.”
리는 도킨스를 맞았다.
“흠, 최근에 기지 구조가 바뀐 것 같지도 않은데 내가 격리했던 SCP를 찾을 수가 없어서 왔다만.”
“무슨 SCP를 찾는 거죠?”
“헤르메스의 지팡이.”
“그건 얼마 전에 실험실로 옮겼을걸요. 그냥 단순한 막대기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위험했나보더라고요.”
“나한테 말을 안 하고 옮겼다, 이 말이요?”
“그걸 저한테 물어보면 안되죠. 그리고 옮기는 것을 하나하나 당신한테 말해야 할 이유도 없고……. 당신은 그저 보안설계 담당자 아닙니까?”
도킨스는 리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돌아서서 나갔다.
“난! 쓸모 없어!”
데미안이 울부짖었다.
“네, 당신은 쓸모 없어요.”
리는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이번 피실험자도 다행이 데미안은 아니었다. 케테르가 하는 말이, 정부의 협조를 얻어냈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동안, 그는 리보다도 늙어 보였다.
“그냥 죽어버리는게 나아요.”
데미안은 우울하게 말했다.
“적어도 당신처럼 학위가 두 개 있는 연구원을 데려다 놓는다면, 죽어도 상관 없어요. 음, 그 수는 많을수록 좋겠군요.”
“학위가 여러 개 인거랑 유능한건 다릅니다.”
데미안이 덥수룩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머리 좀 깎지 그래요. 수염이랑.”
쉽게 말해서, 데미안 박사는 거지 꼴이었다.
“기운 차려요. 한 건 실패할 때 마다 그렇게 소리지르면 어떡해요. 지금까지 약 예순 번은 실패했잖아요?”
데미안은 다시 소리쳤다. 그리고 리의 맞은편에 주저앉았다.
“당신은 절대, 절대로 모를 것입니다! 당신이 항상 말하는 것 처럼.”
“그 말 꽤 애용하네요. 제 특허품인데 계속 쓰면 돈 받을겁니다?”
“제길, 나한테 돈이 어딨다고.”
데미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천하에 쓸모 없는 놈이니까요. 돈도 못 벌고!”
“돈 못 벌거는 대충 짐작하고 왔으면서 말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그래도 난 당신이 부러워요. 밖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았어요?”
“연구생이었습니다만. 내 위의 교수가 죽어야 뭐 교수 직을 꿰차든 말든 할텐데 말이죠. 아, 교수 눈 밖에 나서 불가능했으려나.”
리는 그 말에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부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데미안은 리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땅 꺼지겠네요.”
“역시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그거 나만 쓸 수 있다니까 그러네요.”
“왜요, 당신이 처한 상황만 특별한 것 같습니까?”
이번에는 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데미안 박사님. 광신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당신 할머니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뇨. 할머니는 독실한 신자였고 우리에게 늘 ‘좋고 옳은’ 신앙을 가르치고자 했지만 광신도는 아니었어요.”
“그럼 ‘나쁘고 그른’ 신앙은 뭐였나요?”
리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복잡한 심정을 가라앉힌 뒤 천천히 말했다.
“이단과 사이비.”
어느새 알람이 울렸다. 나는 눈을 돌려 시계를 봤다. 두 번째 일기장은 거의 다 읽었다. 1919년 8월에서 1920년 8월까지의 이야기. 중간에 한 반 년 분량이 허술한 것을 생각하면, 이것 역시 반 년짜리 일기였다. 나는 괜히 뿌듯했다. 무언가를 읽는 것은 좋아하지만, 빨리 읽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좋아, 발전하고 있어.”
그리고 허튼 짓은 말아야지. 도대체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O5를 다시 이 일에 끌어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재단의 최고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상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어떤 사람 이려나. 맨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려면 늙은 사람들 이려나. 그 사람들은 나와 다르게 착실한 사람들일 것이고, 진중한 남녀일 것이다. 동시에 기억소거를 하다가 [데이터 말소] 가 된 사람을 네트워크 망을 만드는 실험에 투입할 정도로 냉철하고 냉혹한 사람일 것이다. 밖으로 나갔다. 기록보관실로 들어가기 전에 선배의 책상으로 갔다. 선배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샌가 옷을 깔끔하게 갈아입었다.
“멋진데요.”
빈 말이었다. 선배는 자조했다.
“오늘도 어디 가요?”
“그래.”
오늘따라 선배의 얼굴이 낯설었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나 때문이에요?”
선배는 고개를 저었다.
“나 때문이다.”
선배가 무겁게 말했다.
어제 선배가 물러나겠다느니 한 말이 기억났다. 어쩌면 선배는 2등급이지만, 직책은 더 높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록학으로 석, 박사 학위를 땄다던가.
“재단……. 나가는 거에요?”
나는 작게 물었다.
“나 나가면 이 자리에 네가 앉게?”
나는 장난으로 치부하려고 했지만 선배의 얼굴은 조금 진지했다.
“기록보관실에 들어갈게요.”
“야망을 좀 가져봐. 너도 고문서만 열심히 복원할 수 있으면 만족이냐?”
“그럼 선배의 야망은 뭐에요?”
선배는 생각했다. 하지만 답은 듣지 못했다. 나는 뒤로 돌아 내 책수레를 끌었다. 선배가 내 뒤에 대고 말했다.
“내일 옷 잘 차려 입고 와.”
나는 멈췄다.
“왜요, 고백이라도 하시게?”
“높으신 분들이 널 보고 싶단다.”
“네에…….”
나는 풀이 죽어서 대답했다.
“이봐, 너무 풀 죽지 말라고. 이번엔 네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내 잘못이니까.”
나는 선배를 쳐다보았다. 선배는 웃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선배는 감시 카메라에 찍혀있었다. 내 방에 공책을 가져다 놓는 선배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럼 소장의 방에서 공책을 빼온 것은 선배일까? 그것 때문에 선배는 끌려가는 것일까? 자석을 붙인 그 자리에서, 케비넷 문을 열면서, 문서를 보면서 계속 생각했다. 선배는 어떻게 그 공책들을 손에 넣었을까? 그렇다면 그 검은 공책도 원래 선배가 갖고 있었던 것일까? 선배는 그 공책을 갖고 뭘 하려던 것이었을까? 만일, 선배가 그 공책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여기에 갖고 들어왔다면? 선배는 역사는 전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 곳에는……. 다른 종류의 역사가, 재단 인원들의 개인 기록들이 잠들어 있다는 것인가? 나는 행동을 멈췄다. 나는 그 공책을 어디에서 주었더라. 나는 책수레를 놓고 달렸다. 감시 카메라에 내 행동이 다 찍혔을 테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내 행동은 O5가 보장하고 있지 않던가. 20년대 기록, 그 언저리.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사건 기록. 아니다, 이건 개인 기록이다. 분류에 목을 메는, 거기다 방마저 도서관과 박물관의 중간처럼 꾸며놓은 그 사람이 개인 기록을 사건 기록에 넣을 리가 없었다. 논리적 추론 엔진. 데이터와 데이터 간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내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연구원 개인 일지. SCP 관련 실험 기록도 아니고, 면담 기록도 아니고, 사건 기록도 아닌 단순한 개인 일지. 재단은 개인 일지 작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가끔 그것들은 증거로도 사용되고, SCP의 새로운 특성을 발견하는데 쓰이기도 했다. 그리고 대게 그것들은, SCP 문서와 같이 보관된다. 보관 되는 경우는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나는 SCP 문서에 접근하지 못한다. 사건 기록. 사건 기록……. 설마 사서들이 그걸 못 봤겠는가? 나는 환하게 웃었다. 나는 다시 허튼 짓을 시작했다.
“아버지, 라는 인간은 광신도였습니다.”
리가 입을 뗐다.
“자, 자. 여러분 잠시 주목!”
내가 소리쳤다.
사람들은 날 묘한 표정으로 보았다. 그 사람들 중에는 선배가 없었다.
“어제 제가 끌려가긴 했지만, 제 선배님은……. 그러니까 기록보관소 차장님 말입니다. 그 분께서는 약간, 좀, 그, 위험하달까요.”
“당신이 광신도라 함은 ‘나쁘고 그른’ 신앙을 가진 이단과 사이비겠군요.”
데미안의 말에 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제가 찾은 기록물이, 분실되었던 것이었나봐요. 엄, 제 말이 잘 이해가 안 가도 이해해 주세요. 이거 때문에 선배님이 옷을 벗을지도 모른다니까요? 아, 당연히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그러니까 저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죠.”
“제 어머니는 제가 열 살 때 돌아가셨고요. 셋째 동생을 낳다가 돌아가셨죠. 그 막내도 시체로 태어나긴 했지만.”
“그래 각설하고, 혹시 기록 보관소에서 ‘표준 규격’ 에 어긋나는 기록을 보신 분 계십니까? 공책이라던지, 일지라던지 아무튼 좀 이상해 보이는 기록이 있었나요?”
“그 이후에 아버지는 종교에 미쳤죠. 내가 봐도 어이없는 종교였어요. 펫……? 아무튼 이름이 그 따위인 신부가 우리 집을 찾아오기도 했죠. 교주는 아니었는데 뭔가 높은 사람이었어요.”
사서들은 일순 술렁였다. 데미안은 리를 진지하게 쳐다보았다.
“있었네.”
나이가 지긋한 사서가 손을 들었다.
“기계를 섬기는 종교였죠. 그 때부터 우리 집에 있던 모든 금속이 사라졌어요.”
“SCP 문서와 함께 있는 개인 일지 말일세.”
“광신도의 아이로 사는게 얼마나 괴로운지 아세요? 그게 뭘 뜻하는지도 아냐고요. 그래요, 이 빌어먹을 광기는 유전병이에요. 아버지 쪽 유전자에 이미 각인이 되어있다, 이 말이라고요.”
“SCP 문서와 같이 있지 않은 개인 기록을 보셨나요?”
나는 질문했다.
데미안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무엇을 질문하려고 했을까. 정신병은 유전되지 않습니다?
“내가 열 세살 때 할아버지는 나와 내 동생을 데려갔어요. 그리고 내 성은 그 때부터 리가 되었죠. 엄마와 똑 같은 성이었어요.”
“언제 들어온 기록이지? 작년 이맘때는 본 기억이 없는데.”
또 다른 사서가 물었다.
“광신도의 딸. 그것도 빌어먹을 사이비 교도의 딸. 이해할 수 있겠어요?”
리는 데미안을 비웃었다.
“그렇다면 작년 이맘때 이후에서 올해 이맘때, 그 사이에 들어온 기록입니다.”
나는 속으로 계산했다.
“흠……. 당신에게는 정말 안 된 이야기지만, 기계를 섬기는 종교라고요?”
데미안은 진지하게 물었다.
“또 허튼 짓을 하는건 아니지?”
나이 지긋한 사서가 나를 의심했다. 하지만 나는 확신했다. 분명 선배가 높으신 분을 뵙는 것은 이 기록과 관련이 있다. 나는 선배가 재단을 떠나는 것이 싫었다.
“왜요, 그게 또 SCP입니까?”
“……. 기록물 형태를 ‘기타’ 로 놓고 찾았는데 검색 결과가 없어. 그래서 ‘개인 일지’ 로 검색하고, SCP에 관련된 기록을 뺐더니 그것도 검색 결과가 없는걸?”
“아버지의 소재는?”
“그래서였군요!”
내가 손뼉을 쳤다.
“살인죄로 감옥. 그 인간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아요. 그 인간은 나와 내 동생을 데려가려고 안간힘을 썼고, 할아버지는 안간힘을 써서 그걸 막았죠.”
리는 이빨을 깨물었다.
“그래서 선배가 이리 저리 끌려 다니시는 거에요!”
데미안은 이해가 된다는 표정이었다.
“혹시, 그 사람이 어느 감옥에 있는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제 계획은 이래요…….”
“알긴 알죠. 하지만 이미 죽었을지도 몰라요. 사형수였으니까요.”
“무단으로 기록을 집어넣거나 그랬구먼. 우리가 발버둥 쳐도 그건 어쩔 수 없어.”
나이 지긋한 사서가 말했다.
“그래도 일단 알려만 주십시오.”
데미안이 말했다.
다른 사서들도 어쩔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선배가 끌려갔는데, 심지어 이 재단에서 나갈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르는데, 가만히 있자고요? 그 사람은 우리 동료에요!”
“알려드리죠. 그 빌어먹을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괴롭게 해줬으면 좋겠군요. 아직까지 살아있다면 말이죠.”
“이보게. 보안 사항 위반이야. 자네가 보안부에 끌려간 이유도 알겠군.”
나는 힘이 풀렸다.
“좋아요. 그 교도소에서 D계급을 뽑아올 수 있을지 케테르에게 건의해볼게요. SCP 밥으로 던져주죠.”
데미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여기는 기록보관소야. 보안사항 위반은 얄짤 없다고.”
동료 사서가 자기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나는 작업실 문을 닫았다. 무단 반출보다는 덜하긴 했지만, 무단 반입도 상당히 큰 규정 위반이었다. 아니, 무단 반입한 자료를 무단 반출도 했으니 두 번 적용 된 것일까? 그리고 보안 카드를 무단으로 내게 빌려줬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그냥 다른 자료를 찾아볼까 싶어서 선배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생각해보니 내가 한 짓으로 누굴 위험에 빠뜨렸는지. 내 어깨는 무거웠다. 선배가 그 근원이기는 했지만. 나는 세 번째 공책을 폈다.
“헤르메스의 지팡이에 엔트로피의 종까지……. 내가 뭘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도킨스는 불쾌한 표정으로 케테르에게 물었다.
“도킨스 박사님, 미안하지만 그걸 당신에게 일일이 보고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도킨스는 헛웃음을 쳤다.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내가 관리하던 SCP 아닙니까!”
“네, 관리하던 SCP이지, 관리하는 SCP가 아니지 않습니까.”
케테르는 강경했다. 리는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그쳤다. 잠시 서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도킨스 박사가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리, 다음부터 기록물에 변경 사항이 있으면 나에게 알리시죠.”
도킨스 박사가 위협적으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당신은 기록물에 대해서 내게 명령할 권한이 없어요. 당신은 보안 설계자 아닙니까?”
“젠장, 내가 관리하던 SCP를 다 이상한 사람들한테 넘기는걸 눈 뜨고 못 봐서 그렇소!”
“도킨스.”
케테르가 문을 열었다.
“그만 하십시오. 리 씨, 들어와 주시죠.”
리는 도킨스에게 건성으로 인사하고 케테르를 따라 들어갔다.
“그래도 많이 돌아오셨군요, 리 씨.”
케테르가 웃어 보였다.
“쉬는 건 어때요?”
“쉰다, 라.”
케테르는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재단에서 가장 젊었지만, 그렇게 젊어보이지 않았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일년 사이에 폭삭 늙어버렸다.
“나야 생긴게 원래 이렇지만, 이제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보이면 그건 문제가 있는 거에요.”
리는 재단 고위 멤버 중 세 번째로 어렸다.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오캐인 대령, 그 밑이 그뤼네테, 그 밑이 도킨스, 그 밑이 리, 리보다 한 살 어린 데미안, 그리고 가장 젊은 케테르. 하지만 리는 그뤼네테보다 늙어보였다. 하긴, 단체 사진을 보니까 그래 보이긴 한다.
“옷차림 때문에 늙어 보이는 겁니다, 리 씨.”
“당신은 여자 맘에 잘 맞게 이야기를 한단 말이죠마는, 난 통상의 여자랑 사고 회로가 다르다는걸 충분히 알고 있지 않습니까.”
리는 케테르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리의 사진을 다시 보았다. 거의 웃지 않았다.
“아니면 그냥 표정이 무뚝뚝해서 늙어 보이는 걸지도 몰라요.”
“글쎄……. 당신 표정을 보면 또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케테르는 잘 웃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또 뭣 때문이에요?”
“음.”
케테르는 책상 서랍에서 파일을 하나 꺼냈다.
“찾아보라는 기록은 찾아보셨습니까?”
“SCP-173 말하는 거군요. 혹시 몰라서 가져왔습니다만.”
리는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케테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기묘한 원반이랑 제가 무슨 상관인거죠?”
“걱정마요, 리. 그걸 당신에게 맡기지는 않습니다.”
“아, 거 참 고맙네요.”
리가 웃었다. 케테르는 파일을 열었다.
“여기, 이 SCP가 한 교단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시죠?”
“부서진 신의 교단인가 하는 것 말하는거죠?”
“우리의 듬직한 요원들이 이 교단의 성지를 완벽하게 박살내놓고 그걸 재단으로 가져왔습니다. 아직 교단은 이 원반의 행방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봐요, 설마 내가 이 말도 안 되는 원반을 섬기는 종교랑 관계가 있다는 거에요? 난 무신론자라고요, 케테르 씨.”
“당신은 무신론자죠. 하지만……. 그래요, 이 종교는 원반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럼요?”
“기계를 섬기죠.”
리는 케테르를 노려보았다. 뒤통수를 맞은 표정이었다. 분명 데미안 박사가 말했으리라. 리는 배신감에 주먹을 쥐었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대화를 녹음하고 싶습니다만.”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리가 불쾌하다는 듯 일어섰다.
“나가시면 안됩니다. 나갈 수도 없고요.”
케테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분명했다.
“이게 당신에게 민감한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말해야만 해요.”
“끝나고 데미안 박사를 DDC 판본으로 멋지게 후려치고 싶군요.”
“DDC든 백과사전이든 칼과 총 빼고는 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지금 나가는 것은 안됩니다. 다시 앉으시죠. 리 씨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르기는 싫으니까요.”
리는 잠시 서있다가 천천히 앉았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녹음은 안 됩니다.”
“좋습니다. 그럼, 자……. 아버지께서 기계를 섬기는 종교를 가지셨다고요?”
“아버지라 말하지는 말아주시죠.”
“알겠습니다. 아무튼 기계를 섬기는 종교를 가지셨다고요?”
“맞아요.”
케테르는 종이에 받아적었다.
“안 쓰면 안됩니까?”
리는 불쾌해보였다.
“공식 기록으로는 남지 않을겁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래서 리 씨, 그럼 그 사람에게서 교리 같은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네, 그렇죠. 아주 많이 들어봤어요.”
리가 반항적으로 답했다.
하지만 케테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생각나는 것을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생각나는 것이요? 미안하지만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걸요.”
“협조 해 주시죠.”
“빌어먹을!”
리는 책상을 내리쳤다.
“빌어먹을 인간 때문에 내가 이렇게 문초를 당해야 한단 말이에요? 닥쳐요, 제발 좀 그 입 다물란 말입니다!”
“진정하세요, 리 씨.”
“그 인간을 찾아서 물어봐요. 난, 그, 빌어먹을, 종교에, 하나도, 관심 없고, 하나도, 연관된 적이, 없단 말이에요!”
케테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리 씨. 이 교단은 굉장히 작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의 성지를 거의 완벽에 가깝게 파괴했는데, 그냥 이 교단을 말살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성지를 파괴하고, 그들이 섬기는 이 원반이 사라진다면 교단도 저절로 없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교단은 죽지 않았습니다. 성지가 없어지고, 이 원반이 어디 갔는지 찾지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분명 SCP가 이것 뿐은 아닐겁니다. 그들은 다시 모이고 있어요.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SCP를 모두 회수하고 그들의 종교를 완전히 끊어놓을 수 있게 말이죠. 그러니 협조해 주십시오. 리, 당신은 그 종교를 증오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인간한테 가서 물어보란 말이에요!”
“당신의 아버지는 이미 죽었습니다. 당신이 스물 일곱 살 일 때 말이죠.”
“그 인간을 아버지라 칭하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앉으십시오, 리. 앉으십시오.”
“데미안 박사보다 당신의 머리를 책으로 후려치고 싶네요.”
“네, 나중에 후려칠 수 있게 할 테니까, 제발 앉아주십시오, 리.”
리는 다시 주저앉았다. 숨이 거칠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그래요. 교리요? 그 빌어먹을 교리에 대해서 알려주죠.”
리는 케테르의 말을 듣지 않고 사납게 말했다.
“신은 부숴졌고, 여기 사람들 중에 있어요. 빌어먹을, 그 아저씨의 유품을 보면 분명 성경이 있을겁니다. 그 인간은 나와 동생을 앉혀놓고 그걸 읽어댔어요. 젠장, 그걸 어떻게 잊느냔 말입니다. 그 빌어먹을 망가진 신을, 우리가 고쳐야 해요. 그러면 그 젠장맞을 신이 우리를 고쳐준다나요. 젠장, 젠장!”
“신을 고치는 방법은, 혹시 아십니까?”
“쇳덩어리를 끊임없이 먹이는 것. 할아버지가 우리를 데려간 결정적인 이유가 그 쇳덩어리에 있어요. 그 인간이 나중에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우리 집안의 모든 쇠와 철과 금속을 가져다 그 빌어먹을 신에게 먹이로 주고, 자신의 월급으로 철을 사서 몽땅 먹이로 바치고, 나중에 돈이 없으니까 어머니 무덤까지 파냈습니다! 젠장, 빌어먹을 뼈에 어떻게 철이 있을 수 있다는 거죠?”
“쇠를 먹이로 준다고요? 어디에 말입니까?”
“그건 나도 몰라요, 제기랄. 그 빌어먹을 신이 어머니 유해를 집어 삼켰다 이겁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 놈이 나한테 뼈를 들게 했다고요. 젠장, 그 신이 어머니를 다시 살려놓을 것이라 말했어요. 그 뼈 속에 들어있는 철을 갖고 말입니다. 빌어먹을 신이, 어머니를 톱니와 체인과 강철로 살려놓을 거라고, 젠장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였단 말입니다. 빌어먹을.”
“당신의 아버지가 그 신을 섬기기 위해 가던 교회나……. 집회 장소가 있었을 테죠?”
케테르는 그 상황에서도 침착했다.
“나도 몇 번 가봤죠. 하지만 그 곳에 철과 쇠와 금속 부품을 씹어 삼키는 신은 없었어요. 제기랄 아무데도 신이 없었다고요! 아무데도! 빌어먹을, 그걸 그 종교의 사제한테 물었다가 동생은 죽을 뻔 했고요! 모르긴 몰라도 그 젠장할 종교는 사람도 죽일 거에요. 젠장, 그게 교단이라고요? 그게? 빌어먹을, 거기서 헌금을 걷었어요. 헌금은 모두 동전이었죠. 그래, 그 신은 빌어먹을 동전을 처먹는 것입니다! 빌어먹을 동전을!”
“혹시 그 장소가 어딘지 아십니까?”
“몰라요.”
“리…….”
“젠장, 진짜 모른다고! 빌어먹을 마차 한 대가 창문을 모두 가린 채 굴러오면 우린 덜컹거리는 데서 가만히 빌어먹을 성경을 읽으면서 그 곳까지 끌려가야 했다고! 당신은 이해 못 해, 빌어먹을 당신은 이해 못한다고.”
“그럼 혹시 금속과 동전은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까?”
“그걸 알았으면 내가 칼 들고 찾아갔겠지.”
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할아버지가 우릴 데려갔어요. 원래 살던 집은 할아버지가 처분하셨고. 그 인간은 격노했습니다. 당연한 것이, 그 집을 판 돈이면 더 많은 철을 사다가 같잖은 신에게 먹일 수 있을 테니까요. 빌어먹을,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원했어요. 젠장, 우리도 기계에 넣고 갈아 먹일 생각이었나 보죠. 젠장, 젠장, 우리는 몇 달 동안 그 빌어먹을 종교 단체에 있습니다, 젠장, 그 인간의 영광을 위해서, 빌어먹을. 아마 모르긴 몰라도 우리가 이상한 기사단에 들어간 덕에 그 종교 내부에서 지위가 꽤 올라갔을걸요? 할아버지가 우릴 데려간 이후로는,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요. 할아버지가 그 인간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렸거든요. 우리는 안심했고, 행복할 수 있을 거라 믿었죠. 어머니는 없지만 동시에 미친 아버지도 없었으니.”
“그리고 그 사람이 당신의 할아버지를 살해했고요?”
“빌어먹을……. 당신은 정말 짜증나는 사람이군요. 아주 악질적이에요.”
“미안합니다, 리. 그럼 그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으로…….”
“제기랄, 그건 분명 지령을 받은 걸 겁니다! 아니, 그 인간은 이미 그 종교에 미쳐있었으니 지령을 받은 거나 마찬가질 겁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래도 경찰은 빠르더군요. 경찰은 빨랐고, 그 인간은 변호사도 못 구한 채 심판을 받았죠. 젠장, 그런데 그 인간이 몇 년 전에 죽었다고요?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쁜 소식이군요.”
“그 이후로 그 교단과 접촉한 적은 있나요?”
“전혀. 빌어먹을, 당신이 다시 끄집어내지만 않았다면 그 망할 교단은 생각도 안 했을 겁니다, 영원히!”
“당신이 원래 살 던 그 곳은…….”
리는 책상을 내리쳤다.
“……. 우리가 알아서 찾아내죠. 마차로 이동했다라, 특이하네요. 아니, 이 교단의 특성을 보면 꼭 맞는 부분이군요. 혹시 그 교단에 당신 동생이 귀의했거나 그렇습니까?”
“그랬다면 난 그 빌어먹을 놈의 목을 이미 비틀었을 겁니다. 젠장, 그 놈은 종교에 미치지는 않았어요. 그냥 미친 놈이죠. 우리 가족의 피에는 광기가 흐르고 있는 게 분명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 아버지란 작자랑 동생이 그렇게 미쳐버릴 리가 없죠. 빌어먹을, 분명 나도 마찬가지 일겁니다. 빌어먹을…….”
일기장에 이 부분은 의외로 차분하게 적혀있었다. 글씨체도 차분했고, 훼손된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케테르가 진행한 면담이 리에게 어땠는지는 몰라도, 리는 그날 저녁, 차분하게 그 면담을 일기장에 적었다. 나는 컴퓨터를 보았다. 리의 사진이 있었다. 나는 찬찬히 그 얼굴을 보았다. 사진 편집에 썩 좋은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훼손된 문서의 그림을 복구할 때 몇 번 프로그램을 다뤄보긴 했다. 그 쪽 전문가보단 덜 하긴 했지만 꽤 알아볼 만 하게 복원은 할 수 있었다.
“야망을 좀 가져봐.”
선배가 말했다.
“선배의 야망은 뭔데요?”
내 물음에 선배는 답하지 못했다. 리는 뭐라고 답했을까. 풍랑 속에서만 삶의 목표를 찾았던 저 여자는, 도대체 재단에 왜 들어왔던 것일까. 정말 나처럼 일상에 지쳐서 그랬을까. 가만, 나는 왜 재단에 들어왔지? 리의 얼굴은 친숙했다. 나는 왜 재단에 들어왔지? 그 이전에 나는 왜 선배를 리로 의심했지? 케테르는 무슨 생각으로 재단을 만들었으며, 오캐인은 무슨 생각으로 케테르를 따라온 것일까? 데미안이 기억소거제를 만드려고 갖은 애를 쓴 이유는 또 무엇이고, 그뤼네테는 케테르의 비서로 일 한 것일까. 그리고 그 모든 의문 이전에, 나는 왜 선배를 리로 의심했지?
왜?
물이 떨어졌다. 이마 위로 물이 떨어졌다. 툭, 하고 이마 위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뒷걸음질 쳤다. 비였다. 개중에는 우산을 가져온 사람도 있었고, 또 나처럼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몇 몇은 그냥 비를 맞으며 뛰어갔고, 몇 몇은 신문지를 우산 대신 뒤집어 썼으며, 몇 몇은 친구나 연인과 함께 우산을 같이 썼다. 겨울에 웬 비람.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맞으며 뛰어가자니 관사가 너무 멀었고, 리의 일기장을 안 젖게 할 자신이 없었다. 비가 땅에 닿을 때 마다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들어가서 비가 그칠 때 까지 기다려야겠다. 케테르는 착실히 도킨스의 권한을 뺏어갔다. 처음에 도킨스는, 재단의 첫 삽을 뜬 사람 중 하나로 재단 운영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하지만 도킨스가 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그는 후원자들을 모두 잃고 말았다. 결국 그 일로 도킨스는 연구직으로 물러나고, 케테르가 어쩔 수 없이 소장 직을 맡게 되었다. 도킨스는 연구소의 박사로 있으면서 수많은 SCP를 관리했고, 연구했다. 동시에 자신의 본업인 보안 시스템 설계도 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그는 다양한 부분에 손을 뻗쳤다. 케테르는 그를 경계했다. 도킨스는 욕심이 너무 많았다. 자신의 과오로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구소 소장 직을 끊임없이 노렸다. 또한 그는 SCP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것을 유용하게 쓸 수 있기를 바랐다. SCP 재단의 이념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케테르는 그를 경계했다. SCP의 사용. 도킨스가 그것을 과연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지 케테르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케테르는 천천히 연구가 완료된 SCP를 그의 손에서 빼냈다. 새로운 기지를 만들어 도킨스를 유폐할 계획도 짰다. 그리고 도킨스를 유폐할 궁궐은 1922년 말, 완성되었다. 상당히 빨리 지어진 것이다. 일기장을 덮었다.
“이제쯤 비가 그쳤으려나…….”
나는 작업실 문을 열었다. 분명 꺼져있었던 기록보관소 불이 다시 켜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개인 책상의 불이 켜져 있었다.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을 반쯤 닫았다.
“네. 네. 아, 그건 아닙니다만.”
나는 귀를 세웠다. 불빛은 멀었지만, 기록보관소는 조용했다. 불빛 쪽을 보았다. 선배가 앉는 자리 근처였던 것 같다.
“미안하지만……. 제발 내 말을 들으십시오, 제발!”
말투가 격해졌다가 사그라들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여기는 보안이 되지 않는 곳이에요. 아, 이 핸드폰은 보안이 확실합니다만……. 예? 장소가 불확실 하다고요, 장소가! 나보다 젊으면서 그 정도도 못 알아들으면 어떻게 합니까?”
사그라들었던 말투가 다시 격해졌다.
“제발, 장소 좀 옮기고 말하자고요. 여기 사람 있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나는 숨을 죽였다. 손으로 더듬어 작업실 불을 껐다. 다행이 눈치는 못 챈 것 같았다. 잠시 정적이 있었다.
“네. 압니다. 알아요. 내가 어떻게 될 지도 알고. 불에 타 죽거나, 아니면……. 하. 그 사람처럼 통 속의 뇌가 되겠죠. 하지만, 하지만 그건 내가 계속 말하던 것이었어요. 이제 그만 두겠다고. ……. 변명 마요. 변명하지 말라고요!”
여자 목소리가 기록보관소 안에 울렸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그 때마다 내 은퇴를 막은 건 당신들이에요. 하……. 그만 하죠. 보안 등급이요? 이봐요, 당신이 착각한 것이 있나 본데, 4등급 중 그 자리에 간 사람은 우리 셋뿐이에요. 당신도 하위 연구원이었잖아요. ……. 욕 아니에요, 이봐요. 4등급은, 아 내 말 좀 들으라고요. 4등급 요원들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아요. 누구든지 상상할 수 있잖아요. 알만한 사람이 왜 이러시나 몰라. 아무튼 끊어요. 내일 보고 말하자고요. ……. 마음에 안 들면 사살하던지 기억소거를 하던지 마음대로 해요.”
무언가를 집어 던지는 소리가 났다. 한숨 소리도 들렸다. 나는 문을 열고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용기를 내기로 결정했다. 문을 활짝 열었다.
“거기 누구요?”
불빛 속에서 사람이 일어났다. 나는 순간 두 손을 들었다.
“기록보관소 1등급 사서이자 고문서 복원 전문가…….”
“닥쳐 임마.”
역시 선배였다.
“관등성명 따위 내 알까보냐.”
선배가 투덜거렸다. 나는 머쓱하게 손을 내렸다. 선배는 불을 껐다. 캄캄했지만 곧 눈은 어둠에 익숙해졌다.
“들었지?”
선배는 내 옆에 와있었다. 온 몸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내가 장소 좀 옮긴댔는데, 그걸 또 그렇게 붙들고 참나……. 걱정은 마, 이 정도로는 죽지도 않아.”
선배가 내 어깨를 쳤다.
“그…….”
나는 침을 삼켰다. 머릿 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러면……. 선배 핸드폰은…….”
선배는 나를 쳐다보고는 미친 듯이 웃으며 기록보관소 불을 켰다. 선배는 바닥을 뒤졌다.
“선배, 그럼 선배는…….”
“뭐, 안 그래도 알려주려고 했어.”
선배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O5와 일해본 느낌은 어때?”